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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May 30. 2023

크로바레코드 14

14. 개밥에 도토리- H

  

여행에서 돌아온 선배가 예쁜 파우치를 주었다. 제이 갖다 줘야지. 드디어 길었던 야간근무가 끝났다. 오늘은 제이랑 버스킹 구경을 가는 날, 한낮은 반팔을 입은 만큼 덥지만, 밤은 또 선선해서, 긴 셔츠를 입었다. 제이를 위해 무릎 담요도 챙기고. 자, 이제 시계를 재촉해볼까?

“유성 씨는 왜 그만 둔 거야?”

유나 사서가 상호대차 책을 챙기면서 묻는다. 

“슬슬 가정을 꾸리려나 봅니다.”

“응? 솔로라더니?”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던 여자가 있었거든요. 그녀가 고백을 들어준 모양이에요.”

“오! 생각 외로, 순정파구나? 근데 그 일이 근로장학생을 그만 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사귀는 조건이, 공무원 합격이거든요. 떨어지는 순간. 단꿈같은 연애도 와장창 깨지는 거죠. 아주 똥줄이 탈 거에요.”

“와우, 대박이네. 누군지 몰라도, 엄청 야무진 아가씨구나. 한량같은 유성 씨를 휘어잡는 걸 보면.”

네, 그 야무진 아가씨가 우리 누나에요. 그 한량, 사람 만들어보겠다고, 프로수발러가 되어있죠. 평생 동생 도시락은 싸준 적이 없으면서, 매일 아침 매직이의 도시락을 싼다. 그 모습도 눈꼴 시고, 밤마다 통화로 아양을 떠는 것도 꼴 보기 싫고. 확 집을 나가버릴까부다.


신규도서가 도착해서, 입력을 하고 바코드 작업을 했다. 도장만 찍으면, 대출할 수 있다. 먼서 희망도서로 신청한 회원들에게 문자를 발송했다. 진열은 삼 일 뒤에, 사서 뒤 편에 책을 배치하고, 손을 닦았다. 와, 벌써 퇴근 시간이야! 시계를 재촉한 보람이 있네. 

이마에 닿는 바람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아직 공기가 식지 않았구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역으로 향한다.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왔다. 이런 저녁엔 대중교통이 더 빠르다. 그녀는 벌써 도착했을까? 

물빛 원피스가 하늘거린다. 산뜻하게 자른 짧은 머리칼도 나부낀다. 오늘은 바람이 많은 날. 오후의 열기는 모두 사라지고. 선선해진 공원에 제법 사람들이 많다. 


“너무 늦었지?”

“아니, 막 시작했어.”

그녀가 바닥에 깔린 등산방석을 툭툭 친다. 치밀하게 준비해 왔는걸? 나도 그녀를 위해 무릎담요를 꺼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마침, 으스스하던 참인데.”

“응.”

만복이의 따뜻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맥스의 기가 막힌 기타 선율도. 

“연습 많이 했나 봐.”

본래부터 한 팀이었던 것처럼, 어디 하나 어긋나는 곳이 없다.

“엄청 나지? 아깐 감동해서 눈물까지 났어.”

그래서 이렇게 토끼눈이구나. 그녀의 곱슬대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손가락사이로 튕겨지듯 빠져나가는 이 짧은 머리칼이 좋다.      


똑같은 베갤 베고 잠이 들면

어디서든 함께 있는 거라던

꿈에서도 헤어지지 말자던 그런 니가 너무 그리워    

  

테이의 ‘같은 베개’와 너무나 어울리는 음색. 그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적신다. 아직은 누구를 닮지를 않은 그 풋풋한 음색이 만복이의 매력이리라. 맥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별로 들리지 않지만, 그래도 화음을 때때로 넣는다. 거, 좀 더 욕심을 부려도 되는 거 아니요! 이미 형성된 팬덤이 있는지, 소녀 팬들의 함성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천군만마를 얻었네. 만복이는.”

“기타까지 채웠으니, 이젠 경연에 나가는 일 밖에 없으려나?”

“제이는? 그런 거 나가고 싶지 않아?”

