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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May 31. 2023

크로바레코드 15

15. 벚꽃살랑도서관-J


공사가 끝났다. 간혹 못 박는 소리나 가구를 끄는 소리가 들려올 뿐, 더는 천장이 무너질 듯 시끄럽지 않다. 그 사이에 준이 형이 몇 번, 루비 언니가 매일 찾아왔었다. 오늘도 역시.

“언니 이렇게 가게 물건 빼돌려도 괜찮아요?”

“너도 공범이야. 이젠.”

헉,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들키면, 월급에서 까면 돼.”

전 깔 월급도 없다구요. 당당한 언니는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아작아작 과자를 먹는다. 

“평일 대낮인데, 회사 안 가요?”

“때려치웠어.”

“네?”

그럼, 언니도 깔 월급이 없잖아요! 

“10년 넘게 다녔으니 이제 그만 다닐 때도 됐지. 뭐.”

“그게 말이에요. 방구에요.”

“히히, 방구다!”

이 언니, 정신감정 좀 받아봐야겠는데.


“야, 그나저나 너 왜 거짓말했어?”

음, 벌써 알아채셨나? 모른 척 지나가려는데, 언니가 뒷덜미를 낚아챈다. 

“시한부라더니, 건강검진에서 아무 이상이 없더라. 아주, 아주 건강해!”

“아, 건강검진 해보셨어요?”

“응, 다짜고짜 끌고 가서 했지.”

그렇게 이를 악물고 대답하실 필요까진 없어요. 눈빛만 봐도 이미 오금이 저린다구요.

“하하하, 건강해서 정말 다행이죠?”

“으응, 정말 다행이네.”

이젠 거의 목을 조르시네요. 억, 숨이 잘 안 쉬어집니다.

“죄…죄송…해요”

“변명할 기회를 줄 테니까. 나불대 보던가.”

“대역죄인이 무슨 변명을 하오리까. 죽여주시옵소서.”

언니가 키들키들 웃더니 손을 놔준다. 휴, 살았네.


“우리가 똥멍청이처럼 구니까, 그런 거짓말을 한 거겠지. 너 아니었으면 그 밤도 없었을 거야.”

“그 밤이요?”

언니의 얼굴이 그 날의 사과처럼 붉어진다. 가만, 이거 39금 같은데?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불타는 밤이 있었지. 난 준이 걔가 그렇게 뜨거운 남자인지 몰랐어. 아주 활활 타서, 재가 될 뻔했다니까.”

얼굴이 핼쑥하신 걸 보면, 어제도, 그제도 타오른 것 같은데요? 

“지구가 내일 멸망하는 것처럼 아주, 뜨겁게!”

네네, 내내 즐기시옵소서.


“그래서 말인데, 같이 좀 가주라.”

“어디를요?”

“너의 죄를 사해줄 터이니, 무조건 같이 가야 해.”

그리하여, 슬리퍼를 신은 그대로, 병원에 끌려왔다. 종합병원의 산부인과 병동. 언니, 저 아침도 아직 안 먹었단 말이에요. 

“혼자는 무섭고, 역시 너밖에 없었어.”

“준이 형은요?”

뜨거운 동지끼리 같이 오면 되잖아요.

“혹시 아니면, 실망할 수도 있잖아. 네게 말했듯이 나, 임신이 안되는 몸인데, 요 며칠 좀 이상하거든. 생리도 너무 늦고, 입맛도 좀 없는 것 같고.”

“아까 과자는 잘 드시던데요.”

“그런 건 잘 먹어. 근데, 밥을 잘 못 먹겠어. 그 냄새가 싫어.”

흠, 임신이 아니라면, 회충이라도 있는 건가. 

“집에서 테스트를 할까 하다가, 기왕이면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눈이 반짝거리는 게, 분명 기대를 하고 있는 눈치인데, 이런 무거운 자리에 절 끌고 오셨나요? 드디어 언니의 이름이 호명됐다. 최 루비님 들어오세요.


 한참을 기다려도 언니가 안 나온다. 무슨 일이지? 어쩐지 내가 다 초조하네. 문이 열리더니, 눈이 퉁퉁 부은 언니가 드디어 나타났다.

“제이야, 나 어떡해?”

“언니, 울지마요. 언니는 사랑만으로도 충분하잖아요. 너무 실망 말고…”

“나, 임신이래.”

네???????????

“3주째래.”

“임신이 안된다면서요!”

“그런 줄 알았어. 그래서 보고 또 봤어. 초음파로. 근데 확실하대!”

그래서 그리 오래 걸리셨군요. 

“응, 배란 장애도 있고, 자궁벽도 얇아서 힘들댔는데, 기적처럼 된 거야!”  

“언니, 너무, 너무, 축하드려요!”

“아, 내가 엄마가 된다니!”

“슈퍼 아주머니가 좋아하시겠다!”

“우리 엄마?”

“네. 전화해봐요.”


병원을 나와 카페에 앉았다. 언니는 우유를, 나는 레모네이드를 시켰다. 몇 모금 마신 지 못했는데, 유리창 밖으로 쿵쿵대며 달려오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코끝이 빨간 게 펑펑 우셨나 본대.

“아이고, 우리 순이!”

다짜고짜 부둥켜안고 운다. 나도 공연히 울컥한다. 

