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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May 31. 2023

크로바레코드 16

16. 인어왕자-H


닭다리를 뜯다말고 제이가 노래를 부른다. 변두리 하늘에 떠있는 건 보나마나 인공위성, 그래도 제이의 노래를 듣는 동안은 먼 데서 달려온 별빛.


오늘 제이는 더 부드럽고, 더 사랑스럽다. 눈을 감고 제이의 노래를 듣는다. 초여름 밤과 어울리는 다정한 목소리. 운동을 하던 사람도, 데이트를 하던 사람들도 밤 산책을 나온 사람들도 주변으로 모여든다. 제이는 알까? 정말 경연에 나가야 할 사람은 너야. 이렇게 따뜻하고 예쁜 음악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들려줘야 해. 

박수가 들려온다. 제이가 얼굴을 붉히고 답례하듯 웃는다. 뒤 늦게 온 사람들을 위해 한 곡 더 부른다. 어, 이 노랜 처음 듣는 노랜데? 응? 벚꽃살랑도서관? 근데 왜 내 얼굴까지 붉어지냐. 아무래도 이건, 우리의 노래잖아.       


책은 덮어

벚꽃 살랑 바람이 좋으니까

하품 나오는 숙제도 밀어놓고

나랑 놀자

흩날리는 벚꽃 아래 발그레 두 볼 

짧은 그림자에 숨어 쫓아갈까

아직 날 모르면 어쩌지

커튼 뒤에서 널 훔쳐보던 나를     


활짝 웃어 내 마음을 들킬 거니까

마구 뛰어 너에게 돌진할 테니까 

벚꽃살랑도서관 

오늘은 고백할래 네버엔딩 내 마음을     


 제이가 일어서서 인사를 한다. 그제야 사람들이 흩어졌다. 몇몇 남자들이 아쉬운 듯 머뭇댄다. SNS계정을 물어보는 녀석들도 있다. 이제 그녀를 다른 녀석들과 공유해야 하나 마음이 쓰라려 왔지만, 이건 어쩌면 나의 숙명. 이런 따뜻한 목소리를 나만 독점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의 노래네.”

“응, 맘에 들어?”

“제이가 부르는 노래는 다 좋아. 특히 이 노래.”

제이가 간지러운 듯 웃는다. 

“반창고 밴드가 부를 거야. 나 대신”

그건 좀. 만복이의 음색도 좋지만, 역시 이 노랜 제이의 목소리가 더 찰떡인데.


“제이, 정말 직접 나가지 않을 거야? 난 제이가 직접 부르는 노래가 좋은데.”

제이가 살랑살랑 고개를 젓는다.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지금은 내 노래를 누군가 불러준다는 걸로 만족해.”

제이가 그렇다면, 캔 하나를 더 깐다. 제이는 다시 닭다리를 뜯는다. 

이때까지는 몰랐다. 제이에게 그 기회가 이토록 빨리 오게 될 줄은

“하니.”

“응?”

“나 업어주라.”

제이는 가볍고, 말랑하고, 따뜻하다. 천변을 걷던 연인들이 우리를 보고 킥킥댄다. 쳇, 나 하나도 안 챙피하거든, 


“오늘 처음으로 아빠, 하고 불러봤어.”

“응.”

“나, 하니와 마을 사람들 덕분에 치유하고 있나 봐. 이렇게 말도 많아지고, 눈물도 많아지고.”

등에 업힌 제이가 운다. 그 눈물이 납덩이처럼 내 가슴에도 떨어진다. 

“제이 덕분에 우리도 행복해.”

“응.”

제이가 스르륵 등에서 내려온다. 그리고는 포옥 가슴에 안긴다. 

“좋아해.”

“응, 나도.”

달빛을 받아 빛나는 그 이마에 키스한다. 제이, 훨훨 날아가도 괜찮아. 내가 따라잡을 거니까. 내가 먼저 널 알아볼 테니까. 그러니까, 날개를 활짝 펴.     


 

이렇게 화창한 날엔 밀린 집안일을 제쳐두고 놀러 갈 궁리를 하게 된다. 오늘은 제이도 아무 스케줄이 없는 날. 어디, 외곽으로 바람이나 쐬러 가볼까? 

음, 제이도 내 마음을 눈치 챘나보다. 이 아침에 전화가 오네. 

“하니, 쉬는 날인데, 미안.”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심각하다.

