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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May 27. 2023

크로바레코드 10

10. 비스킷 깡통-H

 

이 커플을 정말이지 초밥을 좋아한다. 그럼 두 분이 데이트 할 때 드시면 되잖아요. 초밥이 싫은 건 아니지만, 맨날 먹으면 뭐든 물린다. 오늘은 매운 게 먹고 싶었는데, 

“어, 어디서 버스킹 하나보다.”

보통 때는 공원을 가로지르지 않는데, 이 커플의 권유로 들어섰다. 남의 데이트에 동참하는 것 같아 불쾌했는데, 친근한 기타 소리를 들으니까 잘한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네?”

응? 태수 선배의 등짝에 가려서 몰랐는데, 목소리를 들으니까 알겠다. 막 구운 빵처럼 따뜻한 목소리. 제이다. 제이.

분명 자작곡이다. 따뜻한 음색에 맞는 나른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노랫말이다. 정신없이 빠져있는데, 유나 선배가 커피 두 잔을 건네주었다.

“같이 마셔.”

고맙습니다. 초밥집 백 번 더 가셔도 돼요. 민트색 스웨터를 입은 상큼한 그녀에게 간다. 노래하는 걸 들킨 그녀는 금세 얼굴을 붉힌다. 어린 시절 나를 지켜주던 곰 인형도 같이 있다. 


처음 손주와 함께 살게 된 할아버지는 무얼 선물할지 몰라 누나에게는 연필깎기를 내게는 곰 인형을 선물해줬다. 도시에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번개가 치는 날이나, 누나가 늦게 돌아오는 밤에 이 포근한 녀석을 안고 잠들었다. 녀석이라면 그녀도 지켜줄 것 같아서 불쑥 내밀었는데, 어쩐지 부러워지는걸. 그런 노래 가사가 있지. 하루만 네 인형이 되고 싶어.

햇살 속에서 보는 그녀는 장미봉우리처럼 싱그럽고 예쁘다. 더 생생하고 더 안아주고 싶게.    


“어떤 노래 좋아해요?”

“방금 그 노래. 제이가 만든 노래.” 

오직 나를 위해 그녀가 노래를 부른다. 이날을 꿈꾸었지. 산들바람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이 순간을. 아무리 아껴 들어도 노래는 금세 끝이 나고, 또 사람들이 모였다. 이런 목소리를 혼자 독차지하는 건 욕심이겠지. 박수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정중하게 인사한다. 

“내일 봐요.”


봄봄화실은 핑계일 뿐. 그녀가 보고 싶다. 요 며칠 아동실 폐기도서를 정리하느라, 크로바 레코드에 들리질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다니! 호랑이 가운이 솟는다! 으랏차차!     

부지런한 그녀는 벌써 가게 문을 열었다.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멜빵바지에 두건을 한 제이는 만화주인공 같다. 

“그럼 갈까요?”

“네.”

씩씩하게 계단을 올라간다. 건물 내부에 있긴 하지만 문이 따로 있지는 않아서 거의 외부나 다름 없는 터라, 외진 데를 좋아하는 청소년들이 종종 들르던 곳이다. 저번에 왔을 땐 담배꽁초며 먹다버린 쓰레기들로 지저분했었는데, 그새 치웠나 보다. 

화실 창으로 빛이 들어와서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하다. 밤에 왔을 땐 몰랐는데, 낮에 보니 전망이 좋다. 겨우 2층인데도 다른 집 옥상이며 멀리 있는 아파트까지 훤히 보인다. 

“뭐부터 하면 될지 모르겠어요.”

화실을 한 바퀴 둘러보고, 준비해온 목장갑부터 꼈다.

“버릴 건 버리고, 치울 건 치울까요? 이 상태로 세를 놓긴 어려우니까요.”


밤에도 어수선했지만, 먼지가 세세히 보이는 낮이 더 어수선하다. 그녀가 이젤을 피해 요리조리 버릴 물건들이 있나 살핀다. 

