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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May 29. 2023

크로바레코드 11

11. 양치기 소녀-J

    

봄은 짧다. 청춘만큼이나 짧다. 장미 넝쿨이 담장마다 피어 그윽한 향을 내뿜는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우체부 아저씨가 들어왔다. 입에 물고 있던 빵을 내려놓고, 서명을 했다. 곰 아저씨가 보낸 소포. 빵칼로 북북 뜯는다. 


이건 뭐지? 모월 모일 돈을 빌려 갔다는 차용증이 봉투에 수북하다. 액수는 백만 원부터 수  천만 원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이 아저씨가 돈놀이라도 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름을 살피다가, 뭔가를 알아챘다. 차용증에 적혀있는 이름들은 죄다 곰 아저씨의 친척이다. 대부분 김 씨고, 김 씨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아는 이름들이다. 이분들이 이렇게나 많이 곰 아저씨에게 돈을 꿨구나. 그리고 아무도 갚지 않았구나.      


지난번엔 미안했다. 널 그렇게 보내면 안 됐는데. 

꼭 다시 놀러오렴.

보내주는 건, 보다시피 차용증이야. 한때 크로바 레코드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단다. 

그때 돈을 빌려 가신 분들이야. 

네가 아는 분도 있을 거고, 이름만 들어본 분도 있을 거야. 

곧 이분들이 널 찾아갈 거야. 그 때 이 서류가 필요할 거다. 

혹시라도 크로바 레코드에 권리를 주장하거든, 밀린 빚과 함께 네 빚까지 갚으라고 하렴.                                                                            

                                                                          아빠가.       


이젠 대놓고 아빠라고 하시네요. 근데, 이 빚쟁이 친척들도 제가 딸인 걸 아실까요? 아마 아니겠죠. 그러니까, 건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러 몰려온다는 거잖아요. 받고 싶은 유산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골치가 아프게 생겼구나. 혹시 이 빚쟁이 친척들 중에 빚을 갚아줄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겠지. 그 정도 재력이 있다면, 곰 아저씨한테 돈을 꾸지도 않았을 거다. 

시계를 흘끗 보고 부동산으로 향한다. 2층 화실을 내놓을 작정이다. 


“언제 적 월세야? 십 년 전에도 이렇게는 안 받았겠다.”

“건물이 많이 낡았어요.”

“다 쓰러져가도, 요즘은 이렇게 안 받아. 내가 봄봄화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우리 딸년도 거길 다녔거든.”

오, 그렇구나. 이 동네 소녀들의 성지라더니, 정말 그 나이 대에 어머니들은 다 아시는 구나. 방앗간 아주머니와 같은 연배로 보이시는 사장님이 사람 좋게 웃는다.

“곰 씨의 딸?”

“네.”

“그 양반, 내가 그렇게 월세를 올리라고 해도, 징그럽게 말을 안 들었거든. 아가씬 이참에 올려.”

“얼마 정도 올리면 될까요?”

“백은 해야지. 오천에 백. 그것두 시세에 비해선 싼 거야.”

얼쑤, 생활비가 들어오는 구나. 가게를 내놓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세입자가 들어오기만 하면 이 생활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왜 이리 히죽거려?”

벌써 오후가 돼서 참새 아주머니가 오셨다. 오늘은 떡 대신 롤케이크다. 설마 이런 것도 만드시는 거에요?

“선물로 들어온 건데, 나눠 먹으려고 들고 왔지. 뭔 차용증이 이리 많아?”

“그러게요.”

“어디 좀 봐봐.”

참새 아주머니의 눈빛이 매섭게 빛난다. 

“다 친인척이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이 빌려가 놓고 갚지도 않았대? 순 도둑놈들이네!”

롤케이크에 맞게 홍차를 우리는데, 아주머니들이 차례로 들어와선 차용증을 스캔한다.

“이 시절에 오천만 원이면, 지금으로 따지면 몇 억인데. 이걸 안 갚어? 이건 작정하고 떼 먹은 거네.”

슈퍼 아주머니도 격분한다. 저 대신 화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이 후련하네요. 

“근데 이거 사본이네?”

“원본은 잘 모셔뒀겠지.”

“그렇겠네. 그래서 이것들이 지금 떼로 몰려온다는 거야?”