“맥스가 다쳤대.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은데. 터미널까지 태워줄래? 버스가 하루에 두 대밖에 없어서, 바로 타야 하거든.”

잠깐만, 그럼, 버스를 놓치면 자고와야 하는 거잖아. 그럴 순 없지.   

“나도 병문안 갈래.”

“하니도?”

“응, 제이가 가면, 당연히 나도 가야지. 고속버스 말고, 내 차 타고 가자.”

“그럼, 너무 미안한데.”

“아냐. 옷 입고 금방 갈게.”

제이가 초조한 표정으로 크로바 앞에 서 있다. 

“어디가 다친 거야?”

공영주차장으로 가면서 묻는다. 

“말벌에 쏘였나봐.”

“말벌?”

“응, 처마 밑에 말벌이 집을 지었는데, 그걸 뗐다가 쏘였나 봐.”

“맥스도 참, 그런 건 전문가를 불러야지. 지금 상태는 어떤데?”

“모르겠어. 만복이가 하도 울어서, 물어보질 못하겠어.”


 막 샤워를 하고 나온 듯, 제이에게서 비누 향이 난다. 흰색 볼레로와 연한 청바지가 명랑한 소녀 같은 느낌을 준다. 손에 잡히는 데로 입었겠지만, 역시나 귀엽고, 상큼하다. 

“만복이가 전화할 경황이면, 아주 나쁘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마.”

“응.” 


고속도로를 타고나니, 옆자리가 조용하다. 자는 것도 멀미의 일종이라고 들은 것 같다. 어쩜 이렇게 해맑게 잠들까. 아기처럼 잠든 제이를 태우고 달려간다. 평일 낮이라 차가 막히지는 않는다. 이대로라면 늦은 점심때엔 도착하겠다. 

“배 안 고파?”

“고파.”

도착할 때까지 내리 잔 제이가 눈을 부비며 대꾸한다. 정말 애기 같다.

“내가 자서 심심했지? 난, 차만 타면 자거든. 미안. 그래도 운전할 땐 덜 잔다.”

운전할 때 자면 죽어! 가슴 철렁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제이를 끌고 병원 구내식당으로 들어갔다. 

설렁탕에 밥을 말아먹고, 드디어 면회를 간다. 


눈이 퉁퉁 부은 만복이가 제이를 붙잡고 다시 펑펑 운다.

“아저씬 괜찮으셔?”

“지금은 깨어나셨어. 아깐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쏘였네. 사람이 이렇게 부울 수도 있구나. 정작 당사자는 엄청 편해보입니다만,

“모두에게 폐를 끼쳤네.”

“그러니까, 그걸 왜 맨손으로 따요! 내가 업자 부르자고 했잖아요!”

“그야, 말벌집이 아직 주먹만하니까.”

“주먹만하건 손톱만하건, 말벌은 말벌이에요!”

워워, 제이가 만복이의 어깨를 두드린다. 

“정말 큰일 날 뻔 했어요. 벌에 쏘여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다음부터는 절대 하지 마세요.”

“그래, 알았어.”

“다른 데는 괜찮으세요?”

“그게, 벌에 쏘이는 바람에, 사다리에서 떨어졌거든. 그래서 다리에도 금이 갔다지 뭐냐.”

네? 그럼 경연은 어찌 나가나요! 제이와 내가 동시에 아저씨를 바라본다. 

“그래서 부탁인데, 나 대신 좀 나가주면 안 될까? 제이라면 충분히 해낼 것 같은데.”

“경연 같은 거! 안 나가도 되니까. 빨리 낫기나 해요!”

만복이의 화에도 맥스는 요지부동 제이만 바라본다. 만복이가 얼마나 경연을 나가고 싶어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낫고 가시면 되지 않을까요?”

“나이가 있어서 뼈가 그렇게 빨리 붙지를 못해. 제이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만복이가 눈물 콧물 쏟으면서 운다. 녀석, 이런저런 게 복 받쳐 오나보다. 


“만복이만 좋다면, 해볼게요.”

“정말?”

만복이가 제이를 와락 끌어안는다. 어이, 어이, 여기 남자친구가 눈앞에 있다고! 제이가 수락하자마자, 맥스가 아자! 외친다. 아주 작게. 그러다 나랑 눈이 마주쳤다. 뭐지, 저 눈빛, 뭔가 책략가의 눈빛인데, 설마, 이 모든 작전이 맥스의 머리에서 나온 건 아니겠지. 