저 초상화가 저렇게 비뚜름했었나? 벽에 걸린 한물간 연예인의 초상화가 흔들린다. 하필 유리 공예품을 든 제이가 그 아래로 지나간다. 앗!

제이의 갸날픈 어깨를 끌어안는 순간, 초상화가 떨어지고, 유리 공예품이 산산 조각났다.


“괜찮아요?”

동시에 나온 말. 

깨진 공예품이 더 아름답게 빛난다. 거꾸로 떨어진 그림이 더 기괴하고 아름답다. 정형화된 틀을 깨면 이렇게 아름다워지는 걸까.

“화실을 정리한다고 해서 왔더니, 애정행각 중이네?”

오늘도 불청객이냐. 어깨를 끌어안은 손을 아쉽게 풀고 문가에서 건들대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이건 좀 너무 한 거 아니오!

“니가 제이구나? 듣던 대로 귀엽네?”

“누나가 여긴 웬일이야?”

슈퍼 아주머니의 딸, 순이 누나다. 긴 파마머리에 눈 둘 곳 없는 숏 팬츠를 입고 있다. 집에서 입는 차림으로 나다니지 마세요. 누나. 

“놓고 간 그림이 있어서 왔어.”

놓고 간 그림이고 자시고, 유리에 손이 베인 건 아닌지 제이의 말랑한 손을 들어 꼼꼼히 살펴 본다. 

“다친 데 없죠?”

“네. 근데 누구세요? 저 분?”

“슈퍼 아주머니 딸이요. 이름은 최 순이.”

그림을 뒤적이던 누나가 이편으로 쿵쿵 걸어온다. 뭔가 매우 못마땅한 눈빛인데. 흥.

“야! 내가 이름 바꿨다고 몇 번 말해! 순이 아니라고, 루비라고!”

그래 봤자. 내 눈엔 토종 순이다. 더 정감 있고, 좋구만. 문방구에서 파는 마론인형도 아니고 루비가 뭐람. 

“아, 안녕하세요. 주신 옷 잘 입고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맘씨 고운 제이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 생긴 것만 예쁜 게 아니야. 

“옷장이 터질 지경이었는데, 나야말로 고맙지.”

“무슨 그림인지 알려주시면, 같이 찾을게요.”

“됐어. 나 혼자 찾아도 돼.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해.”

루비 아니 순이 누나가 능글능글 웃는다. 가끔은 이 동네가 싫다. 어디 애정행각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말없이 유리를 치운다. 그녀도 쪼그리고 앉아 동참한다. 

“깨져서 완성되는 것도 있네요.”

“네. 조각난 게 더 예뻐요.”

파편이 있을까 봐 바닥을 쓸고, 물티슈로 닦았다. 

“아무래도 뭘 버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오늘은 청소만 할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까진 봄 선생님의 물건이다. 함부로 버리기도 그렇다. 


“와, 이 그림 예뻐요.”

수국이 가득한 화단에 소년의 뒷모습이 보인다. 완전 뒤통수는 아니고, 누군가 이름을 부른 듯 살짝 돌아보는 뒷모습. 그래서 더 아련하고 예쁜 그림이다. 수국의 푸른 색채감과 소년의 쪽빛 셔츠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림 보는 눈이 있네. 그건 봄 쌤 그림이야.”

순이 누나가 힐끗 들여다보고 참견한다. 

“봄 쌤이요?”

“그래, 강의가 없는 한가한 시간엔 그림도 그리셨으니까. 아마, 몇 개 남아있을 거야.”

“선생님은 유명한 분이셨나요?”

순이 누나가 팔짱을 끼고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나저나 누나도 화실에 다녔었구나. 하긴  마을의 모든 소녀들이 화실에 다녔던 것 같다. 우리 누나를 빼고. 

“전시회도 종종 하시고, 그림도 꽤 잘 팔렸다고는 들었어. 그래도 유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유명했다면 이 작은 동네에서 화실을 열지는 않았을 테지. 제이가 봄 선생님의 그림을 한쪽 벽에 세워놓는다. 


“봄 쌤 그림을 빼면 별로 남는 게 없을 거야. 습작이 거의 다고, 입시 위주의 그림들이 많았으니까.”