“뭐든 좋으니, 건강하게 낳으면 된다! 회사도 그만두길 잘했어!”

“응.”

 “그래, 김 서방은?”

벌써 준이 형이 김 서방이 됐어요? 피식 웃음이 나온다. 진도 한 번 초고속이네.

“오고 있어.”

“아주머니가 오셨으니까, 저는 그만 가볼게요.”

눈치껏 일어선다. 내 임무는 여기서 끝난 것 같으니까.

“병원에 같이 가줬다며.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냐.”

“그간 언니가 과자랑 주스 많이 가져다줬으니까. 괜찮아요.”

스윽 발을 빼본다. 먹힐 것인가. 

“이년이! 또 가게 물건 슬쩍 했구만!”

“엄만, 내가 미리 은혜를 갚은 거야!”

“말이나 못 하면!”

이로써 내 죄는 사하여졌도다. 콧노래를 부르며 카페를 나왔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준이 형이 보인다. 나이스 타이밍이었어.


화실을 올라가 본다. 급하게 뛰어나갔는지 문이 활짝 열린 채다. 이젤엔 그리다 만 그림. 팔레트에서 물감이 말라간다. 그리다 만 그림은, 루비 언니를 닮은 소녀. 루비 언니의 어릴 때일 수도, 아니면 뱃속 아이의 미래 모습일 수도. 알쏭달쏭한 그림을 뒤로 하고, 말끔해진 화실을 둘러본다. 짧은 시간에 멋지게 바꿨구나. 페인트 칠을 하고, 소품들을 바꿨을 뿐인데, 느낌이 확 다르다. 정말 카페를 해도 되겠네. 복고풍이면서도 촌스럽지 않아. 개조된 창고를 조심스레 열어본다. 어. 이층침대다. 원룸처럼 세면대도 있고, 싱크대도 있다. 여긴 준이형의 숙소가 됐네. 어쩐지 39금의 밤이 떠올라, 서둘러 문을 닫았다. 이 방에서 역사가 이뤄진 게 분명해!

“맘에 드십니까. 건물주님?”

“벌써 왔어요? 아직 카페에 있을 줄 알았더니?”

“응, 순이가 추워하길래. 서둘러 나왔어.”

“순이 언니는요?”

“집에서 요양 중.”

“아빠 된 소감이 어때요?”

“최고야! 임신이 안 될 줄 알았거든.”

“루비 언니가 고백했군요.”

“응, 그래서 더, 불타는 밤을 보냈는지도 모르지.”

아, 제발. 형까지 그러지 말아요. 제가 다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가겐 맘에 들어?”

“완전요! 특히 벽색이 맘에 들어요.” 

잘 마른 밀짚 색깔의 벽이 그림하고도 잘 어우러진다.

“다행이네. 벌써 수강생이 생겼어. 내일부터 올 거야.”

“오! 1호 수강생이네요!”

“응! 열심히 해보려고!”

“응원하겠습니다!”


조만간 국수 먹을 일이 생기겠구나. 그나저나 비스킷 깡통에 든 편지는 언제 전해주지? 음, 예쁜 아기가 태어나 더듬더듬 글을 읽기 시작할 때, 생일 선물로 줘야겠다. 엄마, 아빠가 사랑했던 역사야. 아니면 첫 부부 싸움 때, 처방전으로 쓸까? 언제든 소중하게 쓰일 날이 오겠지. 빗물로 뿌예진 가게 창을 뽀득뽀득 닦는다. 요 며칠 정신이 없었지. LP도 정리하고, 구석구석 먼지도 쓸어낸다. 사람이 들고 난 만큼 흙먼지의 양도 늘어난다. 신발에 옷깃에 묻은 먼지들이 바닥에 쌓인다. 꼼꼼하게 쓸고, 물걸레로 닦아낸다. 어쩐지 오늘은 나른하구나. 햇빛도 따뜻하고, 열어놓은 문으로 바람도 살랑대고. 기분도 몽글몽글하고. 


열람실이 텅 비어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건 처음 본다. 하니는 어디 갔을까? 주변을 둘러보다, 늘 내가 앉아있던 그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잠든 그를 본다. 잠든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 무방비 상태의 그는 더 치명적이구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아, 뭔가를 막 해도 될 것만 같다. 뭔가를 막, 하기엔 지나치게 순수해 보이긴 하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눕는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낮잠을 자기에 딱 좋은 온도. 그의 곁이라 더 따뜻한 건지도 몰라. 그의 곁이라 더 쿵쿵대는 건지도 몰라. 

누군가 깃털처럼 가볍게 머리칼을 쓸어준다. 잠에서 덜 깬 듯, 몽롱한 눈의 하니가 볼을 감싸 쥔다. 꿈이라면 깨지 않길. 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끝나지 않길. 


“뭐 맛있는 거 먹냐?”

응? 만복이가 눈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흔들어댄다. 

“입술을 옴찔거리는 것이 뭐, 맛있는 거 먹는 꿈이라도 꿨나 본데?”

죽어도 말 못 해!

차고 단 아이스크림에 꿈이 확 달아났다. 아, 조금 더 꿔도 좋았을걸.

“쉬는 날 아니잖아?”

“합숙 들어가려고.”