“참, 주스를 사온다는 걸. 깜빡했네. 제이, 매점에 가서 주스 좀 사올래?”

“매점이 어딘데?”

“요 아래 지하에 있어. 같이 가자. 마침 나도 살 거 있어.”

제이와 만복이를 내보내고, 지긋이 맥스를 바라본다.


“아저씨, 일부러 벌집 건드신 거죠?”

“허, 내가 그럴 리가.”

“굉장히 수상합니다. 애초부터 경연에 나가실 생각이 없으셨던 건 아니구요?”

맥스가 뜨끔한 표정을 짓는다.

“비밀로 할 테니까, 털어놓으세요.”

머뭇대던 아저씨가 입을 연다. 

“실은, 그래. 이 나이 먹어서 경연에 나간다는 게, 그렇잖아. 난, 지금이 좋아. 그저 제니 곁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 더는 유명해지는 것도, 더는 부자가 되는 것도 관심이 없어. 그리고 만복이는 모르지만, 이쪽에선 내가 아직 먹히거든. 경연에 나가면, 아마 욕 먹을 거야.”

“그 말씀을 참 빨리도 하시네요.”

“녀석이 저렇게 방방 떠 있는데, 말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벌에 쏘이신 건 너무 했어요.”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너무 무식했어.”

맥스의 계획대로 제이가 경연에 나가게 됐구나. 아마 맥스의 간절한 부탁이 아니었다면 제이는 결코 나가지 않았을 거다. 등 떠밀려 나가는 것도 하나의 기회. 응원할게. 제이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벌써 몇 번째 한숨인지. 이러다 차 뚜껑이 날아가겠어. 

“늘 하던 데로 하면 돼. 붙으면 좋지만, 떨어져도 상관없잖아. 제이는 계속 음악을 할 거니까.”

“응, 그래도 맥스가 나갔으면 좋았을걸.”

“그래,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잖아.”

“응”

“난, 제이가 경연에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 혼자 부르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의 평가도 받아봐야 하잖아. 그래야, 더 발전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제이라면 분명 잘 해낼 거야. 내가 제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제이를 좋아해 줄 거야.”

“응.”

조금은 안심한 표정을 짓는 제이. 불안하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하고, 그렇겠지. 하지만, 난 네가 분명 잘 할 거라 믿어. 혼자 나가도 될 만큼 말이야. 


소곤소곤 제이가 노래를 부른다. 넌 언제나, 모노의 곡. 예심 곡으로 정했다는 그 곡. 혼성으로 부른 건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떨까 기대가 된다. 누가 뭐래도, 나는 좋아해 줄 거야. 제이.



그 이후로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질 못했다. 다시 짝사랑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가게 밖에서 그녀를 지켜보다 돌아오곤 했다. 가게 안에는 늘 그 녀석, 만복이와 제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목이 아픈 날엔 기타와 피아노. 그리고 편곡을 하느라 머리를 맞대고 있다. 밴드가 아니라, 솔로로 나가라고 할 걸 그랬나. 이제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겠지. 


“여기서 뭐 하냐?”

매직이가 화초 뒤에 숨어 제이를 훔쳐보는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는다.

“누가 보면 애인 감시하는 것처럼 보이겠다.” 

그런 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어쩐 일로 이른 귀가냐?”

“내일이 시험이거든. 푹 자야 컨디션이 좋을 거 아니냐.” 

“어, 내일이 시험이냐? 잠깐만 기다려봐라. 엿 좀 사올게.”

“됐다. 네가 안 줘도 집에 왕릉처럼 쌓여있다.”

매직이가 나를 따라 가게 내부를 염탐한다.

“사이가 너무 좋은 거 아니야? 게다가 쟤 왤케 잘 생겼어? 저러다 정분 나겠네.”

“우리 제이가 그럴 리 없어!”

“그래. 너의 제이가 그럴 리 없지.”

“뭐 필요한 건 없어? 엿 대신 사줄게.”

가게를 벗어나 골목길을 걸으며 묻는다.

“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알고 말고, 난 차라리 네가 시험에 떨어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누나를 보내기는 싫거든. 좀 더 같이 살고 싶은데. 좀 더 부대끼고 싶고, 좀 더 싸우고 싶단 말이야.

“그건 내가 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너 스스로 쟁취해.”

“내가 데리고 가도 괜찮겠어?”