“근데도 선생님은 애지중지 하셨나 보네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보관하신 걸 보면요.” 

제이의 말에 순이 누나가 어깨를 으쓱한다. 

“정이 많으신 분이셨어. 마음으로 그림을 보는 분이셨고. 그래서 아무리 서툰 그림이라 해도 소중히 여기셨지.”

누나의 목소리가 잠겨 든다. 화실에 사람이 많았던 건 준이 형의 영향도 있지만 역시 다정다감한 봄 쌤의 성향 때문이었겠구나. 

이번엔 벚나무 아래 소녀다. 곱슬곱슬 짧은 머리칼이 꼭 제이 같다. 역시 반쯤 돌아보는 뒷모습이라 얼굴이 확실히 보이지 않는다. 봄 선생님은 뒷모습을 좋아했구나. 

“봄 쌤의 화풍을 알겠지?”

확연히 알겠다. 수국 그림 곁에 벚나무를 기대 놓는다. 내가 벚나무 아래서 제이를 본 것처럼 제이는 수국 속에서 나를 찾았나 보다.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닮았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봄 선생님의 그림을 사람들이 좋아했던 이유를 알겠다. 마음속에 있는 누군가를 그림에 투영하게 만든다. 그래서 꼭 갖고 싶은 그림. 바람이 드는 창가에 걸어놓고 싶은 그림. 그가 그리워질 때 말을 걸고 싶어지는 그림. 그럼 그녀도 이편으로 돌아설까.  

 

“아, 나도 찾았다!” 

순이 누나가 작은 캔버스를 들고 종종걸음친다. 보아하니 그림만 들고 내뺄 모양인데, 어림없다. 바람처럼 달려 누나의 그림을 낚아챘다.

“야! 빨리 안 내놔!”

이미 늦었어. 제이와 내가 봤으니까. 어설픈 그림 솜씨지만, 딱 봐도 누군지 알겠다. 선생님 그림과는 다르게 이 가무잡잡한 소년은 대놓고 정면을 주시한다. 흰 이가 보이게 활짝 웃는 것이 누나 봐도 준이 형이다. 속내를 들킨 순이 누나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정말 소중한 그림이네.”

억, 어릴 적 버릇 그대로, 순이 누나가 정강이를 걷어찼다. 

“발설하면 죽어!”

죽어가는 나 대신 제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동네 우상이었나 보네요.”

“잘 생겼잖아요.”

아직 아픔이 가시진 않았지만, 준이 형처럼 방정을 떨 순 없다. 그녀 앞에서. 

“전 모르겠던데. 하니에 비하면, 별로…”

말을 하다말고 제이의 얼굴이 붉어진다. 덩달아 내 입도 벌어진다. 그만, 이성을 찾아야 해. 

봄 쌤 그림을 연달아 찾았다. 대나무 숲 그림이랑, 동백 숲 그림이다. 네 작품 다 계절감이 있어서 나란히 걸어두어도 좋을 것 같다. 그림 사이즈도 같아서 더 좋다. 

“보물찾기 같아요.”

먼지투성이 그녀가 사랑스럽게 외친다. 머리에 붙은 먼지를 떼어주며 나도 웃었다. 너랑 있으면 뭘 해도 좋네. 


“봄 쌤 그림을 잘도 찾았네?”

나보다 별로인 외모의 준이 형이 드디어 나타났다. 화기애애한 시간을 방해한 건 얄밉지만, 손에 든 간식이 있으니 용서해줄까.

“이거 먹고 해.”

마침 출출하던 참이다. 이미 버린 옷, 먼지투성이 의자에 앉아 만두를 먹는다. 피가 얇고 속이 꽉 차서 맛있다. 칼칼한 김치만두에 고소한 고기만두. 제이도 꿀떡꿀떡 잘 먹는다. 오물거리는 입도 예쁘다. 

“쌤 그림하고 애들 그림이 확 다르죠?”

볼이 불룩한 제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맘에 드는 그림 있어요?”