응?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어느새 삼총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편지까지 스캔하고 있구나. 뭐 괜찮으려나. 

잘 우린 홍차를 각설탕과 함께 내놓는다. 각설탕은 녹는 걸 볼 수 있어서 좋다. 모서리가 동글동글해지고, 가끔은 구멍도 뚫리면서 사르르 녹는다. 오늘은 홍차가 뜨거워서 더 빨리 녹았다.


“네가 딸인 걸 모르는구나?”

역시 참새 아주머니는 예리하시네.

“네.”

먹기 좋은 크기로 롤케이크를 자른다. 슈퍼 아주머니는 벌써 한 조각 물고 우물거린다. 

“그래. 사람마다 사정이 있는 거니까. 그래도 빚쟁이 주제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웃기네.”

저도 웃겨요. 근데, 이 롤케이크 정말 환상이네요. 수제 딸기잼이 들어간 롤케이크가 입안에서 녹는다. 그 많던 케이크가 두 조각쯤 남았을 때, 그들이 왔다. 


“고작 2억을 빌려주고, 여길 꿀꺽 삼킨 게 아가씨야?”

얼굴이 붉으죽죽한 게 꼭 투견처럼 생긴 아저씨가 다짜고짜 삿대질을 한다. 

“이 건물이 얼만 줄 알고, 날로 먹어?”

곁에 선 치와와를 닮은 아주머니가 금방이라도 드잡이를 할 듯 덤벼든다. 적군은 다섯 명 정도. 차용증에 적혀있는 이름보다는 한 참 적다. 승산이 있는 싸움이다. 뒤에 포진한 삼총사가 숨을 몰아쉰다. 아직 때가 아님을 알고,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 오신 분들은, 곰 아저씨와 어떤 관계신가요?”

“어떤 관계? 피를 나눈 형제지! 아가씨 같은 생판 남이 이 건물을 삼키는 걸 보고 있을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야!” 

피를 나눈 건 거짓말이겠지. 곰 아저씨는 재혼한 작은 할머니가 데려온 자식이니까. 어쨌거나 내게는 친척뻘 되는 사람들이다. 

병풍처럼 나를 에워싸고, 위협을 해본들 무섭지 않다. 이 돈독 오른 오합지졸들아.


“그럼, 빚도 대신 갚아주실 수 있겠네요. 피붙이니까요?”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우리가 그걸 왜 갚아?”

투견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차츰 알겠다. 목소리 큰 순으로, 가장 욕심이 많구나, 그렇다는 건, 그만큼 꿔간 돈도 많다는 거다.

참새 아주머니가 혼란을 틈타 서류뭉치를 던졌다. 나이스 케치. 빚이 많이 순서대로 읊어본다. 

“김 옹 씨, 빌려 간 돈이 일억이 넘네.”

투견 아저씨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김 상이 씨는 칠천.”

치와와 아줌마도 입을 다문다.

김 남 씨는 팔 천.“

투견 아저씨와 닮은 동생도 잠잠해진다.

“이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조카뻘 되는 젊은 사내가 험악하게 쏘아본다. 그는 오 천이다. 

“곰 아저씨가 병들어 죽어갈 때, 누구 돈 들여서 수술하고 누구 돈 들여서 병원비 냈는지 알아요? 바로 내 피 같은 돈이에요. 당신들이야 빨리 죽기를 고대했겠지만. 그래야 빚이고 자시고 갚지 않아도 되고 이 크로바 건물도 나눠 가질 수 있으니까.”

“누가 그래!”

“우리도 돈이 있으면 갚았다고, 없으니까 못 갚았지. 누가 죽길 바랬다고 그래?”

정말 화가 난다. 나는 이 정도로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닌데.

“닥치고 빚부터 갚아요. 곰 씨가 나더러 그 돈 받으랬어요. 그 돈 다 갚고, 내 빚까지 갚을 수 있는 사람만 입 열라구요!”