“일단 붙고 얘기해!”

버럭 화를 냈다. 얄밉게도 녀석이 웃는다.

“붙을 거야. 그러니까, 넌 마음에 준비나 해.”

젠장, 어디 가서 저주 인형이라도 사와야 하나. 

“나, 간다.”

매직이가 대문으로 들어간다. 누나도 참 대단하네. 저 한량을 저리 독하게 만들다니. 술도 끊고, 잡기도 끊고, 오직 공부에만 매진하는 녀석은 처음이다. 고3 때도 농구를 하러 다녔던 녀석인데. 


“엿은 사줬어?”

“뭐, 그렇지.”

선풍기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던 누나가 건성으로 답한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기에, 매직이가 저리 미친 듯이 공부해?”

선풍기 바람 앞에서, 아아아아, 하고 장난을 치던 누나가 풋, 웃는다. 

“내년에 결혼할 거라고 했어. 누구든 직장이 번듯한 남자와.” 

헐, 너 따위가 아니어도, 다른 누군가와 결혼할 거라고. 겁을 줬구나. 아주

“진심이야?”

“그래. 매직이가 아니어도, 내년쯤엔 결혼할 생각이었어. 서른을 넘길 생각은 없거든.”

잔인한 누나.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지나치게 냉정해. 

“제이, 아주 열심이던데?”

“응.”

“너도 힘들겠네. 자주 보지도 못하고.”

“오며 가며 봐.”

동병상련인 주제에 누나가 안쓰럽게 올려다본다. 

“나중엔 너한테 제일 고마워할걸.”

그랬으면 좋겠네.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왔다. 방충망 사이로 모눈 같은 달이 보인다. 끼니는 잘 챙겨 먹는 건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날 보고 싶지는 않는지. 생각하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펼친다. 우리의 얘기 같은 달달한 만화책이다. 유나 사서가 권해서 빌려 왔는데, 어쩐지 건성건성 읽힌다. 보고 싶다. 제이

앗! 문자다. 스팸이면 죽여버릴 거야!

‘하니, 보고 싶다. 마니마니.’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던 누나가 우당탕탕 소리에 반쯤 몸을 일으킨다. 그러다 혀를 끌끌. 지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욕하는 거 아니지? 내가 새벽마다 가로등 밑에서 서성대던 누나를 못 봤을 것 같아. 쳇,

슬리퍼를 신고 내달린다. 크로바레코드가 이렇게 멀었나. 내 그림자가 이렇게 길었나. 가로등이 이렇게 환하고 예뻤나. 제이는 가게 앞에서 달을 올려다보고 서 있다. 발 소리를 듣고 돌아보던 제이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폭 품에 안기는 제이. 이 느낌이었어. 따뜻하고, 말랑한.


“화난 거 아니지?”

“내가 왜?”

“가게에 오지도 않고, 문자도 없고, 그래서.”

“방해될까, 그랬어.” 

“아무 때나 와도 방해 안 돼.”

“응.”

하지만, 둘이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 들어갈 수 없단 말이야. 

제이가 서늘한 손으로 내 뺨을 보듬는다. 양쪽 색이 미묘하게 다른 동공이 나를 올려다 본다. 처음엔 음영인 줄 알았는데, 환한 빛 속에서 봤을 때, 하나는 짙고 하나는 옅었다. 그래서 더 신비로운 느낌. 

뺨을 보듬던 제이가 발꿈치를 들고 키스. 이러면 난 속수무책이잖아.

행인이 지나가거나 말거나, 그게 아는 사람이거나 말거나, 그 키스에 화답한다. 내일 돌을 맞더라도, 오늘은 키스를 하겠다. 


“아주 굶주렸구나. 굶주렸어.”

“뭐가!”

독수공방 맥주를 마시던 누나 곁에 슬그머니 끼어드는데, 누나가 이죽댄다. 

“입술 부은 거 봐라. 니 입술이 그 정도면, 제이는 피가 철철 나겠네.”

허, 누나여. 어찌 보지도 않고 그리 맞추시오. 

“피는 무슨,”

모르쇠를 하고 캔을 깐다. 피 맛이 조금 난 것 같기는 해. 누구 입술에서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참, 고생이다.”

“고생은 누나가 더 하지.”

남매끼리 고통의 잔을 나눈다.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안다고, 나, 누나 마음 100% 이해했어. 가로등 아래서 왜 그렇게 오래 있는지도 알았고, 거기가 키스 맛집이더라. 사람이 다, 곱고 예쁘게 보여. 