있긴 있다. 아마추어의 그림이지만, 마음이 가는 그림. 주로 집을 그린 그림인데, 붓질이 산듯하고, 색감이 가벼워서 느낌이 좋다. 숲속 오두막이랑 가파른 절벽 위에 집, 그리고 나무 위에 집이다. 열린 창으로 커튼이 나부끼고, 반쯤 열린 문이 손님을 부르는 것 같다. 어쩐지 걸어 들어가고 싶은 그 집들은 모두 요정의 집처럼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럽다. 


“저 그림, 준이 형 그림이죠?”

어째서 제이도 준이 형을 형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그마저 귀엽긴 하지만. 

“왜 그렇게 생각해?”

준이 형이 요정의 집을 요리조리 살피며 묻는다.

“사인이 같아요. 마리아랑.”

“그 찰나에 사인을 봤단 말이야? 눈썰미가 무섭네.”

준이 형이 배 음료를 제이에게 건넸다. 

“저 그림을 찾으러 오신 건 아니죠?”

“그래. 저걸 찾으러 온 건 아니야.”

제이가 웃는다. 만개하는 장미처럼. 만두를 먹던 나도 따라 웃는다. 준이 형이 보면 미친 것처럼 보이겠지. 그래도 뭐. 


“찾는 그림은 여기에 없어요.”

“내가 뭘 찾는지 어떻게 알아?”

준이 형이 고개를 갸웃하며 웃는다. 저 미소에 온 동네 소녀들이 뻑 갔지. 형. 나빠요. 그녀에겐 그런 미소 짓지 마요.

“입시용 그림을 보러온 건 아닐 테고, 봄 선생님 그림도 아니고, 어설픈 연예인 초상화도 아닐 테고.”

형이 팔짱을 낀다.

“순이 언니가 놓고 간 그림. 맞죠?”

“봤구나?”

“방금 찾으러 왔었으니까요.”

“방금?”

막 뛰어나가려던 형이 우뚝 멈춰 서더니 제이의 어깨를 움켜잡는다. 

“뭘 그렸는지 봤어?”

“그게 중요해요?”

제이의 앞을 가로막고, 대신 묻는다. 여기서 끼 부리면 죽어요. 형.

“중요해! 그게 그 애의 마음이니까.”

“그림 속 사람이 준이 형이 아니라면, 안 갈거에요? 형이 확인하려는 게 정말 그림 속 사람이에요? 아니면 형 마음이에요?” 

“모르겠어.”

후두둑,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준이 형이 그녀를 따라 뛰어간다. 순이 누나가 놓치고 간 사과만 데굴데굴 화실바닥을 굴러간다. 

“그리고 싶은 사과네요.”

제이가 붉고 탐스러운 사과를 집어든다. 

“먹고 싶기도 하구요.”

“네”

그녀가 옷깃에 쓱쓱 닦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내게도 건넨다. 나도 따라 아삭, 그 속살을 베어 문다. 맛있다. 


“크로바 레코드를 그린 그림 말고도 매직이 그림이 더 있을 텐데.”

“그럼, 몽이 누나 갖다 줄까요?”

사과를 건네다 말고, 내 입이 떡 벌어진다. 우리 누나의 마음까지 눈치챘단 말이야?

“아, 죄송해요. 제가 사랑에 빠지니까, 그 마음이 너무 잘 보여서. 역시 모른 척 할 걸 그랬죠?”

아,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과,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밖에는! 한 입씩 베어먹은 사과가 바닥을 뒹굴고, 나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포옥, 품에 안긴 그녀는 먼지투성이여도 사랑스럽다.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그녀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지지만, 안 놔줄 거다.

      

자장면에 탕수육을 시켰다. 몇 년째 쌓인 먼지를 쓸어내고, 철 지난 팜플랫이며 입시자료들을 분류해서 버렸다. 말라붙은 물감이랑 빳빳하게 굳은 붓들, 그리고 망가진 이젤들도 정리했다. 그 와중에 매직이의 그림도 찾아냈고, 준이 형의 그림도 몇 개 더 찾았다. 