말이 끝나지 무섭게 투견 아저씨가 손을 날렸다. 볼이 얼얼했다. 내 뒤에 숨죽이고 앉아있던 삼총사가 분연히 일어나 몸을 날렸다. 이젠 아주 아수라장이다. 차용증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눈처럼 흩날리고, 슈퍼 아주머니가 치와와 아줌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참새 아주머니는 투견 아저씨의 팔을 물어뜯고 있고, 세탁소 아주머니는 대걸레 자루를 다수를 향해 용맹하게 휘두른다.


“그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곰 아저씨가 서 있다. 곰 아저씨를 알아본 삼총사가 발 빠르게 전투에서 물러난다. 나의 용감한 전사들이여, 수고했노라. 아저씨 뒤로 부동산에서 봤던 젓가락 사내가 흠흠 헛기침을 하고 서 있다. 개싸움을 보고 마셨군요. 멍. 

“몸은 다 나았니?”

치와와 아줌마가 사근사근 말을 붙여보지만 곰 씨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 젓가락 사내가 주섬주섬 서류를 꺼낸다.

“마침 잘됐네요. 오신 김에 서류들 받아가시죠?”

“이게 뭐요?”

“독촉장입니다. 적힌 날짜까지 빚을 변제하지 않으시면, 소송에 들어갑니다.”

“뭐야!”

투견 아저씨가 젓가락 사내를 밀치고, 곰 씨의 멱살을 잡는다.

“형제끼리 이러기냐!”

곰 씨도 지지 않고 그의 멱살을 잡는다. 

“우리가 형제가 맞긴 해? 내가 죽어갈 때, 형은 뭐 했어? 기껏 한 게 부동산에 가서 크로바 시세 알아본 거야? 설마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어?”

투견 아저씨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결국 그가 스르륵 손을 놓는다.

“십 원짜리 한 장도 다 받아낼 거야. 집을 팔아서라도, 장기를 팔아서라도 다 갚아!”

치와와 아줌마가 애걸복걸한다.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걸 갚니? 응?”

“그럼, 처음부터 안 갚으려고 작정하신 겁니까?”

“아니… 갚으려고 했지.”

치와와의 목소리가 개미처럼 줄어든다. 

“그럼 갚으세요. 서울에 사시잖아요. 집 담보로 갚으세요.”

“삼촌, 너무 하네. 난 등록금 빌린 거잖아. 하나밖에 없는 조칸데. 좀 봐줘.”

곰 씨가 코웃음 친다.  

“너 결혼자금 모아 놨다며. 그걸로 갚으면 되겠다. 너랑 결혼할 사람도 아니? 너한테 빚있는 거?”

“삼촌!”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던 투견 아저씨가 조카를 제지한다. 

“다 나가있어. 다!”

서슬 퍼런 그의 말에 모두들 풀이 죽어 가게를 나간다.


“역시 그런 거냐? 욕심이라곤 하나도 없던 네가 이렇게 변한 걸 보면. 역시 그런 거야?”

그가 나와 곰 씨를 번갈아 본다. 그래 닮았겠지. 처음엔 몰랐겠지만, 금세 알아챘을 거다.

“형은 그 돈 없어도 살잖아. 하지만, 난 이젠 죽어. 그러니까 갚아.”

“소송까지 갈 거냐.”

“그건 형이 하기 나름이야.”

“곰아.”

“그만 가. 그리고 다시 오지 마. 여긴 형 같은 사람이 올 데가 아니야.”

“알았다.”

그가 축 늘어진 어깨로 가게를 나간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패잔병처럼 떠나간다. 


“이게 얼마 만이야? 곰 씨, 몸은 다 나았어?”

삼총사가 곰 아저씨를 에워싸고는 눈시울을 붉힌다.

“폐를 끼쳤네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장사하면서 안 싸워본 사람 있어? 이 정돈 기본이지.”

참새 아줌마가 피 묻은 이빨을 핥으며 씩씩하게 웃는다. 저 정도면, 광견병 주사를 맞아야 할 것 같은데. 근데 왜 이렇게 어지럽지. 나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아이고, 제이 괜찮니? 이 순딩이가 어쩐지 청산유수로 말한다 했어!” 

손이 덜덜 떨린다. 맞은 뺨도 이제야 쓰라리고 아프다. 슈퍼 아주머니가 차게 적신 수건을 볼에 얹혀 준다.

“미안하다.”