“이러다가 우리 둘 다 이 동네에서 쫓겨나겠다. 풍기문란죄로.”

“누나부터 도주해. 난 어떡하든 살아남을 테니.”

“전우여, 그럼 뒤를 부탁하네.”

다 마신 캔을 찌그러뜨린다. 찬물로 샤워나 하고 자야겠다. 부디 잠자리가 심란하지 않길. 



동글동글 굴러가는 타코야끼를 본다. 가다랑어포가 부슬부슬 춤을 춘다. 시험을 잘 본 매직이 덕에 크로바에서의 모임이 성사되었다. 매직이는 통 크게 치킨을 쏜다고 했고, 누나가 술, 준이 형이 마른안주를 사 오기로 했다. 순이 누나는 아쉽지만, 마음만 참석한다고 했다. 축하 모임 겸. 제이와 블레싱의 노래를 듣는 날. 반창고클럽은 논의 끝에 크로바 밴드로 이름을 바꿨다고 했다. 그래, 거기서 탄생한 밴드니까, 그 이름이 딱이다. 

따끈따끈 타코야끼를 들고 들어가자, 모두들 모여있다. 매직이와 누나가 타코야끼를 받아들고, 세팅을 한다. 준이 형이 잔을 나른다. 제이와 블레싱은 악기를 조율 중. 


“모두 모였으니, 이제 시작합니다.”

매직이의 신호에 맞춰 피아노가 시작된다. 제이는 피아노도 잘 치는구나. 피아노 선율에 블레싱이 기타를 얹는다. 피나는 노력이 있었는지 어설프던 연주실력이 일취월장 좋아졌다. 

블레싱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첫 시작은 블레싱     


하루하루 늘어갈 뿐이야 널 향한 그리움은 

아픔은 늘 새롭지만 넌 너의 길을 가네     


그리고 사랑스런 그녀의 목소리      


원한다면 기다릴 수 있어 난 그대로인 거야 

떠난 건 너 혼자였으니 그대로 돌아오면 돼  

내 잘못을 탓하는 것이라면 돌아온 후에도 늦지 않아

아직 시간이 있는데      


제이는 포근한 구름처럼 높이, 블레싱은 그 아래 강물처럼 낮게.      


네가 떠난 그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을 거야 

더 이상 거짓으로 나를 위로하고 싶진 않아

처음으로 사랑을 알았어

다시 널 찾을 거야

이제야 너를 위해 살아있다는 걸 느꼈어   

  

톤을 높인 제이의 목소리도 너무 좋고, 밑에 깔리는 블레싱의 목소리도 원통하지만 너무 좋다. 사랑을 앓았던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친다. 물론 나도. 

뒤이어, 본선에서 부를 제이의 자작곡을 부른다. 제이 혼자 부르는 것만 들었는데. 확실히 화음이 들어가니까, 노래가 더 풍부해진다. 서로에 대한 달달한 고백을 듣는 것 같아, 심기가 좀 불편해지긴 했지만, 분명 사람들은 설렐 거야. 

“대박! 바로 데뷔해도 될 것 같은데?”

“밤새 퉁탕대며 뭐하나 했더니, 대단한 걸 했네!”

“야! 원래부터 한 팀인 것처럼 완벽해!”

제이가 수줍게 웃으며 내 옆자리에 앉는다. 블레싱은 준이 형 옆 자리. 센스 좋은 누나가 이렇게 좌석을 짰다. 역시 매직이 너에게 주기엔 아직 아깝다. 

“모두 감사합니다.”

블레싱도 활짝 웃는다. 그러지 마라. 더 잘생겨 보이니까.


“맥스는 괜찮아?”

“맥스 얘긴 하지도 마!”

블레싱이 입술을 삐죽대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대체 왜? 죽고 못 살던 사이 아니었어?

“일부러 벌에 쏘인 게 분명해!”

응, 너도 눈치챈 거냐?

“죽은 만큼 아픈 것도 아니면서, 엄마를 불러왔어.”

“엄만 아프시잖아.”

“그니까. 진짜 철 없는 인간이지. 아픈 사람을 불러서 간병을 하게 하고.”

흠, 맥스 아주 큰 그림을 그렸구나. 제이는 그 과정이었는지 몰라. 