다음 곡을 준비하는 사이에 묻는다. 만복이가 물을 마시는 짧은 순간에.

“모르겠어. 내가 경연에 맞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내 노래가 그 정도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그런 망발을. 제이의 목소리라면, 누군들 반하지 않을 리 없어!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나가볼까 해.”

제이의 눈이 반짝인다. 그녀도 꿈이 있겠지. 자신이 만든 곡을 들려주고 싶은 꿈. 자신의 앨범을 발매하고 싶은 꿈. 꿈꾸는 그녀는 더 예쁘고 귀여워서, 마음이 두근댄다. 


다음 노랜 더 넛츠의 ‘사랑의 바보’ 제이가 작게 속삭인다. 저 노랜 내가 추천해준 노래야.

맥스도 이번엔 조금 목소리를 낸다. 둘이 잘 어울리는 데. 엄청. 맥스의 목소리는 만복이보다 살짝 가늘고, 좀 더 맑고 높은 음색이다. 아니, 나이는 대체 어디로 드신 거야? 

“잘 어울리지? 두 사람”

“엄청!”

“노래 부를 때보면 꼭 부자지간 같다니깐.”

“그러네. 입매가 닮았어.”

서너 곡을 연달아 부르고 나서, 만복이와 맥스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벌써 끝난 거야?

“준비 기간이 짧았으니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네.”

제이가 그렇게 말했지만, 납득할 수 없는걸! 나도 모르게 소녀 떼를 따라 앵콜을 외쳤다. 

열성 팬이 된 나를 보고 제이가 웃는다. 만복이가 뭐라고 하는 데 듣지를 못했다. 어쩐 일인지 만복이가 이편을 향해 다가온다. 맥스 혼자 남아, 기타를 튕기더니, 큼큼, 목을 가다듬는다.

“앵콜은 어쩌고?

“앵콜은 맥스가 하기로 합의했거든요. 저도 여기 앉아서 감상하려구요.”

“용케 설득하셨네요?”

“앵콜이 나올 거라고 생각도 못 하신 거지. 큭”

“쉿!”

제이가 귀엽게 입술을 내밀어 쉿 한다. 

이윽고 그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딱 맞는 기타 선율과 함께. 끝음 처리가 조금 예스럽겐 하지만, 그조차 그리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 좋다.  

    

비둘기호가 지나가는 굴다리 옆에

그 개울에 앉아있어

너는 연두색 치마

오늘은 이별을 말하지 말아

찔레덤불에 빗방울이 맺히니까

굴다리 위에 별이 후두둑 지니까    

 

네 속눈썹에 내린 비를 잊을 수 없어 

그 머리칼에 내린 별을 지울 수 없어      


식은 연탄재가 굴러가는 비탈에

그 대문 앞에 서 있어

너는 연분홍 두 뺨

오늘은 안녕을 말하지 말아

마음이 오직 너만 찾으니까

가슴이 아직 너만 부르니까     


네 속눈썹에 내린 비를 잊을 수 없어 

그 머리칼에 내린 별을 지울 수 없어      


참, 서정적이고, 친근한 가사네. 연탄이나, 굴다리 같은 말들이 향수도 불러일으키고, 어라, 두 사람은 왜 벌떡 일어서는 건데? 왜 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건데? 소녀 팬들도 맥스에게 반했는지 두 손이 떨어져라 박수를 친다. 맥스가 수줍게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한다. 

“맥스, 그 노래!” 

둘이 동시에 외친다. 그 노래가 뭘 어쨌기에?

“응?”

맥스가 어리둥절 두 사람을 바라본다. 

“아, 좀, 어색한가?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딱히 다른 노래는 떠오르지 않고, 그래서 불러봤어. 역시 다른 걸 부를 걸 그랬나?”

아뇨, 전 너무 좋았는데요? 감상적이고. 뭔가 추억도 불러일으키고. 레트로한 느낌이 정말 끝내줬다구요. 

“아뇨. 그 노래 어떻게 아셨어요?”

맥스가 기타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만복이를 올려다본다. 