물끄러미 곰 씨를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그도 분명 오기 싫었을 거다. 저 진상들을 보러 여기까지 온 건 결국 나 때문이겠지. 나를 지키러 변변찮은 몸을 끌고 여기까지 왔겠지.

“엄만?”

“예약 손님이 있어서 오지 못 했어.”

“말고, 잘 있어?”

“응, 아주 잘 있어. 살도 좀 찐 거 같고.”

“그럼 됐어.”

공연히 무뚝뚝하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나 아니어도 삼총사가 상대해 줄 거다. 우리 둘을 주시하던 삼총사들이 휴식시간이 끝난 것도 모르고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고마워요. 이 은혜 잊지 않을 게요. 울음을 삼켜본다. 아까부터 기분 나쁘게 두근대는 심장을 재워본다. 정말이지 싸움은 싫다. 남에게 몹쓸 말을 하는 것도 너무 싫다. 그래도 이젠 이 가게를 지켜야 하는 것을 안다. 아빠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이곳을 이제는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을 안다. 


눈을 감았다 떴는데, 방이다. 곰 씨가 잠든 나를 옮겨 놓았나 보다. 난장판이던 가게도 말끔하게 정리돼 있다. 그리고 편지.   

  

더 오래 있어 주지 못해 미안. 엄마가 너무 보채서 어쩔 수 없네. 

엄마는 요즘 어리광이 심해졌어. 상상이 안 가지? 

이제까지 못 받았던 사랑을 이자까지 쳐서 받으려고 하나 봐.

꼭 다시 놀러 와. 그땐 맛있는 거 사줄게.

참, 밥솥에 밥 있고, 반찬 좀 사다 넣어놨어. 밥 거르지 말고.     

                                                      -아빠      


어쩐지 나쁘지 않네. 나도 엄마처럼 어리광을 부리게 된 건가. 

 기타를 꺼내 하릴없이 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떴다, 떴다 비행기, 동구밖 과수원 길을 불러본다. 참 이상하다. 가족은 따뜻하고 좋은 것인데, 나에게도, 아빠에게도 그렇지 않았구나. 내가 엄마에게 느끼는 애매한 감정만큼이나 아빠도 의붓형제들에게 낯선 감정을 느꼈을 것 같다. 때론 가족이라는 둘레가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운 동요를 생각나는 데로 불러보는데 이번엔 바나나를 든 순이, 아니 루비 언니가 들어온다. 

“동요가 이렇게 감미로운지 몰랐네. 신청곡도 되니?”

물론이죠. 제가 아는 곡이라면요.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 

아기 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 

해처럼 밝은 얼굴로      


빗방울이 뚝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엄마 찾아 음메 아빠 찾아 음메 

울상을 짖다가     


해가 반짝 곱게 피어나면 

너무나 기다렸나봐

폴짝폴짝 콩콩콩

흔들흔들 콩콩콩

신나는 아기염소들     


루비 언니도 나지막이 따라 부른다.  

“저번엔 미안했어. 방해만 하고.”

바나나를 까서 언니에게 먼저 건넨다. 이 또한 장물임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훔쳐온 성의를 봐서 먹어볼까. 

“준이 형은 만나셨어요?”

“응, 바로 따라잡혔어. 예전엔 내가 더 빨랐는데.”

간절함이 가속도를 높여줬나 보네요. 언니가 침묵에 잠겨버려서 차를 내오기로 했다. 최상품의 바나나에 손을 댔는지, 식감도 좋고 달콤하다. 퍼석거리는 맛이 전혀 없이 쫀득거린달까. 몽이 언니가 일전에 가져다 준 쟈스민 차를 우렸다. 

“나도 참, 바보 같지. 그 앨 그리다니.”

아까 먹다 남긴 롤케이크도 함께 내왔다. 

“그건 과제였어.”

“무슨 과제요?”

포크로 케이크를 찍어 언니에게 내밀었다. 

“그날 봄 선생님은 장미 한 송이를 테이블에 놓아두시고는, 이 꽃을 전해주고 싶은 사람을 그리라고 하셨어. 좀 황당한 숙제라, 아무나 그리면 되겠지 싶어서, 대충 그렸는데.”

그리고 보니까 준이 형이였나 보네요.