아무에게도 소문을 낸 것 같지 않은데, 술을 든 매직이가, 오징어를 든 누나가 잘도 들어온다. 역시 이 동네를 떠나야겠어.

“그 꼬라지를 하고 먹게?”

“내 꼬라지가 어때서?”

먼지투성이 그대로 화실에 돗자리를 깔고 앉은 모습이 얼마나 소탈해 보이고 좋아? 돗자리도 여기서 찾아냈다. 뭐, 깔고 앉으나, 안 깔고 앉으나 별 차이 없이 더럽긴 하다만.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

매직이가 형광등을 가리킨다. 젠장 나방이 꼬였네. 마침 탕수육에 자장면도 도착했다. 

“여기 있는 게 봄 쌤 그림? 역시 수준이 다르네.”

누나가 수국이 그려진 그림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누나의 안목도 제법인데. 남자 보는 눈은 좀 별로일지 몰라도.

“그림 속, 소년 말인데. 꼭 하니를 닮았네, 그치. 제이야?”

“아, 네.”

홍조가 피어나는 두 뺨, 어디선가 사과 향이 나는 것 같은데.

“매직이 그림도 찾았는데. 누나 가질래?”

“왜 매직이 그림을 내가 소장하냐?”

대뜸 화를 내면서도 눈으로는 그림을 찾는다. 

“이거 섭섭한데? 누나가 괜찮다면 주려고 했는데.”

부지런히 종이컵을 분배하며 매직이가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그럴만한 값어치는 있어?”


자장면을 비비던 제이가 일어나서 구석에 둔 매직이의 그림을 찾아온다. 사인도 없고, 특징도 없어서 지나칠 뻔했다. 옥상에 걸린 빨래가 한들한들 흔들린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푸른 체크무늬 여름 원피스도 시원스레 나부낀다. 반바지와 여름 셔츠들이 같이 흔들리지만,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이제는 헤져서 버렸지만, 누나가 가장 좋아했던 옷피스. 그림을 알아본 매직이의 얼굴이 짬뽕 국물처럼 붉어진다.

“잘도 찾아냈네.”

“저 옷을 어떻게 잊겠어.”

내가 이죽대자, 매직이가 고개를 푹 숙인다. 

“가질래.”

응? 

“이 원피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옷이야. 추억 속에만 남은 줄 알았는데, 그림 속에도 남았네. 그래도 되지?”

반짝 고개를 든 매직이가 기쁜 듯이 웃는다. 몰래 처분할 걸 그랬나? 

“준이 형이랑 루비 누난 왔었어?”

자장을 소분해서 골고루 나눠주던 제이가 장난스럽게 매직이를 째려본다.

“역시 그 둘을 부르신 건 매직 씨였군요.”

그래, 바로 너였어. 우리 둘을 방해한 놈은.  

“루비가 누군데?” 

자장면을 냉큼 받아먹으며 누나가 묻는다. 정말 몰라서 물어?

“슈퍼 집 순이 누나요.”

“걔가 왜 루비야?”

“이름 바꿨다고 했잖아.”

“흐응, 그랬나?”

시큰둥하게 반응하면서 눈은 그림을 본다. 그렇게 좋으셔? 흥, 내가 저 그림 세탁실에 딱 건다. 곰팡이나 확 슬어라. 

“부르려면 우리 누나랑 준이 형을 부르지. 왜 순이 누나냐?”

“그러는 너는 왜 몽이 누나랑 준이 형이냐?”

“그야…”

느닷없이 들어온 탕수육이 말문을 막는다. 누나여, 기도가 막힐 뻔 했소. 누나도 한때 준이 형을 좋아했었다. 잘 생긴데다 다정해서, 심장이 있다면 누구나 그렇게 반응했을 거다. 준이 형도 싫지 않은 듯해서. 잠깐 사귄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중학교 때 일이고, 장난처럼 시작된 연애는 역시 장난처럼 끝났다. 매직이도 아는 줄 알았는데.  

“혹시 누나나 형이 폐를 끼친 건 아니죠?”