“폐가 나쁜 건, 공기 탓이라고, 산속 공기를 마셔야 한다고 엄마를 꼬셨어!”

흠, 일리는 있네. 

“엄마도 그렇지. 그렇다고, 나 몰래 그렇게 내려가 버리냐. 병원 가서 알았잖아. 퇴원한 걸.”

얼마나 둘이 있고 싶으면 아들한테 알리지도 않고 도주했겠냐. 네가 반대할 게 뻔하니까. 

“늦도둑이 밤새는지 모른다더니.”

누나의 말에 블레싱이 짜릿 노려본다. 누나가 모른 척 맥주를 마신다. 

“그래도, 두 분 다 많이 좋아지셨잖아. 아저씨도 이제 목발 없이 걸어다니신다며. 아주머니도 산책을 나갈 정도로 회복하셨고.”

“그게 더 원통해. 아들인 나는 별 도움도 안 된 거잖아.”

“무슨 소리. 네가 있으니까 두 분이 그 긴 세월은 버틴 거잖아. 이젠 사랑할 시간밖에 없으니까, 네가 응원해드려.”

제이의 호통에 블레싱이 입술을 쭉 내민다. 어쭈, 둘이 이렇게 가까워졌어! 서로 호통도 주고 받을 만큼! 하여간 다 맘에 안 들어.


“와, 이 타코야끼 맛있다!” 

“어디.”

준이 형이 한입 맛보더니, 한 팩을 들고 일어난다.

“형, 어디 가?”

“순이 갖다 주게. 간 김에 가게에서 양주 하나 빼 올게.”

얼씨구, 사위가 아니라 도둑놈을 들였구나! 

“정말 맛있다!” 

제이가 오물오물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풀린다. 자꾸 입술로만 눈이 가는 게 문제긴 하지만. 

“삼 일 뒤인가?”

“응, 나 벌써 떨려.”

제이가 꼬치를 내려놓고, 한숨 짓는다. 그 말랑한 손을 꼭 감싸 쥐어준다. 서늘한 제이의 손. 

“잘 될 거야. 넌 진짜 버스킹 가수니까.”

“응.”

저편에서 블레싱이 쏘아보는 것 같지만, 그러게 누가 늦게 만나랬냐. 훗,


“처음엔 맥스가 빠져서 걱정이었는데, 차츰 노래를 부를수록, 맥스가 아니라, 제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 아무래도 같은 또래인 게 마음도 편하고, 곡에 대한 생각도 많이 비슷하더라. 목소리도 더 조화로운 것 같고. 알다시피 맥스는 노래를 거부하는 편이었잖아.”

그게 다 맥스의 그림이었다니까. 뭐, 덕분에 제이도 경연에 나가게 된 건가. 

“지금은 맥스에게 고마워.”

제이도 거든다. 그래, 벌에 쏘이면서까지 널 경연에 밀어부친 건 나도 고마워. 

준이 형이 양주뿐만 아니라, 과자도 한 아름 가져왔다. 아주 ‘대도’시구나.

“순이도 엄청 잘 먹네. 거기 어딘지 알려줘.”

네, 친히 알려드릴게요. 준이 형에게 타코야끼 가게를 설명해준다. 저렇게 남이 먹는 것도 예쁘면 정말 사랑인 거지. 열심히 경청하는 준이 형도 엄청 귀엽다. 


오늘 그녀의 입술을 타코야끼 맛. 내 입술은 무슨 맛일까. 

“똑같은 맛.”

그녀가 싱긋 웃는다. 

“당분간은 못 보겠네.”

“바로 떨어져서 올지도 모르는데?”

“그런 일은 절대 없어.”

그녀가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웃는다. 간지러워. 

“맨날 전화할게. 귀찮아도 받아야 해.”

“안 하면, 쫓아갈 거니까. 자주자주 해.”

“알았어.”


매직이와 누나는 가로등 밑에 있을 테니, 우린 불이 꺼진 크로바에서, 다시 한 번 키스한다. 못 만나는 동안 매일 밤 떠올릴 수 있도록, 길고 애타는 키스를,   

  

도서관을 하릴없이 서성인다. 오늘이 바로 예선 날. 제이와 블레싱은 잘 불렀을까.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너무 떨었으면 어쩌지. 혹시 블레싱이 실수를 한 건 아닐까. 목소리는 잘 나왔을까. 등등. 온갖 상념이 피어오른다. 