“봄 쌤은 아셨던 것 같아. 내 마음을. 내가 그에게 쌀쌀맞게 굴어도, 좋아했다는 걸.”

라디오 주파수를 맞춘다. 추억 속에 노래가 흘러나오면 언니도 마음이 좀 편해질까. 언니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아무것도 안 하기엔 우린 아직 서먹한 사이다. 그런 내게 이런 얘기를 털어놓는 건,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거겠지. 어쩌면 아무것도 몰라서, 더 편한 것일까. 


“준이 형은 뭘 그렸어요?”

“그 앤 그 꽃을 그렸어. 테이블에 놓여있던 노란 장미.”

“그 꽃, 지금 언니 방에 있어요?”

“그래.”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선물했구나. 준이 형은. 루비 언니는 그 마음을 받았고. 흔해 보이는 해피엔딩에도, 뜻하지 않는 걸림돌은 있겠지. 


“근데 난 비혼주의자야.”

슈퍼 아주머니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나저나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것일까. 비혼주의자라서, 사랑조차 멀리한다는 말이라면 납득이 안 되는데?

“어릴 땐, 그냥 만날 수 있거든. 사랑만 하면 되니까. 근데, 서른이 다 되고 보니깐, 그건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아. 상대는 나를 결혼까지 생각해서 만나는 거잖아.”

“그래서, 연애조차 안 하시는 거에요?”

“해. 하기는. 진지하게는 아니고, 가볍게. 근데 준이랑은 안돼.”

“왜요?”

“벌써 마음이 아프니까.”

어째서 진지하게 만날 수 없는 거에요? 그냥 사랑하면 되잖아요. 말 대신 자스민 차를 조금 더 따랐다. 


“나, 임신이 안 돼. 전혀 안 되는 건 아닌 데, 아주 어렵대.”

멀거니 언니를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언니에게 필요한 건 위로도, 빈말도 아니다. 들어주는 마음뿐.

“아기야, 안 낳아도 되고, 정말 키우고 싶으면 입양해도 되겠지. 근데, 내가 갖고 싶어. 내 아기를. 그 기쁨을 줄 수 없다면, 차라리 결혼을 포기하는 게 나아.”

사랑의 결실. 아빠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결실이 있어도 하지 못한 결혼이 있는데, 언니는 그 결실이 없어서 결혼을 포기한다. 롤케이크의 달콤함으로도 침잠된 기분을 끌어올릴 수가 없다. 


“와인 한 잔 할래요?”

언니가 고개를 끄덕여서, 찬장 속에서 발견한 묵은 와인을 들고 왔다. 안주는 치즈, 샌드위치를 만들려고 사다 둔 거다.

“곰 아저씨 것 같은데?”

“이젠 제 거에요.”

와인 잔이 없어서, 유리컵에 따랐다. 투명한 붉은 색이 잔에서 찰랑댄다. 언니 이름처럼 붉고 예쁘다. 

“아, 달콤해.”

농축된 단맛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아찔하게 달다. 

“준이 형의 사랑도 이렇게 오랫동안 익어왔을 텐데, 열어보지도 않고 포기하게요?”

언니가 슬픈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그래.”

술김을 빌어, 장난을 쳐볼까. 사랑은 작은 허들엔 넘어져도, 산처럼 높은 장대는 뛰어넘는 법. 

“절대 준이 형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와인을 홀짝이던 언니가 손을 멈춘다. 호기심이 동한 눈이다. 하나님, 용서해주실 거죠?

“아니다. 역시 말하면 안 되겠다.”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

언니가 안달 날수록 제가 말하기 힘들잖아요. 

“준이 형, 아프대요.”

“어디가?”

“가슴 쪽이요. 의사도 정확한 원인을 모른대요. 그래서 죽기 전에 언니를 보러온 거래요.”

“죽어? 준이가?”

예.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죠. 

“시한부랬어요. 이렇게 망설일 시간이 없어요.”

인생은 본래 시한부에요.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

언니의 손에서 컵이 미끄러졌다. 와인이 쏟아지고, 유리가 산산조각났다. 거짓말 한 벌로 제가 치우겠습니다. 

“준이를 만나야겠어!”

“아, 비밀이랬는데, 절대 말하지 말랬는데! 역시 괜히 말했나봐요.”