그제야 제이에게 묻는다. 그런 건 쳐들어오기 전에 물어야 하는 거 아니냐. 

“끼쳤어요. 아주 많이요.”

“아, 죄송해요.” 

“정리하는 데 방해만 되고, 그림도 맘대로 가져가 버리셨으니까”

“아,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매직이가 쩔쩔매며 변명을 한다. 

“엊그저께 슈퍼에서 만났거든, 본 김에 화실 정리한다는 소리를 했지. 누나도 다녔던 곳이니까. 근데, 이렇게 폐를 끼칠지는 몰랐어.”

“회사도 안 가고 왔더라.”

“월차까지 내고? 대체 뭔 그림인데?” 

“비밀!”

순이 누나의 부탁대로 그림의 주인공을 말해줄 순 없다. 뭐 다들 짐작은 할 테지만.

“뭐 야한 그림은 아니지?”

허, 매직아, 그 말이 정녕 니 입에서 나온 것이냐. 누나가 슬리퍼를 신은 발로 매직이를 걷어찬다. 여기는 격투장이 아니라고요. 

“술김에 우리 말 놓을까요?”

그녀가 수줍게 묻는다. 맘속에서는 이미 말을 놓았지만, 현실에서는 아직 존댓말이다. 

“좋죠!”

머뭇대는 나 대신 매직이가 알랑댄다. 

“화실 전엔 카페였어. 여기.”

그래서 전망이 좋은가. 넓은 통창도 그렇고. 화실보다는 카페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아주머니들이 차 마시러 들리는 것도 옛날부터 있었던 거야. 곰 아저씨가 그걸 어찌 받아줬는지는 모르지만.”

누나의 증언이 맞다면, 꽤 유서 깊은 찻집이구나. 이 크로바 건물.

“여유가 생긴다면 카페를 해도 좋겠네. 갤러리 겸 카페.”

제이가 생각에 잠긴다. 

“이 구석까지 차를 마시러 올까?”

“올 사람은 와.”

“누가 들어올진 모르지만, 다음 번엔 카페를 했음 좋겠다. 이 동네엔 은근 카페가 없거든.”  


안주도 떨어져 가고, 술도 떨어져 가서, 제이와 내가 슈퍼에 가기로 했다. 매직이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여름이 가까워 오는지, 밤공기가 쾌청하게 느껴진다. 먼지투성이 화실을 벗어나 살그머니 제이의 손을 잡는다. 술기운이 올라온 제이의 두 볼이 붉다. 

“제이야.”

“응.”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것도 처음. 

“하니야.”

이렇게 이름을 불리는 것도 처음. 

“응.”

밤바람이 내 달아오른 뺨을 식혀줄까. 저 달빛이 두근대는 심장을 달래줄까. 우리 둘을 놀려대듯 풀벌레가 찌르르 울어댄다. 


“오늘도 뭉쳤구나!”

슈퍼 아주머니가 반긴다. 너무 반기지 마세요. 우리 죄다 알콜중독이에요. 

“그렇게 됐네요. 순이 누나는요?”

“사과 훔쳐간 뒤론 안보인다.”

역시 훔친 사과였어. 너무 달콤하더라니.

“준이 형은요?”

“준이? 김 준이? 프랑스에 있다며?”

“여긴 안 왔나보네요.”

아주머니의 표정이 일순 심각해진다. 음, 뭐가 있나?

“순이도 알아? 준이가 온 거?”

 알다마다요.

“이걸 어쩌나…”

슈퍼 아줌마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건 처음 본다. 뭔가 있나 본데?

“저한테 이실직고하세요. 도울 일 있으면 도울게요.”

“그럴까? 뭐 지난 일이니까. 준이가 유학 가고 나서 편지가 왔었거든. 아무래도 둘이 좋아했었던가 봐. 근데 순이가 고3 아니냐. 마음이 뒤숭숭하면 공부도 안 될 것 같고. 그래서 오는 족족 다 버렸어.”

“정말 다 버렸어요?”