“합숙?”

“응, 퇴근 후에 잠깐씩 연습하는 걸로는 경연에 나갈 수가 없어. 철저히 준비해서 나가야지. 좀 있다 맥스도 올 거야.”

“넌, 알바가 대신 한다 쳐도, 맥스는 생계 아니야?”

“맥스, 시골에 집이 있대. 거기 작은 가게도 있고. 세를 받아서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나봐.”

“그럼, 뭐하러 경비 일을 하신 거야?”

“찾고 있었대. 우리 엄마를, 시골에만 있으면 영영 못 만날 것 같아서, 경비일 하는 틈틈이 찾아다녔대. 그래 봤자. 서울역에 앉아있는 게 고작이었다지만,”

“맥스 답네. 사람을 찾으러 서울역에 앉아있다니.”

“그러니까.”

“합숙 장소는 맥스네 시골집?”

“응. 좀 외딴 데 있어서, 고래고래 노래를 불러도 괜찮대.”

본격적으로 준비하는구나. 만복이는 추진력이 좋구나. 밴드는 만드는 것도, 경연을 결정하는 것도, 전혀 망설임이 없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라, 그런 걸까.

“그래서, 곡 받으러 왔어.”

“몇 곡 정도 부르는데?”

“중간에 떨어지지 않으면, 6곡쯤. 미션도 있고, 심사위원 노래도 불러야 해서. 제이가 줄 곡은 2곡쯤?”

설명 대신 불러주는 편이 낫겠지. 언젠가 하니의 앞에서 불렀던, 크로바 레코드를 불러본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

철 지난 달력을 찢고 

이슬이 맺힌 맥주 캔을 찌그러뜨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래도 들리고 싶다면 언제든지 와

들어는 줄게 네 마음 크로바 크로바 

가끔은 한눈을 팔아도 용서해주실 거야

크로바 레코드 끌러봐 네 마음       


소금도 좋고 설탕도 좋아 

반짝이는 가루를 뿌리고 

나지막이 불러봐 포실포실 찐 감자 같은 네 목소리      


다정한 거짓말은 보약

억지로 웃지 않아 크로바 크러바

엉킨 실타래 같은 니 마음

끌러봐 끌러봐      


휘익, 휘파람 소리와 우렁찬 박수 소리. 어느새 맥스도 왔다. 

“노래 좋은데? 블레싱 목소리랑도 잘 어울리겠다. 우리가 만난 크로바에 대한 노래니까, 어쩐지 더 공감이 되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배꼽인사를 하고는 방글방글 웃는다. 역시 다른 사람이 불러주는 게 더 좋아. 

“요 부분이랑, 요 부분은 맥스가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보리차 부분이랑 소금 나오는 데요.”

“나도 같은 생각! 그래야 노래가 풍부해질 것 같아.”

“좋아. 그 부분은 음도 단조로운 편이니까.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암요. 암요. 

“다른 곡은?”

“음, 많이 생각해봤는데, 역시 최근에 만든 게, 젤 좋은 거 같아. 예전 거는 좀 유치하기도 하고, 어딘가 어설퍼서. 일단 들어볼래?”

관객이 두 사람뿐인, 무대지만, 가슴이 벅차온다. 부디 이 노래가 두 사람의 맘에 들기를. 그리하여 너와 내 마음이 담긴 이 노래가 세상 밖에서 울려 퍼지기를.    

 

책은 덮어

벚꽃 살랑 바람이 더 좋으니까

풀던 문제도 내려놓고 

부러진 샤프심도 내버려 두고

놀러 가자

흩날리는 벚꽃 아래 발그레 두 볼 

짧은 그림자에 숨어 쫓아갈까

아직 날 모르면 어쩌지

서가에 숨어 널 훔쳐보던 나를

     

웃으면 안 돼 내 마음을 들키니까

뛰어도 안 돼 너에게 돌진하니까 

벚꽃살랑도서관 

오늘은 고백할래 네버엔딩 내 마음을!     


책은 덮어

벚꽃 살랑 바람이 좋으니까

하품 나오는 숙제도 밀어놓고

나랑 놀자

흩날리는 벚꽃 아래 발그레 두 볼 

짧은 그림자에 숨어 쫓아갈까

아직 날 모르면 어쩌지

커튼 뒤에서 널 훔쳐보던 나를     


활짝 웃어 내 마음을 들킬 거니까

마구 뛰어 너에게 돌진할 테니까 

벚꽃살랑도서관 

오늘은 고백할래 네버엔딩 내 마음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초조하다. 가사가 너무 유치한가? 아니면 곡이 좀 들떴나? 

“제목이 <벚꽃살랑도서관> 인 거야?”

“응.”

“내가 부르기에 좀 간질간질하긴 하지만, 그래도 신선해서 좋아.”

“달달해서 좋구만. 난 이 곡에선, 기타만 친다. 고백은 역시 한 사람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네!”

두 사람이 좋아해 줘서 다행이다. 


천재 기타리스트 맥스가 악보를 보고는 기타를 튕겨본다. 역시 금방 익히시네. 나도 아빠의 전자피아노를 쳐본다. 만복이는 어설프게 노래를 불러본다. 아, 남자가 부르니까, 굉장히 설레네. 꼭 하니가 내게 고백하는 것 같다. 심장이 이렇게 벌렁거려도 되는 거야? 

