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로 위의 점

포기하고 싶은 순간 너에게

by 새벽Dawn

누구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

자신이 추구하는 미래 혹은 꿈, 지금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거란 생각들...

각자의 다른 환경에 각자의 고통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쏟아져 자신을 짓누르는 듯 한 세상.

아마도 그건 자신이 하는 노력이나 상황들이 점점 자신을 옥죄어 올 때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에 자신에게 찾아온다. 그 선을 넘어서면 펼쳐질 바다를 마주하지 못한 채 생명을 다한다거나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사라지는 걸 느끼면서 점점 나약해는 자신이 설 힘이 없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일반화하는 책이나 힘을 내라는 뻔하디 뻔한 단어로는 자신에게 전혀 위로가 닿지 않는다. 주위에 자신의 고통을 정확하게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자신 고통을 덜기 위해 주위의 사람에게 털어놓고는 조금은 나아지는 듯싶지만, 그건 일시적 효과일 뿐이다.


결국 자신의 상황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스스로가 찾아야 하며,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것 또한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겨내지 못하면, 주저앉게 될 것이고, 주저앉게 된다면, 언제 또 일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주위에 손을 내밀어서 치유를 하기보단 스스로를 잠시 놓고 조금은 위에서 바라보는 시간들을 갖아야 한다.


인생은 미로와 같다.

열심히 달려서 간 그 앞에 벽과 막다른 길이 있을 수 있고, 그 막 다른 길을 헤처 나가기 위해서는 다시 온 길을 되짚어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확인하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점 지쳐 포기하거나 그냥 그 자리에 있기도 하지만, 그 미로를 아주 높은 곳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그저 작은 점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말했다. “지구는 광활한 우주 속 작은 점일 뿐이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슬픔, 수많은 종교와 이념, 수천 명의 영웅과 제국은 이 작은 점 위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고통 또한 이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먼지와도 같다. 고통의 무게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아주 잠시라도 미로 속 고통을 내려놓고 자신을 위에서 바라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랄 뿐이다.


문제를 마주 했을 때, 복잡하고 어려운 삶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먼 곳에서 바라보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아마도 우주의 점처럼 작아질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최면술사에게 최면치료를 받게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의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으로 가보라고 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픈 기억을 떠올리거나 무서운 장면들을 마주하지만, 두려워하고 있을 때 최면술사는 그 장면을 아주 높은 곳에서 보라고 한다.


하나의 우주에서 작은 먼지와 점이 되는 순간 보이지 않는 그 고통은 작은 먼지처럼 작아지게 되는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 이다. 이처럼 아주 잠시 자신의 미로 속 고통의 순간을 마주한다면,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을 아주 높은 곳으로 보는 시간들을 갖기를 바란다.


누구나 아픔이 있고 고통스럽고 나보다 못한 사람도 수두룩 할 것이다. 그 미로 어딘가 주저앉아 있다면, 지금 당장 내가 어둠에 갇혀 있다면, 잠시 자신을 멀리서 바라보자.


하나의 우주 속 작은 생명체의 작은 일이라고...


생각은 고통을 만들기도 하지만, 또 다른 평안을 가져다준다.


전환은 어렵지만, 시도조차 노력조차 하지 않고 포기하기엔 생각보다 짧은 생일테니...

keyword
작가의 이전글뜻하지 않은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