“어떻게 알긴, 내가 만든 노래니까 알지.”

노래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지 제이의 눈도 동그래진다. 

“맥스가 만든 노래?”

뭔가를 눈치챈 듯. 제이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진다. 


“자자, 기다리는 팬들이 있잖아요. 그 얘긴 이따가 하고, 일단 SNS 계정이라도 알려줘요. 사진도 같이 찍구요.”

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팬들에게 화답할 때다. 성실한 제이는 두 사람의 기타와 앰프를 정리한다. 두 사람을 떠밀던 나도 전선을 돌돌 말아본다.

“무슨 일이야?”

“엄청 난 일. 만복이 엄마가 늘 흥얼거리는 노래인데, 출처를 몰랐거든. 근데, 맥스가 오늘 부른 거야.”

“그럼, 맥스가 엄청난 작곡가였던 거야?”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노랜 아무래도 미발표곡 같거든. 나도, 아빠도 들어본 적이 없어.”

만복이가 허둥댈만하네. 첫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팬들하고 소통도 무사히 마치고, 두 사람이 돌아왔다. 

“정신 줄 잡아줘서 고마워요.”

만복이가 고개 숙여 인사한다. 참으로 인사성이 바른 청년이야. 이 몸이 제이를 먼저 만나길 정말 잘했지 뭐야.

“별 말씀을. 그럼, 뒤풀이는 크로바에 가서 할까요? 안주랑 술은 1/n 하는 걸로 하고.”

“좋아요!”

그녀의 이 배려심에도 늘 감탄. 만복이보다는 역시 아저씨를 배려하는 거겠지. 아저씨의 주머니 사정을 우린 모르니까. 누군가 한 사람이 다 내도 좋겠지만, 그럼 아저씨가 슬퍼질 수도 있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가게에 오자마자, 제이가 LP부터 걸었다. 햇빛촌 2집. 맥스도 아는지, ‘유리창엔 비’를 흥얼댄다. 

“제이는 좋겠어. 이런 명반들을 언제든 들을 수 있어서.”

“네, 예전엔 이깟 판들 때문에 제가 이렇게 고생했나 싶어서 원망스러웠었는데, 지금은 저도 고마워요.” 

제이가 테이블에 안주며, 술을 깔아놓으며 사근사근 답한다. 이 크로바 레코드, 실은 주점이 아닐까. 아는 사람 불러서 술판을 벌이는 주점. 만복이도 열심히 세팅을 한다. 성실하고 건실한 청년이야. 역시 위험해.

맥주 한 캔을 까서 공손히 맥스에게 거넨다.

“마지막 곡 전 정말 좋았어요. 뭔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진짜 좋은 곡이에요. 아저씨 음색하고도 찰떡이구요.”

“정말? 실은 이 곡, 발표한 적이 없어. 좋아하는 여자애를 위한 쓴 거거든. 오직 그 애한테만 들려줬던 건데. 갑자기 부르고 싶어지더라고. 어디선가에서 들어줬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만복이와 제이의 입술이 벌어진다. 차분히 맥주를 까서 두 사람 입술에 물려주었다. 만복이가 꿀떡꿀떡 맥주를 마시고 용기를 낸다. 

“좋아하던 애요?”

“뭐, 이제는 추억이니까, 말해도 되겠지. 가진 거라곤, 기타 하나에, 노래 하나뿐이었는데도, 날 좋아해 주는 여자애가 있었어.”

그건 아무래도 거짓말 같은데, 지금도 저 미모라면 젊었을 땐, 아주 카사노바였을 것 같구만. 