“제이는 피아노도 잘 치는구나?”

작곡을 위해선 필수지. 기타는 독학이지만, 피아노는 학원에 다녔다. 보습학원 대신 피아노를 다니겠다고 여러 날 졸랐던 기억이 난다. 투정이라곤 부려본 기억이 없는데, 피아노 만큼은 꼭 배우고 싶었다. 

“그럭저럭.”

“그럭저럭 치는 수준이 아닌데? <크로바레코드랑>, <벚꽃살랑도서관> 좀 녹음해서 보내줘. 그래야 빨리 익힐 것 같아.”

“알았어.” 

“그리고, 예선 때 부를 곡을 뽑아봤거든. 편곡 좀 부탁할게.”

모노의 ‘넌 언제나’ 구나. 만복이의 음색에 잘 맞는 곡을 골랐네. 아마도 맥스의 추천이겠지.

“이번 주까지 보내줄게.”

“응, 그동안 우린 제이의 곡을 연습하고 있을 게.”

부르다 보니, 블레싱에게 어색한 부분이 있어서 조금씩 수정했다. 가수에 맞춰서 곡을 바꾸는 것도 엄청 매력적인 일이구나. 셋이 합을 맞추다 보니, 훌쩍 시간이 지났다. 반창고클럽만 오면 시간이 참 잘 간다. 

“우리 국밥이나 먹으러 갈까?”

“콜!”


알고 보니 시골에 집과 가게가 있는 소시민 맥스가 쏘기로 했다. 집에서 먹는 것도 맛있지만, 셋이서 같이 먹는 순댓국도 정말 맛있다. 특히 노래를 부르고 난 뒤엔 더.

매운 앙념을 듬뿍 넣고 청양고추도 송송 잘라 넣는다. 후추도 듬뿍. 맥스는 깍두기 국물을 넣는다. 블레싱은 들깨가루를 듬뿍. 입맛은 다르지만, 그래도 우린 한 팀이야.


“합숙 들어간다면서요.”

“경연이 한 달 뒤이긴 하지만, 우리가 너무 급조된 팀이니까. 아무래도 다른 팀보다 부족한게 많지. 거기 있는 동안 옛 동료들도 불러서 조언도 들어보려고 해. 제이도 시간 나면 내려 와. 우리 연습하는 것도 좀 보고.”

“시간 나면요.”

블레싱은 공기밥을 추가 시켰다. 반찬도 리필. 여기 국밥 맛있네.

“아, 거기가 얼마나 먼데. 제이는 가게 지키기에도 바빠요. 제이, 올 것 없어. 내가 영상 통화 할게. 그리고. SNS에도 올릴 거야. 시간 날 때 봐.”

휴, 그러잖아도. 그 먼 데를 어찌 가나 했어. 땅끝이잖아. 

“팬이 많이 늘었더라.”

“응, 공연실황도 좋지만, 역시 연습장면이 더 정감 있고 좋은가 봐.”

나도 봤다. 맥스와 블레싱의 살가운 모습들이 고스라니 담겨있어서 더 가깝게 느껴졌다. 팬들이라면 그런 영상에 더 마음이 갈 만하다.

“시청자 투표도 있으니까, 팬들이 많으면 유리하겠지.”

“아직은 물방울들이지만, 곧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될 거라고.”

“바다까지 될 거니까, 걱정마.”

블레싱이 공깃밥을 말다 말고, 활짝 웃는다.

“제이랑 있으면 힘이 나! 역시 뺏는 게 나을까?”

만복이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친다. 

“임자 있는 여잔 건드는 거 아니다.”

“농담이에요.”

무슨 농담을 그리 살벌하게 하세요. 하니가 슬퍼합니다.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나왔다. 기타를 든 맥스가 손을 흔든다. 블레싱도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오늘 두 사람은 막차를 타고 땅 끝까지 내려간다. 여관에서 하루 자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산 아래 집으로 들어간다. 싸우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못다 한 정을 쌓겠지. 못다 한 꿈도 이루고. 몸은 갈 수 없지만, 마음을 담아 택배를 부쳐야겠다. 쥐포도 좋고, 컵라면도 좋고, 도넛도 좋겠다. 밤새 노래를 부르다, 허기지면 먹을 수 있게.

콧노래를 부르며 가는데, 허둥지둥 가는 슈퍼 아주머니가 보인다. 

“뭐가 그리 바쁘세요?”

“아, 제이구나. 순이가 갑자기 참외가 먹고 싶다잖아. 그건 우리 가게에도 없는 거라.”

벌써부터 수발러가 되신 거에요? 

“하나밖에 없는 딸년이 먹고 싶다는데 사다 줘야지.”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다 네 공이라더라. 둘을 그렇게 붙여 놓은 게 너라며.”

살짝 불을 붙였을 뿐입니다. 이렇게 활활 타오를 줄은 몰랐어요. 

“이 은혜 잊지 않으마!”

“별말씀을요.”

슈퍼 아주머니가 글썽거리는 눈으로 꼭 끌어 안아준다. 참 이상한 일이다. 크로바에 오고 나선 무심하고, 차갑던 내가 이토록 사랑을 받게 됐다. 남의 일에 간섭하고, 참견하고, 오지랖을 부리는데, 그게 좋다고 한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싶게. 많은 사랑을 준다. 