“아니, 말하기 잘했어. 네가 말하지 않았다면, 이대로 준이를 보냈을지도 몰라. 그랬으면, 무지막지하게 후회했을 거야. 정말 시간이 없네. 사랑할 시간 조차 없어.”

“병에 대해선 모른 척 하실 거죠? 네?”

안 그럼 저 죽어요.

“걱정 마. 아주 건강한 놈 취급해줄 거야! 절대 아픈 사람 취급하지 않을 거야! 우리의 사랑이 아픈 거 용납할 수 없으니까!”

술김을 빌어, 나를 칭찬합니다. 뒤가 어찌 되었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네요. 예쁜 사랑 나누세요. 언니를 배웅하고 돌아왔다. 


라디오를 끄자 웅, 진동이 울린다. 

“손님이 있는 것 같아서, 그냥 왔어. 밥 먹었어?”

“응.”

전화로 듣는 그의 목소리도 좋구나. 따뜻한 차를 마신 것처럼 가슴 언저리가 훈훈해진다. 

“괜찮으면 나올래?”

통통,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 그가 유리문 너머로 웃고 있다.


셔터를 반쯤 내리고, 밤 산책. 낮보다 더 짙게 장미 향이 난다. 가로등이 켜진 골목이 더 작고 아늑해 보인다. 변두리 상점가라 이 시간이면 전부 문을 닫는다. 셔터가 내려간 골목도 나름 운치가 있구나. 폐허를 걷는 이방인이 된 느낌이랄까.

“오늘 힘들었구나?”

그가 밤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을 쓰다듬어 준다. 조금은 소란스런 내 마음을 달래주는 듯이.

“응.”

눈에 선 핏대로, 시무룩한 말투로, 구름 낀 표정으로 알아챈다. 아무 말이 없이도 마음을 읽는다.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밤의 편의점을 향해 씩씩하게 걷는다. 그와 있으면 루비 언니의 고민도, 곰 아빠의 싸움도 모두 내 것이 아닌 일이 된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편의점만이 우리의 목적이고, 그 달콤함만이 우리의 방향이다. 그가 군인처럼 발을 맞춰 걸어서 나도 따라 했다. 장난스런 웃음이 간질간질 나를 간질인다. 


방방이는 정말로 철거됐다. 시멘트와 벽돌들이 여기저기 쌓여있는 것이 금세 공사가 시작될 것 같다. 할아버지는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셨을까.

“아쉽다.”

“응.”

나는 바닐라 맛, 그는 딸기 맛. 아이스크림처럼 무거웠던 하루가 녹아내린다. 그가 장난꾸러기처럼 왕, 하고 내 아이스크림을 뺏어 먹는다. 나도 따라서 왕, 

“둘 다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응.”


돗자리를 펴고, 술판을 벌이는 청춘들이 있어, 오늘은 좀 소란스럽다. 봄밤이란 게 그렇지. 공기를 맴도는 장미 향도 그렇고.

“나중에 다 같이 올까?”

아니, 아직은 단둘이 더 좋아. 마음을 숨기고는 빙긋 웃었다. 다리를 지나가는 차 불빛이 눈부시다. 다리 아래 청춘들은 캔을 찌그러뜨리며 깔깔깔 웃는다. 안주도 떨어지고, 술도 떨어져가지만, 들뜬 기분만은 떨어지지 않을 거다. 

그가 슬그머니 손을 잡아서 일어났다. 가는구나 하고 따라나서는데, 그의 입술에서 익숙한 시가 흘러나온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은 어느 누구를 위해 거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밤보다 훨씬 멀고 

낮보다 훨씬 높은 어느 다른 곳에 거주한다

그들 첫사랑의 눈부신 투명함 속에       


내가 사랑한 자끄 프레베르의 시. 휘둥그레진 나의 눈을 보며 그가 웃는다. 눈가에 볼우물이 옴팍 패인다.

“꼭 우리 같지?”

대답 대신 그 품에 포옥 안겼다. 곰 인형에게서 나던 아련한 향이 너에게서 난다. 우린 이 밤보다 휠씬 멀고, 낮보다 휠씬 높은 다른 곳에 거주한다. 우리 사랑의 눈부신 투명함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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