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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이 Apr 30. 2024

아부다비에서 보내는 편지

리스본행 비행기가 연착됐다

EP. 3 엄마, 우리 리스본에 갈 수 있겠지?


무엇이 그렇게 힘이 들었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일단은 노코멘트다. 나는 어디선가 본 "남들도 나를 참아준다"는 문장을 행동 지침 삼아 사려 깊게 대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나에게 너무나도 쉽게 나에게 무엇이 서운했다거나 이런 점은 네가 참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나를 위한다는 이야기를 꼭꼭 씹어 들려준 후, 이제 나에게 묻지. "나한테 서운한 거 없어?" 내 답은 늘 똑같다. "응. 나는 서운한 거 없어.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다 보니 나는 고칠 게 많은 사람이 되어가고, 내 속엔 풀어내지 못한 서운함이 엉켜 배수되지 못하고 계속 쌓인다. 서운한 걸 이야기해달라고 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차곡차곡 쌓인 마음을, 이미 다 지나버린 과거를 들추며, 시간이 희석해 준 내 마음을 구태여 생생하게 부활시키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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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터놓고 싶은 날에는 자취방에서 아이스크림 먹으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요약영상을 봤다. 울고 웃다보면 또 마음이 후련해진다. 스스로 다독이는 법을 배워간다.


우리는 에티하드 항공을 타고 아부다비를 경유해 리스본에 간다. 에티하드 항공을 이용한 이유는 명확했다. 여행 일정에 맞는 당시 항공권 중 제일 저렴했다.


비행기에 들어서자 옅은 바닐라 향이 느껴졌고, 아라비안나이트가 연상되는 장엄한 음악이 객실 내부를 잔잔히 흐른다. 생애 최초로 경험한 이국적인 분위기는 이미 들뜬 나를 더 설레게 한다. '나 진짜 여행가는구나..!' 금색 의자, 초콜릿 색 담요, 낮은 조도의 조명이 빚어내는 따뜻한 분위기 덕분인지 호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8시간 이후면 이곳에서 내려야 한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아늑했고,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처럼 편안했다.


물론 이곳이 편안하게 느껴진 이유는 엄마 덕분이다. 내 옆에서 내가 틀어준 해리포터에 푹 빠져있는 엄마를 보니 첫 해외여행이 주는 긴장했던 마음도 점점 느슨해진다. 영어 울렁증이 있다며 승무원 선생님이 오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수줍게 웃으며 아이가 되어버리는 엄마였지만, 승무원 선생님이 지나가면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덮어주고, 테이블을 정리해 주고, 내 다리를 주물러주는 영락없는 엄마였다. 엄마의 온전한 보살핌이 내 불안을 녹였다.


영화 트는 방법을 알려주니, 이제는 혼자서 영화도 잘 찾아서 보는 내 옆자리 엄마


중동 항공사라는 게 진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곳곳에 보이고 들리는 아랍어도 있었지만, 기내 엔터테인먼트에 탑재된 실시간으로 메카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해 절하는 무슬림의 문화를 알고는 있었지만, 비행 중에도 메카의 위치를 확인할 만큼 이 의식을 거르지 않는 무슬림의 모습이 주일 성수도 성실하게 지키지 못하는 허술한 크리스천인 나에게 숭고하게 느껴졌다.


에티하드 모니터로는 메카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10시간의 비행 동안 총 세 번의 기내식을 먹었다. 이코노미석 기준 beef/chicken/pasta 옵션이 있었는데 pasta는 비건 옵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행 중이기에 배에 가스가 찰 수 있는 고기보다는 채식으로 가볍게 식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기내식 파스타의 맛을 보장할 수가 없어 chicken을 선택했다. 여행 전 블로그 포스팅에서 에티하드 기내식은 무조건 치킨을 선택하라는 글을 자주 보았는데, 다들 나와 같은 포스팅을 읽으셨는지 근처의 한국인들은 모두 chicken을 주문하더라.


첫 번째 기내식

치킨과 매쉬드 포테이토, 크렘 당쥬로 추정되는 디저트까지... 도대체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에티하드 기내식이 맛있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샐러드부터 디저트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맛있었고, 크루들도 정말 친절하셨다.


엄마가 달지 않은 음료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brewed tea를 주문했다. 남은 brewed tea는 쏟지 않게 미니 페트병에 담아두었다.


식사를 마치면 크루들이 돌아다니며 간단한 음료를 주문받는데, 밀크티를 마시고 싶다면 brewed tea를 부탁하면 된다. brewed tea를 주문하면, 입이 델 정도로 뜨거운 티 한 잔과 손가락 한마디만 한 귀여운 우유, 설탕 스틱을 함께 주신다. 티를 홀짝홀짝 마시다 우유와 설탕을 넣어 달콤한 밀크티를 만들어 먹는 게 객실에서 누릴 수 있는 작고 쏠쏠한 재미 중 하나였다.


두 번째 기내식이었던 치밥.  진짜 너무 맛있었다. 향신료가 강하거나 기름지지도 않아서 이번 비행동안 기내식은 싹싹 비웠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아부다비는 아주 반짝였다.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피부처럼 입고있던 경량패딩을 벗었다.

10시간을 비행해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욕실로 들어갈 때처럼 덥고 습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 중동을 생각하면 사막의 전경부터 머리에 그려져서, 낮에는 덥고 건조하고 밤에는 춥고 건조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리고 아부다비 공항은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한낮처럼 밝고 활발했다. 문 닫은 매장 하나 없이 푸드 코트도 정상적으로 운영 중이었다. 화려한 아부다비의 야경과 바쁘게 사람들로 북적이는 아부다비 공항을 보면서,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중동 국가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거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부다비 공항은 금세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아 아쉽기는 하였으나, 쇼핑하는 구간과 탑승 게이트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고 표지판으로 길 안내가 잘 되어있다는 점은 분명한 장점이었다. 특히 엄마와 나처럼 이곳을 경유지로 들른 여행객들에게는 더욱이.