“정말 네가 와서 다행이야.”

아주머니의 말에 나도 공연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도, 여기 와서 다행이에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골목에 들어섰다. 상견례는 간소하게 하기로 하고, 결혼식은 출산 후로 미뤘다고 했다. 자궁벽도 얇고, 피도 좀 고여있어서, 일단은 안정을 취하는 게 좋단다.

“열 달 동안 호강 좀 해야지.”

그럼요. 열 달 후엔 전쟁인데요. 육아 전쟁. 노란 참외를 흔들며 아주머니가 집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긴다. 열 달 동안 우리 순이 언니 엄청 건강해지겠다. 언니, 파이팅이에요! 


뭘 할까 생각하다, 며칠 전부터 머리에 맴도는 멜로디가 있어서 악보에 옮겨보기로 했다. 콩나물들을 오선지 가득 옮기고 있는데, 승합차가 가게 앞에 멈춰 섰다. 흠, 잠시 주차를 하는 건가? 그러기엔 행동이 너무 굼뜬데? 갈색 스웨터를 입은 청년이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어 편다. 음, 어디서 많이 본 인상인데? 앗! 봄 쌤의 조카로구나! 연필을 노트에 끼워두고 서둘러 나왔다.

“연락도 없이 왔네요. 죄송합니다.”

작업복을 벗은 그는 훨씬 앳돼 보인다.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었구나. 나보다 살짝 위거나, 같거나

“아가씨가 제이구나? 상현이 말대로 정말 깜찍하게 생겼네.”

봄 쌤의 조카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는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조카가 봄 쌤을 가볍게 들어서 휠체어에 앉혔다. 

“내가 오자고 졸랐어. 바쁜 조카를 괴롭혔지.”

봄 쌤이 주변을 둘러보며 웃는다. 정말 목련꽃 같은 분이구나. 참 곱다. 


“여긴 옛날이랑 똑같네. 크로바도 그렇고, 이 정겨운 골목들도 그렇고.”

“네, 시간이 멈춘 것 같죠.”

“그래. 나만 늙고, 나만 병든 것 같아.”

봄 쌤이 서글프게 웃는다. 

“제이랑 준이가 배려해줘서 화실을 지킬 수 있었어. 그래도 내 청춘이 어려있는 공간이라, 그대로 폐업하기엔 가슴이 아팠거든. 정말 다행이야.”

“네, 정말 다행이에요.”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더니, 준이 형이 바람처럼 계단을 뛰어 내려온다. 

“아! 선생님!”

“준이로구나! 어쩜 옛날이랑 똑같네.”

“좀 늙었죠.”

“늙긴, 내 눈엔 그 시절 꽃미남 그대로인데?”

“에이, 선생님두.”

준이 형이 가볍게 선생님을 안고, 계단을 올라간다. 조카가 휠체어를 들고 뒤따른다. 

얼마나 이곳이 그리웠을까. 봄 쌤의 눈에서 그리움이 뚝뚝 떨어졌다. 계단참에 앉아있자니, 느릿느릿 걸어오는 루비 언니가 보인다. 


“안 들어가고, 왜 거기 있어?”

“제가 끼기엔 어색한 자리에요.”

“그런가? 난 어쩐지 너도 이 학원에 다닌 것 같은 기분이야. 굉장히 오래 된 이웃 같은 기분. 곰 아저씨 딸이라서 그렇겠지?”

네. 그래서 그럴 거에요. 그래도, 역시 이 자린 끼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루비 언니가 조심조심 계단을 오른다. 아주머니의 만류에도 왔을 것이다. 참외를 먹을 시간도 없이 왔겠네. 언니가 무사히 계단을 다 올라간 걸 보고, 가게로 돌아왔다. 이번 노래는 봄봄 화실에 대한 걸로 할까. 블레싱과 맥스의 이야기도 좋을 것 같은데. 아, 쓸 노래는 많고, 나는 너무 게으르구나. 좀 더 열심히 노를 저어야겠어. 막 물이 들어왔다고! 아껴 둔 초콜릿을 먹고, 마구잡이로 엉킨 음표들을 악보에 옮긴다. 딸랑, 종이 울리고 루비 언니가 충혈된 눈으로 들어온다. 


“쌤, 이제 가신대.”

“네, 1분만요. 금방 나갈게요.”

마지막 음표를 종이에 그리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보면 볼수록 제이는 곰 씨를 닮았구나. 오늘 봐서 반가웠어. 곰 씨에게도 안부 전해주렴.”

준이 형이 봄 쌤을 뒷좌석에 옮기고, 문을 닫았다. 

“조심히 가시고, 또 놀러 오세요.”

“응, 그땐 좀 더 건강해져서 와야겠다. 그래야, 우리 준이, 순이의 꼬맹이도 안아줄 테니까.”

네, 꼭 건강해져서 오세요. 멀어져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마음속으로 기원한다. 그 날까지 기다릴게요.