“무슨 동아리였더라. 이젠 기억도 안 나네. 좌우지간 맨날 잔디밭에 앉아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막걸리를 먹는 놀자판 동아리였거든. 거기서 그 앨 만났어. 바람 불면 날아갈 듯, 여리게 생겨선 어찌나 술을 잘 마시던지. 어지간한 남자애들도 못 당할 대장부였지. 근데 걔가 그렇게 좋더라. 당차보이고, 예쁘고. 턱을 괴고 내 노래를 듣던 그 애가 지금도 생각나. 진짜 예뻤는데.”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멍청해진 두 사람을 위해 손수 아저씨의 안주도 챙겨준다. 그렇게 술만 드시면 속이 상해요. 아저씨가 닭꼬치를 우물거리고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렇게 사랑했던 그 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면, 믿어져? 친한 친구들까지도, 그 애의 행방을 몰라. 학과실에 물어보니, 자퇴서를 냈다는 거야. 나에겐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런 징조도 없이. 신기루처럼 그렇게 사라졌어.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사랑했던 것도 다 신기루였는지도 몰라.”

“신기루 아니에요! 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요!”

맥스가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는다. 만복이의 얼굴이 상기된다. 

“있어요! 정말.”

“어디 있는 데?”

만복이가 꾹 입술을 깨문다. 그의 아름다운 눈에 눈물방울이 맺힌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병원이요. 엄마가 아파요.”

엄마라는 말에 이번엔 맥스의 얼굴이 상기된다. 그의 동공도 같이. 옛 연인의 모습을 찾는 듯, 그가 오랫동안 만복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래서, 이렇게 널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어. 꼭 그 앨 보는 것처럼 가슴이 시렸어.”

인연이란 참 무섭고, 신기하다. 이 땅이 이렇게 좁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이 작은 크로바 안에서 일어난단 말인가.  

문득 아저씨가 벌떡 일어선다. 

“어디야? 거기.”

제이가 만류한다.

“오늘은 첫 공연의 회포를 푸시고, 다음에 가세요. 그렇게 불쑥 가면 환자에게도 분명 좋지 않을 거에요.”

그가 그제야 앉는다. 어쩜 맥스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찾아, 길거리 공연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음색을 아는 그녀라면 멈춰설 수 있도록. 

“내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어. 그 애가 날 알아보고 돌아올 수만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음악이 없어도, 가난해도, 그 애만 있다면.”

그녀는 당신이 그렇게 될까 봐, 음악을 잃고, 생활에 잠식 당할까봐 떠났을 거에요. 당신이 보석을 지킬 수 있도록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거에요.


“엄마는, 늘 그 노랠 흥얼거렸어요. 제가 노래하는 건 싫어하면서도, 빨래를 널 때도, 완두콩 꼬투리를 깔 때도, 그 노랠 흥얼거렸어요. 근데 이젠 후렴밖에 기억나지 않는대요. 너무 많이 바꿔 불러서, 어떤 게 진짜 가사인지 모르겠대요. 그 노랜 자장가였다가, 동요였다가, 힘들 땐 위로였다가 기쁠 땐, 환희였다가.”

맥스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첫 공연이 성공리에 끝났는데, 어쩐 일인지 크로바 레코드점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내가 병문안을 가도 될까?”

“같이 노래하는 친구가 생겼다고 말씀 드렸어요. 친구로 가면 돼요.”

“그래.”

죄다 코맹맹이가 되어, 안도의 웃음을 웃는다. 이것은 크로바 레코드의 기적. 곰 씨는 이런 숱한 기적들을 보려고, 이곳을 지켰다. 아저씨, 참 잘하셨어요. 제이가 빨개진 눈으로 번데기를 뎁혀 온다. 너를 만난 것도 기적. 우리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우는 것도 기적. 먹먹한 가슴을 시원한 맥주로 식힌다.     


감회에 젖어 맥주를 들이키던 만복이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겨댄다.

“참, 할 말이 있었는데! 완전 까먹고 있었네. 버스킹 가수들을 모아서 경연을 한다는데, 우리 거기 나갈거에요! 올해 처음 생긴 경연이에요. 부상으로 앨범을 내주고, 돈도 준대요.”

맥스는 어쩐지 망설이는 기색이다. 하지만 눈을 빛내는 만복이를 보니, 결심이 선 모양이다.

“내가 그런 쪽은 쥐약이긴 해. 긴장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 그래도, 이 맥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해봐야지.”

“오예! 그럼 제이는요?”

응? 거기서 왜 제이가 나와? 응원하던 제이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내가 왜?”