엄마에게 부탁한 낙타와의 기념사진. 비행기에서 쿨쿨자서 완전 개운한데 어딘가 아파보이는 이유는 입술이 다 지워졌기 때문. 이제 나도 화장하지 않으면 아파보이는 나이. 서글프다.


아부다비 공항을 들어서면, 아주 밝고 반짝반짝 빛나는 화려한 기념품 매장이 양옆으로 늘어져 있다. 여기를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여행객이 있을까? 거의 모든 기념품샵 매장 앞에는 실물 크기의 낙타 조각이 서있는데 이 낙타와 기념사진을 찍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샵에서는 각종 낙타 기념품(낙타 인형, 낙타 볼펜, 낙타 키링, 낙타 마그넷), 중동의 전경을 찍은 엽서, 향 제품, 마그넷, 스카프 등 악세서리, 지갑, 장식품 등을 판다.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맑은 눈의 낙타 인형이 내 마음에 들어와 버렸다. 한국으로 갈 때도 아부다비 공항을 경유하기에, 그때에도 이 낙타가 아른거린다면 데려가겠다 결심하며 엄마와 기념품 매장을 떠났다.


그리고 이제 내 가방에 걸려있는 낙타인형키링. 안 샀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인형 종류가 많아 한참 고민했는데, 결국 첫 눈에 들어왔던 이 친구로 결정했다. 엄마는 혹이 없어서 낙타같지 않다고는 했지만, 이 반짝이는 눈망울을 외면할 수 없었다.


3시간 대기로 예정되어 있던 경유 시간은 계속 늘어났다. 우리가 타야 하는 리스본행 비행기는 EY063이었는데, Departure time을 새로 알려주겠다는 안내방송과 gate 번호가 변경되었다는 안내방송만 계속 반복될 뿐. 01:35으로 예정되었던 boarding time은 4시까지 미뤄졌다. Operational problem이 있다는 것 외에는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정확하게 공지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지만, 3시간의 시간 동안 큰 목소리 내는 사람 없이 모든 승객이 gate에 앉아 기다리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로 인상 깊었다. 기약 없는 지연이 그럴 수 있다는 듯 언성 높이거나 화내는 이 없이. 잠시 눈을 붙이기도, 노트북을 꺼내 작업을 하기도, 책을 꺼내 읽기도, 카드 게임을 하기도 하면서 이 기다림을 저마다의 놀이로 채우는 풍경이 나에게 어색했다. 사실 화를 내거나 재촉한다고 당장 비행기가 짠하고 준비될 수 있는 게 아닌데. 오히려 이런 상황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말이다. 무언가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내가 조바심을 느끼고 답답함에 몸부림치는 이유는 어쩌면 뭐든지 빠르고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온 덕분에 누려온 편리함의 대가일지도 모르겠다.


전광판에 표시된 수많은 환승 게이트. 시시때때로 바뀌니 긴장을 놓으면 안된다.

게이트를 두 번 이동했다. 우리가 대기 중인 게이트는 다른 게이트와는 동떨어져 있었는데, 심지어 비행기 탑승구로 바로 연결되지도 않았다. 아마도 버스 같은 이동 수단이나 직접 걸어 비행기 앞까지 이동해야 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까지 내가 본 여행 브이로그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상황이라 긴장됐다. 창밖으로 비행기가 보이지 않으니, 나처럼 불안했는지 몇몇 아시안 승객은 나에게 와서 출발 게이트나 비행기 번호를 여쭤보기도 하셨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걱정되어 옳게 마킹한 OMR 답안지를 반복하여 확인하듯 에티하드 크루를 찾아갔다. '여기가 리스본으로 가는 EY063 비행기 게이트가 맞나요?'


제일 곤란한 상황은 어떤 중국인 승객분이 나에게 계속 질문을 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중국어를 모른다고 하니 본인은 영어를 못한다며 굳게 중국어로 도움을 요청하셔서 난처했고, 어디에 앉아 있든지 나를 쳐다보는 그분의 시선이 계속 느껴져 불편하기도 했다. 사실 그의 사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의 번역기가 들려준 상황으로는, 리스본에서 머물게 될 호텔의 직원이 그를 마중 나오기로 했는데, 비행기가 연착되어 스케줄에 변동이 생겨 호텔 직원에게 다시 연락을 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었다. 사연을 알고 나니 내가 도와줄 것은 더더욱 없었다. 나도 비행기가 언제 준비될지 모른 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승객 중 한 명일 뿐이니까.


"버스에 탑승하세요." 드디어 안내방송이 나왔다. 드디어 비행기를 타는구나. 이 버스가 우리를 리스본행 비행기로 데려다주겠구나. 눈이 반쯤 감긴 엄마를 데리고 게이트를 통과해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가 움직이지 않는다. 버스는 리스본행 비행기 승객으로 꽉 차 있는데, 기사님이 갑자기 내리셨다. 주변에서 저마다의 언어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나에게 지금 어떻게 된 상황이냐며 영어로 묻기 시작한다. 버스는 너무 춥고, 엄마도 조금씩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엄마, 우리 리스본에 갈 수 있겠지?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버스가 움직일까봐 타자마자 바로 카메라를 들어 찍었는데, 버스는 한참을 지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어떤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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