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꽉 채운 하루를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거의 내가 남긴 건 딱 두 가지였다.
1) 숙소 예약
2) 슬리핑 기차 예약
계획 없는 여행을 계획했으니 내 마음이 향하는대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당장 무엇을 하고 싶은지 떠올리지 못해 한참이나 침대에 누워있었다. 컨트롤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일상의 변화가 피곤하고, 붕 떠버리는 공백의 시간을 견디는 게 싫어 어떤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계획에 계획을 세웠던 INTJ로 살아온 나. 휴식에도 계획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무엇을 할까' 이 답 없는 고민을 종식시킨 건 배꼽시계였다. 아침부터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동안 굶주렸더니 배가 너무나 고팠다. 일단 나가야겠어. 달달한 밀크티를 마셔야겠어. 친구들이 방콕에서 1일 1타이티는 필수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일단 옷을 입고 무작정 호텔을 나와 걸었다.
태국에서만큼은 계획 없이 지내볼까?
순간순간 내 마음따라 결정하고, 발길 가는 대로 걸어보는 건 어떨까?
계획없는 하루.
그거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해서라도 이 낭만을 쟁취하기로 했다.
무작정 역을 향해 걸었다. 이럴 줄 알았지! 카페가 모여있다.
"Do you have Thai tea?"
친구가 분명 타이티를 마셔보라고 했는데, 온갖 종류의 밀크티는 다 있었지만 타이티라는 메뉴는 없었다.(안경 없는 맨눈이었기 때문에 메뉴판에서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 다분함.) brewed tea 종류도, milk tea 종류도 많았는데. 내가 찾는 타이티가 무엇일까 고민하다 직원에게 Thai tea가 있는지 물어보니 당도를 선택하라고 했다. medium level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사족없는 명료한 대화 후 등장한 나의 타이 티. 첫 입에 지금껏 나의 밀크티 인생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고, 매일 한 잔을 꼭 사먹어야 한다는 친구의 조언을 납득했다. 진한 황토색. 진하지만 쓰거나 거칠지 않고 부드럽게 달콤한 맛. 익숙하지만 새로운. 밀크티와 타이밀크티는 완전 다른 음료였다. 29년 인생에서 제일 맛있는 밀크티를 먹으며, "맛이 거기서 거기지"라며 웨이팅 긴 식당을 노룩패스하던 과거의 오만한 태도는 진즉 버렸다. 이 세계에는, 이 지구에는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무수한 맛이 있겠구나. 타이 밀크티를 통해 나의 세계는 넓어졌다.
그리고 난 태국 여행을 계획하는 친구에게 말한다. 태국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먹어야 할 게 타이티야. 매일 한 잔 이상을 마셔야 해. 매일 못 마시면 손해야. 잠들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
직장인 대부분은 투명비닐에 포장한 음식을 들고 출근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파는걸까. 사람들을 따라가보니 회사 앞에서 음식을 파는 노점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휘황찬란하게 팟타이를 볶는 길가의 셰프를 보며, 나도 저거 해보고 싶은데?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즉흥적으로 오늘 점심에 시작하는 쿠킹 클래스를 신청했다.
목적지가 없었기 때문에 발길 가는대로 아리역 주변 곳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도로를 바라보는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건너편 도보 사람을 구경하기도 하고, 태국 직장인 틈에 섞여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쭉 걸어보기도 했다.
내가 정처없이 걸을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영어 표지판이 적었기 때문이다. 방콕은 전세계 여행자가 가장 많이 찾는 도시라고 들었는데, 그렇다기엔 영어 없는 건물 간판이 대부분이었다. 뭐든 알아야하는 내 성격 상 답답하기도 하였으나, 이 언어의 차단이 주는 분명하고 가뿐한 자유로움에 금세 적응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누릴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뚜벅뚜벅 걷다 마주친 건물을 보며 여기는 어떤 곳일까 그려보기. 거리의 행인을 따라 아무 식당에 들어가보기. 그렇게 나만의 방콕 지도를 적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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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인데 10분 즈음 걷자 온 몸이 젖어가고 인중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게 느껴졌다. 보홀 여행 후 피부를 더 이상 태울 수 없다고 결심한 나는 외출할 때면 위아래로 SPF가 차단되는 바람막이와 조거팬츠를 부적처럼 입었는데, 햇빛 아래의 나는 마치 만두가 된 기분이었다.
오늘 내 곁의 다정한 사람들
쿠킹클래스 미팅 장소인 화이쾅역은 호텔에서 40분 거리다. 미팅 시간 5분 후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지체없이 출발한다는 말에 절대 늦지 않으려고 한시간 반 전에 출발했지만, 3분 뒤에 온다는 74번 버스는 3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이대로는 늦을 것 같아 볼트를 잡으려고 했는데, 차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꽉 차있는 도로 상황을 보니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에게만 더 물어보자는 마음으로 정류장에 계신 아저씨께 화이쾅까지 가는 제일 좋은 방법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내 자초지종을 들은 아저씨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MRT로 환승한다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나와 함께 버스를 타주셨다. 심지어 버스비도 내주시고, 정류장에서 MRT 역까지 가는 길도 구글 맵을 보여주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알려주셨다.
사실 정류장에서도 많은 분의 도움이 있었다. 영어를 못 한다고 하시면서도, 내 목소리를 듣고 그냥 지나치시는 분은 없었다. 결국 내 주변으로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태국어로 각기 길을 설명해주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 분들에게 ‘스쳐지나가는 사람1’일 뿐인데도. 가던 길을 멈추고, 기꺼이 누군가를 도와주는 방콕 시민들께 감동을 제대로 받은 나는, 이미 하루를 풍족하게 잘 보낸 느낌이었다.