“만들어 놓은 노래가 많잖아요! 괜찮은 곡 좀 주세요! 아무래도 창작곡이 매리트가 있으니까!”

“그래, 나도 제이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우리 둘이 머리를 맞대봤자, 편곡이고 나발이고 안 된다고.”

“두 분께 어울리는 곡이 있을까요?”

분명 있을걸. 제이가 만든 노래는 누구나 부를 수 있으니까. 멜로디도 따뜻하고, 내용도 좋고. 나 너무 콩깍지냐. 

“찾아봐요. 설령 없다해도,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새로 만들어도 될 거에요.” 

“아, 그렇긴 해도…”

“그래. 제이. 우승하면, 제이가 만든 곡으로 음반을 낼 거니까!” 

제이의 맑은 눈에 생기가 넘쳐난다. 분명 하고 싶은 거다. 신중한 그녀는 그래도 망설인다. 

“저한테 모집 요강을 공유해주세요. 생각 좀 해볼게요.”

“천천히 고민해봐요.”

말은 그렇게 해도, 벌써 제이는 보는 눈은 팀원을 보는 눈인 걸. 어쩐지 소외감이 느껴진다. 

“좀 달달한 곡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뭐 생각나는 거 없어요?”

문득 제이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오, 있나 봐!

“그건, 다음에 공개할게요.”

아, 너무 궁금한데. 내 앞이라 부르지 못하는 건가.

“아, 빨리 맞춰보고 싶다.”

이것 봐. 벌써 한 팀이잖아. 쳇,


밤이 깊어간다. 맥스가 일어나서 LP판을 바꿨다. 그의 입맛에 맞는 곡이 내게도 좋다. 잔잔하고 따뜻한 음색이 크로바에 울려 퍼진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좋은 가수구나. 이 크로바엔 이런 보물들이 쌓여있다. 그래서 누구든 오면, 추억 한 장을 꺼내 찬찬히 돌려본다. 맥스도 숱한 추억 하나를 꺼내서 천천히 돌려보고 있을 거다. 그 애와 함께 했던 빛나던 날들이 이곳에서 다시 재생된다. 

“이거.”

“와, 엄청 예쁜 파우치네.”

검은 천에 작은 구슬들이 수놓아져 있는 반짝반짝한 파우치. 

“여행 갔다 온 선배가 선물로 줬어.”

“나 줘도 돼?”

“당연하지. 내가 야근하는 바람에 너도 힘들었잖아.”

“응.”

모두가 떠난 가게에 제이와 나만 남았다. 음악도 꺼지고, 가게 불도 꺼졌다. 제이의 작은 어깨를 끌어안는다. 

“이대로의 너도 좋지만, 꿈꾸는 너는 더 좋아.”

“응.”

내 품에서 제이가 작은 새처럼 두근댄다. 

제이는 뜬 눈으로 고민을 하겠지. 어떤 곡이면 좋을까. 편곡은 어떻게 할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실패하면 어쩌지. 

“백번은 더 넘어질지도 몰라. 그래도 혼자가 아니니까. 여기 기대.”

“응.”

그녀가 꼼꼼하게 문을 잠그는 것을 보고 돌아섰다. 응원할게. 제이     


어쩌다 내가 여기 끌려왔는지 모르겠다. 음료수 박스를 든 손이 무색하다. 붐비는 로비 저편에서 두 사람이 열심히 손을 흔든다. 우리가 이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미안, 맥스가 둘만 들어가기가 그렇다고 해서, 불렀어요.” 

그럼, 제이를 부르지. 

“제이는 편곡하느라 바빠요.”

얼씨구, 벌써 니들끼린 말 놓은 거냐?

“잘 생긴 하니를 보면, 화가 덜 나지 않을까?”

맥스의 말에 부루퉁하던 입술이 쏙 들어갔다. 뭐, 그런 거라면야, 얼마든지.

“실은 엄마한테 말하지 못했어요. 어떻게 반응할지 감이 안 와서.”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그 마음에 원망이 있을지, 그리움이 있을지 우린 모르니까.