제이가 다정하게 묻자, 아주머니가 쓴웃음을 지으며 어딘가로 사라진다. 들고 온 건 오래된 비스킷 깡통. 차마 버리지 못해서 모아둔 모양이다.


“이거, 제이가 보관해줄래. 그게 낫겠다. 눈치 봐서 버리던가. 순이한테 주던가.”

“역시 후회되시죠?”

“그래. 그때 막지 않았다면, 순이가 독신을 고수하지도 않았을 것 같고.”

“누나, 독신주의자에요?”

의외네. 애들도 좋아하고, 은근 가정적이라 결혼은 꼭 할 것처럼 생겼는데. 

“그래. 사위는 둘 때 치고, 꼬물꼬물한 손주가 보고 싶은데, 아주 내가 미치겠다.”

“좋은 인연이 나타나면 결혼 할 거에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렇겠지. 근데도, 미안해. 혹시 운명의 사람을 내가 막은 건 아닌가 하고.”

운명의 사람이라면, 아주머니가 막더라도, 다시 찾아올 거에요. 암요. 그래야 운명의 사람이죠. 아주머니를 다독여주고 슈퍼에서 나왔다. 


“화실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저 둘은 만나지 않았을까?”

비스킷 깡통을 든 그녀가 근심스레 묻는다. 누군가의 연애에 개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잘 되건 못 되건 일말의 책임이라는 것이 남는다. 

“아니, 준이 형이 귀국한 순간, 이미 둘은 만날 사이였어.”

순이 누나가 먼 데로 도망친 것도 아니고, 이 동네에 사는 한, 둘은 언젠가 만났을 거다. 

“잠깐, 나 이거 두고 갈게.”

“다른 사람에겐 비밀로 하는 게 낫겠지?”

“응.”

그녀가 크로바로 들어간다. 밖에서 올려다 본 화실 불빛은 밝고 따뜻해서 나방처럼 끌릴 것 같다. 그래서 몽이 누나랑 매직이가 들어왔구나. 그 따뜻한 빛을 따라. 


상자 둘 곳을 금방 찾았는지 그녀가 나왔다. 손엔 작은 라디오. 저 오래 묵은 걸 어디서 찾아냈지?

“옷장 속에서 찾았어. 되려나 모르겠네.”

그녀가 주파수를 맞춘다. 불협화음이 나더니, 곧 맑은 목소리가 잡힌다. 

“와, 된다!”

신이 난 그녀가 뛰어 올라가고, 나도 뒤따른다. 양손 가득 짐이 있지만, 절대 무겁지 않다. 


“곰 아저씨 라디오네? 오랜만에 본다!”

“음질 괜찮죠?”

“응, 소리 좀 키워봐.”

나의 하나밖에 없는 동지 매직이가 봉지를 받는다.

“루비 누난?”

“없어. 준이 형이랑 사라졌어.”

“뭐 괜찮겠지. 누나랑 형 잘 어울리잖아?”

“우리 누나랑도 잘 어울려. 준이 형은.”

“준이 형은! 다 잘 어울려! 됐냐!”

그래 됐다. 녀석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오징어를 물려준다. 씩씩대던 놈이 누나가 웃어주자 실없이 따라 웃는다. 저도 저런 모습인 건 아니죠? 완전 얼간이잖아요.

“나도 이 과자 좋아하는데.”

그녀가 단풍시럽을 묻힌 과자를 먹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난다. 얼간이 맞네. 나.


12시가 넘어서야 자리가 끝났다. 몸은 힘든 데 마음은 행복하다. 내일은 지원이랑 목욕탕이나 가야지.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이네.”

그림을 어디 걸까 궁리하며 누나가 이죽거린다. 

“그 그림은 세탁실에 딱 맞는 그림이야. 빨래잖아.”

“그런가?”

“그래. 거기 못도 박혀있고. 바로 걸면 돼.”

“그래, 그래야겠다.”

망치 찾는 것 자체가 귀찮겠지. 하물며 못을 박는 건 더더욱. 귀찮은 건 질색인 누나가 그림을 세탁실에 건다. 훗, 모든 게 계획대로 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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