전화가 울리자마자, 총알처럼 뛰어나가서 받았다. 제이다!

“하니야!”

물기 어린 제이의 목소리에 일순 긴장한다. 

“우리 예선 붙었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제이라면 붙을 줄 알았어!” 

옆에 있다면 꽉 끌어 안아줄 텐데. 아, 정말 축하해!

“하니, 지금, 인터뷰 가야 하거든. 나중에 또 전화할게.”

짧은 통화였지만, 내 가슴까지 벅차오른다. 다음 계단을 오를 너를, 응원할게!


크로바 레코드에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의자를 다닥다닥 붙여놓고, 방에 있던 텔레비전을 밖에 꺼내놓고, 제이의 첫 무대를 기다린다. 

드디어! 그녀가 나온다. 질투나지만, 블레싱과 제이는 연인처럼 잘 어울린다. 블레싱은 벌써 연예인이 다 됐네. 그냥도 멋있었지만, 차려입으니까 빛이 난다. 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운명이네. 

“와, 저게 제이야?”

내 작은 공주님은, 너무 멀리 날아갔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으면 붙잡을 수 없을 것처럼 멀리.

“세상에, 그냥 인형이네.”

그 인형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아직 기타가 어설픈 블레싱은 기타 대신 섬세한 외모로 소녀 팬들의 마음을 앗아간다. 저 도둑놈.

“잘 부르는지는 알았지만, 이 정도 잘 부르는지는 몰랐네.”

네, 엄청나게 잘 불러요. 그러니까 제발 조용히 해주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묻히잖아요.      


책은 덮어

벚꽃 살랑 바람이 좋으니까

하품 나오는 숙제도 밀어놓고

나랑 놀자

흩날리는 벚꽃 아래 발그레 두 볼 

짧은 그림자에 숨어 쫓아갈까

아직 날 모르면 어쩌지

커튼 뒤에서 널 훔쳐보던 나를     


활짝 웃어 내 마음을 들킬 거니까

마구 뛰어 너에게 돌진할 테니까 

벚꽃살랑도서관 

오늘은 고백할래 네버엔딩 내 마음을!     


바보처럼 눈물이 쏟아진다. 나의 그녀가 카메라를 향해 생긋 웃는다. 그렇게 떨더니, 무대에선 의연하네. 오랫동안 버스킹을 했던 경험이 제이를 강하게 만들었구나. 아직 햇병아리 같은 블레싱의 손이 덜덜 떨린다. 그 모습조차 풋풋해서 좋다.


무사히 노래를 끝내고, 무대 매너도 좋았다. 뒤늦게 제이가 긴장하는 게 보인다. 자꾸만 귀여운 혀를 내밀어서 입술을 적신다. 심사평을 듣기 전에 바람을 쐬러 나왔다. 난, 못 들을 것 같다. 이렇게 손에서 땀이 나다니. 생방송도 아니고, 녹화방송인데도, 그녀의 긴장이 오롯이 전달된 탓이다. 

“꼭 네가 무대에 있는 것 같다.”

뒤 따라 나온 매직이가 등을 두드린다. 

“그러게. 진짜 미치게 긴장되네.”

“제이한테 결과 들었을 거 아니야?”

“근데도, 긴장돼.”


제이는 예선을 거쳐, 이번 무대도 무사히 마치고 다음 무대까지 올라갔다. 다음엔 기성 가수의 곡이고, 그 다음엔 심사위원의 노래 중에서 한 곡을 선택한다고 했다. 누굴 고를 거냐는 말에, 망설였다. 

“제이라면, 잔잔한 노래가 좋지 않아? ”

“그건, 내 노래나 마찬가지여서, 안돼. 오히려 전혀 색이 다른 게 나을 것 같아. 아이돌 노래라던지. 트로트 같은 거.”


그 통화를 끝으로 전화가 오지 않는다. 그만큼 바쁜 거겠지. 이젠 텔레비전에서만 제이를 볼 수 있구나. 부쩍 우울해져서 입맛이 없다. 예선을 통과한 팀은 바닷가 어느 호텔에서 합숙한다. 그야말로 생이별이다. 우린 여행도 한 번 제대로 못 가봤는데, 어째서 블레싱 놈하고 합숙에 들어갔단 말이야! 

“제대로 봐야. 나중에 제대로 말해주지.”