병실 앞에서 만복이가 멈춰섰다. 잠시 망설이다가 노크.

“엄마, 오늘은 친구를 데려왔어.”

햇빛이 비치는 침대에 만복이와 많이 닮은 고운 여인이 앉아있다. 얼굴은 여위었지만, 고운 피부와 서글서글한 눈매는 여전하다. 굉장한 미인이구나. 

“안녕하세요.”

만복이 엄마가 희미하게 웃는다. 

“친구를 데려온 건 처음인데. 외톨이인 줄 알았더니.”

“엄만, 내가 왜 외톨이야?”

“아니었니?”

“당연히 아니지.”

음료수 상자를 캐비닛 부근에 내려놓고, 환자 곁으로 다가섰다. 그제야 만복이 엄마가 나를 찬찬히 살펴본다. 

“훤칠한 청년이네. 우리 만복이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맥스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커튼 뒤에 숨어있다. 저 바보. 

“맥스, 이리 와서 사과 좀 깎아요.”

만복이가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서 칼과 함께 내놓는다. 커튼 뒤에 숨은 맥스를 끌어내려는 작전이구만. 결국 맥스가 붉게 젖은 눈으로 사과를 집어든다. 

“한 명 더 있었네?”

순간 깎다만 사과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칼을 놓친 맥스가 엄마를 와락 끌어안는다. 

“제니. 나야 천복이.”

천복이와 만복이, 저 세련된 외모들이 무색해지는 이름이로구나. 

“천복…”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만복이가 과도와 사과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병실 밖으로 줄행랑 친다. 덩달아 죄 없는 나도 도주한다. 


“왜 도망치는데?”

“방해될까 봐.”

엉겁결에 말을 놓았다. 뭐 그럴 때도 됐지.

“애초에 나는 왜 부른 거야?”

“둘 다 겁쟁이거든. 하니가 있으면 하니 핑계로 들어갈 수 있을 거 아니야.”

저리 간이 작아서 어찌 경연에 나간대? 

만복이가 자판기 커피를 건넨다. 

“어릴 땐 왜 나만 아빠가 없냐고, 많이 물어봤어. 근데 그때마다 엄만, 본래부터 없었다는 거야. 엄만 결혼한 적이 없으니까. 아빠 같은 건 본래 없었대.”

“맞는 말이긴 하네.”

“응,”

“앞으로 어떡할 거야.”

“뭘?”

“맥스를 아빠라고 부를 거야?”

“미쳤어? 맥스는 그냥 맥스야.”

도망친 주제에 쿨하네. 

“무엇보다 맥스가 그렇게 하길 원해.”

그래, 그게 낫겠다. 혈연이니 뭐니 묶는 것보다, 맥스와 만복이로 만나는 편이 부담이 덜 되고 좋겠다. 그런 관계로 시작한다면 언젠가 부자지간으로 다가 설 날도 오겠지. 


“너도 이참에 만복이 말고, 다른 이름을 짓는 게 어때?”

“생각해봤는데 Blessing 어때?”

만복이나  Blessing이나, 그게 그거지만, 뭐 어감이 좋으니까.

맥스와 블레싱, 앞날을 응원할게요. 앞으론 저 없이 잘 헤쳐나가요. 눈이 퉁퉁 부은 맥스가 드디어 나타났다. 

“제니가 너 데려오래.”

이제 내 역할도 끝이네. 좀 싱겁게 끝나긴 했지만, 이걸로 족하다. 셋이 부둥켜안고 울고불고하는 것까지 보고 싶진 않다. 목례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점심시간을 희생한 보람이 있나?”

그나마 병원이 도서관이랑 가까워서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저 극적인 재회를 돕지 못했을 거다.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금방 왔네?”

“네, 뭐 특별한 거 없었죠?”

대신 자리를 봐준 유나 사서에게 샌드위치와 함께 산 마카롱을 건넨다.

“별일이 있었겠어? 잘 먹을게!”