 

봄 쌤이 가고, 준이 형이랑 루비 언니도 화실로 올라갔다. 이제 다시 혼자. 크로바 레코드에 오고 나선, 혼자만의 시간이 귀해졌다. 하루에 한 번, 삼총사가 오고, 일주일에 한 번 노래교실에 가고, 시간 날 때마다 버스킹을 간다. 종종 하니와 매직이가 오고, 몽이 언니와 순이 언니가 온다. 요즘엔 맥스와 블레싱도 들린다. 다 같이 모여서 따뜻하고, 다 같이 놀아서 신이 난다. 그래도 제일 좋은 건, 노래를 만드는 이 시간, 늘 혼자였을 땐 이토록 소중한지 몰랐다. 근데 지금은 얼마나 보석 같은지 안다. 한 자 한 자 가사를 새기면서, 웃는다. 누군가 이 노래를 불러주기를,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기를.      

옥상에 걸린 빨래들이 빨래집게를 버리고 도망간다. 누구네 집 빨래인지 알겠다. 하늘하늘한 블라우스를 들고 크로바로 향한다. 오늘따라 할머님들이 격하게 반응해주셔서 나도 모르게 춤까지 췄다.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땀을 많이 흘렸다. 나한테 이런 면도 있었네. 나 어쩌면, 댄스까지 섭렵할지도. 


가게 앞엔 벌써부터 삼총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제 귀가 시간을 너무 잘 아시는 군요. 

“순이 임신 기념으로 떡을 돌린다잖아. 특별히 제이한테는 많이 가져왔지. 냉동실에 넣어놓고 배고플 때 꺼내먹어.”

방앗간 아주머니가 펄펄 김이 피어오르는 시루떡 한 박스를 내민다. 백일 기념, 돌 기념 떡을 봤어도, 임신기념 떡은 처음 봐요. 나 대신 세탁소 아주머니가 능숙하게 문을 연다. 종종 자리를 비울 때가 있어서 여벌 열쇠를 맡겨두었다. 그런데도 문 앞에서 절 기다려주신 거에요? 


따끈한 떡을 가위로 숭덩숭덩 자르고, 두유도 한 컵씩 따른다. 말랑말랑 시루떡이 엄청나게 맛있다. 그래도, 일단 씻어야겠다.

“왜 더 먹지?”

“일단 좀 씻어야겠어요. 노래 교실에서 춤을 췄더니, 너무 덥네요.”

“제이가 춤도 출 줄 알아?”

먹고 살려면 춰야지요. 막춤인들, 어쩌겠어요.

“그러게, 얌전 빼고, 아무것도 안 하게 생겼는데.”

저도 제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어요. 시루떡 하나를 더 찍어 먹고,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날씨에 찬물 샤워도 괜찮을 것 같은데. 훌렁훌렁 옷을 벗고, 쏴 물을 튼다. 어우, 차가워. 그래도 이 정돈 괜찮아. 서둘러 몸을 씻고 나왔다. 시원한 촉감의 블라우스를 입고, 민트색 반바지를 입었다. 흰 양말도 목까지 당겨 신었다. 집이자, 직장. 그래서 적당히 갖춰 입어야 한다. 맨발은 스스로가 사절. 이유는 발이 너무 못생겨서다. 평발인데다, 마당발이어서, 샌들은 잘 신지 않는다. 잘 때만 양말을 벗는달까. 


“매직이가 미친 듯이 공부한다며?”

“나는 걔가 그렇게 공부하는 거 처음 봤어. 고3 때도 그렇게는 안 했거든.”

“무슨 바람이 불었대?”

몽이 바람이 불었죠. 그날 입술에 산호색 립스틱이 묻어있을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사귀는 애 때문이지. 누군지 모르겠는데, 아주 야무져. 그 한량 같은 놈을 담박에 고쳐놨다니까.”

아직도 비밀 연애입니까? 허, 몽이언니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나요?

“그러게, 그 누군지 모르는 아가씨가 참 대단하네.”

가만, 어째 다들 아는 눈치인데?

“그제는 그 누군지 모르는 아가씨랑 전봇대 밑에서 뽀뽀도 하던데?”

“뭐, 그 힘으로 공부를 하는 거겠지.”

세탁소 아주머니가 자조적으로 대꾸한다. 

“똥 막대기면 어떻고, 싸리 빗자루면 어떠냐? 합격만 하면 되지.”

“그래, 합격만 하면, 그 누군지도 모르는 아가씨를 보쌈해 올 거야.”

허, 조만간 몽이 언니 보쌈 당하시겠어요. 근데 내 앞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이거 소기의 목적이 있는 건데?

“그 누군지 모르는 아가씨도 보쌈당할 준비를 해야겠네요.”

적당히 식은 떡을 먹으며, 넌지시 말을 하자, 세탁소 아주머니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집은 암 것도 필요없어. 그냥 몸만 오면 돼. 그리고, 둘만 알콩달콩 잘 살면 되고. 집도 벌써 사놨어. 뭐 평수는 좀 작아도, 신혼부부가 살기엔 딱이지. 뭐.”

왜 그걸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 거에요? 몽이 언니가 부담스러울까 봐? 

“그나저나 형보다 빨리 가도 되겠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괜찮은 여자 있으면, 순서랑 상관없이 가면 돼. 게다가 매직이가 오랫동안 짝사랑 해 왔잖아. 그렇게 멀끔하게 생겨선, 이놈이 은근 순정파야. 다른 여자하고는 그렇게 깊이 가지도 않는다고. 몽이 놓치면, 총각 귀신 되게 생겼어!”