그 말에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심사평이 끝나고, 발표만 남았다. 삼총사들도, 준이형 커플도, 매직이 커플도, 죄다 긴장해서 앉아있다. 크로바밴드가 호명되자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다. 나까지 다 뭉클하다. 제이, 수고했어! 크로바밴드는 일등은 아니지만, 그래서 안정권으로 올라갔다. 


“제이가 너무 유명해져서 안 돌아오면 어쩌냐?”

세탁소 아주머니가 한 농담이 가슴을 쿡쿡 찌른다. 

“아줌마도 참, 제이는 그럴 애가 아니에요.”

역시 누나밖에 없어. 

“그래! 우리들의 제이가 크로바를 버릴 리가 없지.”

준이 형, 백년해로 할 거에요! 


모두가 돌아가고 난 후, 크로바 레코드 앞에 앉아있다. 그 옛날 하드를 빨던 꼬맹이처럼. 눈치 좋은 매직이가 진짜 하드를 들고 나타난다. 

“누가 보면 전쟁터에 애인 보낸 줄 알겠다,”  

“전쟁터 맞아.”

“좋아서 간 전쟁터잖냐.”

“알면서도, 불안해.”

“잘 할거야. 아까 SNS에 들어가 봤는데, 반응도 좋던데. 노래도, 외모도 완성형이라고 난리더라.”

“응,”

하드를 녹여먹는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서, 모기도 없고, 좋다. 

“다음이 결선인가?”

“응, 우리가 본 건, 1라운드지만, 제이는 3라운드까지 했을 거야.”

아, 전화다! 


“하니! 우리 결선까지 붙었어. 늦게 전화해서 미안! 폐자부활전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거든!”

폐자부활전? 경연이 어렵긴 했구나. 고공행진만 할 줄만 알았더니.

“아이돌 노래를 불렀는데, 역시 무리였나봐, 블레싱도 가사를 틀리고, 나도 연주를 틀렸어. 그래도 폐자부활전에서 붙었으니까 괜찮아.”

시간이 없는지 목소리가 빠르다. 하드가 다 녹아 바닥에 얼룩이 졌지만 상관없다. 이렇게 제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1라운드 봤어. 연습한 만큼 잘하던데?”

“정말? 엄청 떨었는데, 티 안났어?”

“아니, 전혀 안 떠는 거처럼 보였어.”

“헤헤, 정말? 사실 그날 체해서 컨디션 엉망이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응, 많이 적응했어. 사람들하고도 많이 친해지고. 밥도 이젠 잘 먹어,”

옆에서 블레싱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우리 만복이도 수고 많았다.

“하니 보고 싶다고 맨날 징징댄다.”

코끝이 찡해졌다. 나도 미치게 보고 싶어. 제이.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난다. 이동해야하나 보다. 

“하니, 또 전화할게.”

제이가 황급히 전화를 끊는다. 목소리만 들어도 이렇게 좋은데, 직접 보면 얼마나 더 좋을까. 아, 그녀가 먼먼 타국에 있는 것만 같다.


“짧은 재회가 이렇게 끝났네. 하드는 네 대신 바닥이 다 먹고.”

하드가 녹아내린 바닥을 내려다본다. 그게 내 마음인 것 같아 와락 눈물이 솟는다.

“보고 싶어.”

“어련하시겠냐. 좀만 참아라. 결선이면, 거의 다 왔네.”

매직이가 어깨를 끌어 안아준다. 그래, 누나를 뺏어갈 원수 같은 너이지만, 오늘은 어깨를 빌리마. 

“늘 옆에 있는 것도 좋지만, 가끔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애틋해.”

응, 너무 애틋해. 다시 만나면 더 잘 해주고, 더 뜨겁게 사랑할 거야. 오늘은 수면제를 먹고서라도 잠들어야겠다. 며칠 잠을 못 잤더니, 일터에서 종종 존다. 이러다가 짤리겠어. 매직이와 문 앞에서 헤어졌다. 녀석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도 너라서 맘놓고 맡길 수는 있겠네. 우리 누나, 상처 줄 놈은 아니니까. 


“질질 짜다 왔냐?”

쳇, 빨리 시집이나 가버려! 

수면제를 삼키고 침대에 눕는다. 핸드폰이 울려댄다. 아, 뭐가 왔는데? 매직이가 보내 준, 크로바 밴드의 노래. 녹음해뒀나 보네. 기특하기도 해라. 제이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다. 오늘은 꿈에서라도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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