오늘은 도서관이 한산하구나. 이런 날이 있다. 늘 오던 회원들이 어쩐 일인지 발길을 뚝 끊은 날, 신문을 읽으러 오는 노신사가 나들이를 가고, 잡지를 읽던 여사님들이 출타를 하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꼬마 회원님들도 나비를 쫓아 언덕을 오를 때, 웅성대던 이곳이 고요한 심해처럼 가라앉을 때. 아무도 없는 서가를 혼자 거닌다. 쪼그리고 앉아 책을 고르던 그녀도, 책등 사이로 나를 훔쳐보는 그녀도 없는 곳. 서가 끝까지 갔다가, 천천히 돌아와도, 아무도 문을 열고 들어서지 않는다. 그날 그녀가 뺨을 대고 자던 책상에 앉아, 똑같이 뺨을 댄다. 차가운 나뭇결에 그대로 와닿는다. 눈을 잠깐 감은 것 같은데, 그대로 잠들었나 보다.  

거짓말처럼 제이의 얼굴이 아른댄다. 아기처럼 잠든 제이의 얼굴. 꿈결인가 싶어 그 머리칼을 쓸어본다.

“하니.”

역시 꿈인가. 보드랍고 말랑한 두 볼을 감싸 안는다. 살포시 벌어진 그 입술에 다가간다. 달콤하고 아찔한 키스. 어쩜, 이건 꿈이 아닐지도 몰라. 

흠흠, 소리에 눈을 떴다. 책을 든, 노신사가 이쪽을 쏘아본다. 할아버지, 저기 자동반납기가 있잖아요. 문명의 이기도 가끔은 사용하셔야죠. 잠깐만,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얼굴이 토마토처럼 물든 제이가 책 뒤로 얼굴을 숨긴다. 내가 미쳤구나. 신성한 직장에서 연애질을 했어. 그것도 키스를!

서둘러 성난 노신사의 책을 건네받았다. 혀 차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 같다. 집에 갈 때까지 차고 또 차겠지. 요즘 것들은, 하면서. 


“언제 온 거야?”

“아까. 오늘따라 사람이 없네.”

“그래서 방심했나 봐. 서가에서 잠들다니.”

제이의 얼굴이 다시 붉어진다. 그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이 되살아나 내 얼굴도 달아오른다.

공원에 설치한 대형바람개비들이 팔랑팔랑 돌아간다. 강아지풀이 흔들리고, 내 마음도 흔들린다. 

“병문안 갔다 왔다며. 나더러 같이 가자고 했는데, 바쁜 척했어. 가면 울 것 같아서.”

“잘했어. 덕분에 나도 바람 쐤지 뭐.”

“근무 중이었을 텐데 미안.”

“점심시간 맞춰서 갔다 왔어. 그러니까 괜찮아.”

“응”

“잘 만났어. 아마 지금쯤 눈물바다가 돼 있을걸.”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무릎 높이까지 쌓여있겠지. 제이는 거기서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거야. 

“고마워. 하니.”

나야말로. 덕분에 네가 왔으니까. 


그녀의 손을 잡고 공원을 거닌다. 유나 선배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요. 나 대신 자리를 지키는 그녀에게도 감사를. 처음 쳐보는 땡땡이지만 너무 달콤한데.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을 만큼. 검게 익은 버찌들이 발아래 깔려 말 줄임표 같은 얼룩을 만든다. 

“작곡가로 아니라, 가수로 참여하고 싶지 않아?”

제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제이도 버스킹을 하니까. 대상이 되잖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근데, 난,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거, 자신 없어. 소극장처럼 작은 무대까지는 괜찮은데, 더 큰 무대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

“해보지도 않고.”

“응. 겁쟁이지. 근데, 난 내 노래를 내가 부르는 것보다, 남이 불러주는 게 더 좋아. 그 사람한테 딱 맞는 노랠 만들면, 그게 더 좋아.”

만복이 녀석도 제이의 이런 기질을 알아본 거겠지. 그래서 섣불리 노래를 시키지 않은 거야.

“너무 시간을 뺏었네. 나 그만 갈게.”  

그녀가 손을 흔들고, 나폴나폴 뛰어간다. 너무 멀리 날아가지는 마, 나의 나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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