드디어 실명이 나왔네요. 아주머니의 애 타는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저도 있는 힘껏 두 사람을 밀어볼게요. 

“여기저기서 국수 얻어먹게 생겼네요.”

“제이 생각도 그래? 둘이 잘 될 것 같아?”

세탁소 아주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오늘은 슈퍼 아주머니의 날이 아니었나요?

“네. 분명 잘될 거에요. 그러니까 국수나 넉넉히 말아놓으세요.”

축의금 봉투나 준비해 놔야겠네. 순이 언니도 그렇고, 몽이 언니도 그렇고. 짝사랑 끝에 단비네. 둘 다 축하해요! 


“근데 이건 뭐에요?”

세탁소 아주머니가 가져오신 앨범에 눈을 둔다. 떡 대신 아주머니는 졸업 앨범을 들고 왔다.

“집 정리하다 나왔는데, 제이가 궁금해 할까 봐.”

아주머니가 사진을 촤르륵 넘긴다. 앗, 매직이다. 어릴 때도 귀공자처럼 생겼었구나. 

“우리 유성이 이때도 참 잘 생겼었어.”

“그래, 인물 하난 훌륭하지.”

참새 아주머니가 맞장구치며 다시 앨범을 촤르륵 넘긴다. 앗, 하니다! 수려함은 정말이지 타고나는 것이구나. 어쩜 이리 잘생겼담. 초등학생한테 가슴이 설레이기는 처음이야.


다른 한 권에선 깍쟁이처럼 보이는 순이 언니랑, 까무잡잡한 준이 형, 그리고 새초롬해 보이는 몽이 언니의 사진을 봤다. 아직 어린 데도, 지금의 느낌이 물씬 묻어나서 재밌네.

“어쩐지 제이도 이 앨범에 있을 것 같단 말이야.”

“그러게. 잘 찾아봐. 어디 구석에 있을지도 몰라.”

“전 어디에도 없을걸요.”

“왜? 졸업한 학교 앨범엔 있을 거 아냐?”

“졸업사진을 찍을 때, 아팠어요. 그래서 앨범엔 제가 없어요.”

가볍게 말했는데, 왜 아주머니들이 울컥하시는지 모르겠다. 내 눈이 슬퍼 보였나. 아니면 내 각막의 주인이 슬퍼했나.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건강해서 다행이야.”

슈퍼 아주머니가 어깨를 감싸 안아준다.

“네.”

아주 잠깐 슬펐지만, 다시금 본연의 수다의 세계로 되돌아갔다. 순이 언니의 경사스러운 임신과 준이 형의 첫 수강생 얘기, 그리고 몽이, 매직이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  


딸랑딸랑, 작은 종소리가 들려온다. 그 애가 가방에 차고 다니던 손톱 만한 방울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학교 앞엔 큰 차도가 있었고, 횡단보도 대신 육교가 있었다. 

막 계단을 내려가려는 나를, 누군가 등 뒤에서 떠밀었다. 작은 종소리가 들렸고, 후다닥 도망치는 발소리도 들렸다. 내가 붕 떠서 계단을 구르기 전에. 아주 짧은 그 시간에. 나는 나를 민 그 애가 누군지 알았다. 그 종소리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바람이 가져갔나. 육교 아래를 지나던 바퀴들이 가져갔나. 


정신을 차렸을 땐, 병원. 큰 붕대가 머리에, 눈에, 감겨있었다. 웅웅, 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가 들여왔다. 

“제이야. 정신이 드니?”

눈이 아프다. 만지려고 해도, 붕대가 감겨있어서 만질 수가 없다. 천 개의 바늘로 쑤시는 통증. 근데도 울음이 나진 않았다. 

“누구야? 난 왜 이러고 있는 거야?”

“같이 동물원에 갔던 곰 아저씬데, 기억 안 나?”

“몰라. 나, 장님 되는 거야?”

“아냐, 제이는 좀 다쳤을 뿐이야. 열 밤만 자면 나을 거야.”

“장님 되는 건 아니고? 심봉사처럼 장님되는 건 아니고?”

“아니야. 장님. 천사 같은 언니가 예쁜 각막을 주고 날아갔거든. 그러니까 걱정 마.”

“천사 같은 언니?”

“응,”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 수런대는 말 소리. 간호사 언니가 팔에 주사를 놔주고 약을 챙겨주고 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소리가 더 크게, 더 요란하게 들린다. 

“아,”

이건 엄마의 목소리. 가느다랗게 떨리는 울음소리.


“울지 마. 수술 잘 끝났잖아. 누나가 울면 제이가 더 겁 먹어.”

다정한 목소리가 엄마를 위로한다. 

“엄마,”

“응?”

엄마가 다급히 다가와 곁에 앉는 소리. 엄마 손이 이렇게 거칠고 따뜻했나.

“기타 좀 갖다 줘.”

“기타?”

“캄캄해서, 무서워. 근데 기타가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 나 대신 노래하고, 나 대신 울어줄 테니까.”