문득 아부다비 공항에서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봤던 중국인 승객에게, 중국어를 못한다고 미안하다고 건조하게 대답하며 지나갔던 내 모습이 겹쳐져 부끄러웠다. 앞으로는 용기내어 도움을 청한 누군가에게 야박하게 굴지 말아야지.
정확히 13:30. 화이쾅역 도착.
쿠킹클래스는 화이쾅 역에서 만나 시장에서 태국 음식에 사용되는 식재료를 구경하며 시작한다. 나를 포함해 8명의 학생이 모였고, 나는 유일한 나혼자 여행자였다.
시장 구경이 끝나면 툭툭이를 타고 쿠킹하우스로 이동한다. 동행없는 나는 선생님과 함께!
(*장보기 비용과 툭툭이 비용은 쿠킹클래스 가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리 순서: 똠얌꿍 --> 팟타이 --> 그린커리 --> 망고 라이스
세팅되어 있는 재료를 직접 손질해보고, 입맛과 취향에 따라 준비된 개인 접시에 재료를 예쁘게 담아보기.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는데 총 네 가지의 요리를 배우고, 요리 하나가 끝날 때마다 단체 테이블에서 함께 식사한다. 두 명이서 함께 재료를 손질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홍콩에서 오신 마담과 함께했다. 조카가 대전에서 직장을 다닌다고 했는데, 방콕에서 나의 도시 대전이 언급돼 영광스러웠다.
배부른 소식좌들을 위해 음식 박스를 준비해주신다.
그린커리를 싹싹 비운 후, 망고 라이스를 박스에 포장해 나왔다.
마담들께서 함께 사진을 남기자고 하셔서 기쁘게 남긴 단체사진!
지금까지 내가 알아왔던 모습이 내가 아니라면??
지난 2일 동안 카메라만 있으면 세 시간 정도는 거뜬하게 걸어다니고, 갑자기 내리는 비쯤이야 쿨하게 맞아주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또 나에 관한 새로운 몇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내가 불편한 건 더위가 아니라 눈부시게 밝은 햇빛이고,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건 축축하고 더운 몸이 아니라 모기 소리고, 내가 힘겹게 느껴왔던 건 오래 걷는 일정이 아니라 무거운 가방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모기도 없고 햇빛도 없으면 가벼운 몸으로 땀 흘리고 비 맞으며 얼마든지 잘 걸어다닐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지금까지 구체적인 이유없이 동남아를 여행지에서 제외했던 방식으로 내 인생에서 막연하게 싫어하고 거절해 온 것이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내가 도망쳐온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대체적으로 옷, 화장품, 악세서리 상점이 모여있는 우리나라 지하상가와 달리, 간식부터 간단한 식사류를 파는 가게가 많은 방콕의 지하상가. 통로 한 가운데 식사할 수 있는 긴 테이블이 쭉 이어진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방콕도 1인 가구가 많아지고 있을까? 퇴근길 음식을 포장하는 사람, 지하상가의 단체 테이블에서 저녁을 해결하는 사람을 보면서.. 또 길거리 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해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삶은 어떠하려나. 얼굴을 폭 묻고 숨을 깊이 들이쉬면 보송하고 은은한 향이 느껴지는 침대와 제철 식재료 서너가지는 늘 구비한 냉장고가 있는 집, 늦잠자고 일어난 어느 주말에는 Bruno major 들으며 하겐다즈 벨지안 초콜릿 하나 느긋하게 퍼먹을 여유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호텔에 도착하니 저녁 7시 30분. 30분 거리를 구경하며 온다고 2시간 30분을 돌아온 내 몸은 침대가 간절했으나, 어디선가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오늘 하루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수영을 해야만 해.
수경 없이는 눈뜰 수 없을 정도로 비가 내렸지만 두 눈으로 흘러들어오는 빗물을 그대로 맞으며 배영을 했다. 수영장 옆 baby bar에서는 라이브 공연이 시작됐는데 물 속에서도 노래가 들렸다.
호텔 바에서는 라이브 공연을 하고있고
바로 옆 수영장에서 비 맞으며 수영하는 나
가뿐하게 자유롭다.
수영장 마감 후에는 따뜻한 물로 재빨리 샤워를 마친 후 라이브바로 튀쳐나와 레몬 음료를 주문했다. 비는 점점 잦아들고 비가 몰고 온 바람이 적당히 시원하게 불었다. 손님이 하나 둘 떠났지만, 난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글도 쓰고 사진도 편집(하면서 근사하고 멋진 사람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결국은 모든 걸 중단하고 노래에 몰입하게 됐지만.
행복에 취한다는 건 딱 지금을 두고 하는 말일까? 어떻게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발끝부터 머리까지, 나의 아주 깊은 곳부터 턱 끝까지 질식할 정도로 차오르는 이 행복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누구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고, 누구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후회스럽기도 했다. 계획적인 게 좋은 것이라고 굳게 믿은 채, 휴식조차 정해진 리스트를 수행해야만 제대로 쉬었다고 생각했다니. 한 번쯤은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아무런 편견 없이 소심한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봐야지.
어쩌면 난 이런 사람이 아닐까? 사실 난 건조한 인간이 아니라, 마음껏 표현하고 마음 가득 느끼는 걸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인거야.
이러한 종류의 일기를 적고,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다른 방향의 나를 상상해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 아마데우 프라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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