엄마가 나를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는 모른다. 정수리에 감긴 붕대가 젖어오는 감촉 밖에는 느끼지 못했다. 그때 엄만, 내게 먼 사람. 내겐 기타만 유일한 친구였던 시절. 


꿈결 속에서 딸랑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경찰이 왔다 가고, 목소리밖에 없는 사람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난 범인을 말하지 않았다. 진짜 범인은 그 애가 아니니까. 그 애는 마리오네트 일 뿐이야. 가방에 작은 종이 달린 피노키오. 가끔 내 병실을 엿보기도 하는 착한 피노키오. 


졸업사진을 찍는 그 기간에 난 병원에 있었고, 수련회도 소풍도 모두 가지 못했다. 졸업 앨범엔 신기할 정도로 나의 존재가 지워져 있어서, 유령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내가 없으므로 해서, 착한 피노키오는 앨범을 볼 때마다 고통스럽지 않겠지. 아니, 더 무섭게 자책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그가 나를 기억 속에서 지우기를 소망한다. 앨범 속에 내가 없듯이. 하지만, 그는 결코 나를 잊지 못 할 것이다. 

거울 속엔 내가 있고, 내 눈 속엔 그토록 살리고 싶어했던 그 애의 누나가 있으니까. 


“가만 보니까, 제이는 양쪽 눈 색깔이 미묘하게 다르네.”

햇빛이 비춰서 눈동자의 색이 자세히 보였나 보다. 하나는 짙고, 하나는 더 옅고, 그 날 후에 일이다. 

“네.”

“굉장히 매력적이네. 꼭 서양사람 같다.”

좀 더 짙은 쪽이 언니 쪽. 원인은 알 수 없다. 이것 또한 부작용일 수도 있고.

“어디? 정말이네. 지금까진 몰랐어.”

이렇게 햇볕에 앉아있지 않았으니까요. 오늘은 차양을 치는 걸 깜빡했구나. 그 덕에 이렇게 깊숙이 햇빛이 들어왔네. 

“제 마력을 들켜버렸네요.”


농담으로 얼버무리고, 밖에 나가 차양을 친다. 졸업 앨범 덕에 까마득히 잊었던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빠에 대한 기억들도. 기타를 치는 내 곁을 지켜준 건 아빠다. 내가 코드를 몰라 헤매면, 그 손으로 더듬 더듬 짚어주셨다. 새로운 곡도 알려주고, 색 다른 연주 법도 알려주고, 같이 노래도 불러줬다. 어둠 속에서 나를 구원해준 건, 기타와 아빠였다. 그래서 앨범 속에 내가 없어도, 한 학기가 날아갔어도, 내겐 악몽이 아니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에 소풍을 다녀왔던 것처럼 신비했던 추억. 그게 아빠에 대한 나의 첫 추억. 


왜 이제야 그 기억이 떠오른 건지 모르겠다. 크로바 레코드에 있어서인지. 세탁소 아주머니가 가져온 앨범 덕분인지, 내가 이제는 행복해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촘촘하고 좁았던 마음에 한 움큼의 숨이 들어간 것처럼 자꾸만 추억들이 피어오른다. 그건 아마도 사랑의 힘일 거다. 삼총사의 사랑과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사랑, 그리고 하니와의 사랑. 그 사랑들이 나를 회복 시키나 보다. 아주머니들이 왁자지껄 나가셨다. 어쩐지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어서, 기타를 들었다. 그 시절 어둠 속에서 치던 곡을 쳐본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저 멀리 달 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지 않네.     


신호음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곰 씨가 전화를 받는다.

“나야. 제이.”

“아, 손님이 와서, 늦게 받았다. 미안.”

“이제야 기억났어. 나 눈 수술했을 때 옆에 있어줬던 사람이 아빠지?”

아빠란 말에 곰 씨의 말문이 턱 막혔다. 바보같이.

“고마웠어. 아빠가 없었더라면, 지옥 같았을 거야. 노래도 가르쳐주고, 기타도 가르쳐주고, 정말 고마웠어.”

“제이야.”

“그 말 하려고 전화한 거야. 이제 그만 끊을게.”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난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시간대다. 

“아빠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 아빤 그때처럼 달려갈 거야.”

“알았어.”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에잇, 왜 이렇게 감상적이 된 거야. 기타 줄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는다. 문득 하니가 보고 싶다. 꼬맹이였던 하니도 참 좋았지만, 역시 지금이 더 좋아. 그 마음을 담아 문자를 보낸다.


‘졸업 앨범 봤는데, 엄청 잘 생기고 귀여운 하니가 있더라.’

‘난 태생이 잘생겼어. 근데 그건 어디서 본 거야?’

‘세탁소 아주머니가 가지고 오셨어.’

‘우리의 과거를 봤구나.’

‘응, 아주머니들이 어쩐지 나도 거기에 있을 것 같댔어.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제이가 동창이라, 그럼 우린 더 빨리 좋아했겠다.’

‘응, 그랬을 거야. 이따 하천에 갈까?’

‘좋아. 치킨에 맥주 사서 갈까?’

‘응, 그럼 나는 역으로 마중 나간다!’

‘좋아!’


그도 나처럼 설렐까. 벌써부터 내가 보고 싶을까. 기타를 메고 가야지. 하천에 놀러 나온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노래를 불러야지. 나의 설렘이 모두에게 전염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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