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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피스 Mar 26. 2020

잘못된 만남

성장기

 “미진아, 네가 어떻게 이런 데서 사니, 엄마랑 같이 돌아가자”


신혼집에 온 외할머니는 엄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외할머니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나 때문이었다.

     

엄마는 7남매 중 다섯째로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은행장을 지낸 지역 유지였다. 엄마는 오빠들보다 머리가 영특하고 자존심도 셌다. 공부를 잘해서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도맡아 하고 그 시절 명문인 전남여고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앞두고 시련이 닥쳤다. 엄마는 서울의 명문여대 진학을 당연히 생각했으나, 외할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외할아버지는 아들만 귀하게 여길뿐 딸은 별로 안중에 없었다. 그런 그가 엄마를 서울로 유학을 보낼 리가 없었다. 엄마는 부모의 반대로 학비가 거의 안 드는 광주교대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를 완전히 손에서 놨다. 아무리 공부해 봐야 여자는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적당히 친구들과 술 마시고 놀고 대학 졸업 후 초등학교 선생이나 좀 하다가 부잣집 출신의 똑똑한 남자에게 시집갈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나의 아버지는 그런 엄마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아버지는 경기 여주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 할아버지는 상당한 땅과 선산을 보유한 양반집 둘째 아들이었다. 불행히도 그는 도박으로 본인의 몫으로 미리 받은 집과 땅을 모두 날리고 집안 살림은 내팽개쳤다. 그래서 할머니가 젊을 때부터 이불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꾸렸다. 


아버지는 바로 밑에 동생과 열 살 터울이고 막내 동생과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니 실질적으로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어려운 형편과 상관없이 장남을 공부시키기 위해 유복한 큰집으로 아버지를 유학 보냈다. 


아버지는 큰어머니의 구박으로 눈칫밥을 먹고 어린 나이에 물지게를 나르면서 머슴처럼 생활했다. 그는 본인을 뒷바라지하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고된 일을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 당시 명문인 대전중학교로 진학했다, 


아버지는 큰집에서의 생활을 견디기 어려웠다. 또 본인만 공부하겠다고 고향에 있는 나이 어린 동생들과 홀로 있는 어머니를 계속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대전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집 가까운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아버지는 공부를 잘해서 판검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집안 형편상 이는 불가능했다. 그는 일찍 군대를 다녀왔고, 당시 독일에 파견되는 광부로 지원해 생계를 책임지려 했다. 하지만 독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응시한 검찰공무원 임용시험에 100대 1에 가까운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여 한국에 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부잣집의 판검사에게 시집을 가고 싶던 어머니는 어떻게 나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두 분을 이어준 중매쟁이의 농간 덕분이었다. 


수완 좋은 중매쟁이는 먼저, 남자 측에 저 여자와 결혼하면 아들을 낳는데 아들이 보통 훌륭한 게 아니라고 허풍을 쳤다. 또한, 여자 측에는 남자가 명문대를 나온 부잣집 아들로 사법시험 2차에서 아깝게 떨어졌는데, 잠시 검찰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곧 사법시험에 합격할 거라고 과장을 섞었다.


이런 중매쟁이의 노력 덕에, 두 사람은 광주의 어느 다방에서 맞선을 봤다. 훗날 내가 두 분이 어떻게 결혼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선을 보고 나서 아버지에게 싫다고 했는데 계속 따라와서 만나게 됐다고 했다. 


그 말을 듣던 아버지는 웃으며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다만 엄마가 훌륭한 아들을 둘 사주라는 말만 믿었을 뿐 엄마의 인물은 별로 볼 게 없었다고 해 엄마의 반발을 샀다.

 

엄마의 고등학생 시절 사진을 보니 아버지의 말이 사실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사진 속 엄마는 치마를 입고 단발머리를 했을 뿐 남자인 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성격도 활달하고 술도 잘 마셔 당시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과 친구로 잘 지냈다. 


반면 아버지의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그는 깜짝 놀랄 정도의 미남이었다. 윤이 나는 하얀 피부에 오뚝한 코, 시원한 눈과 짙은 눈썹의 얼굴이 마치 영화배우 같았다. 그 시절에 키도 175였으니 엄마와 같이 길을 걸으면 다른 남자들보다 머리가 하나 더 위에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중매쟁이의 말과 아버지의 외모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을 그만두고 아버지와 결혼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시댁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때 엄마는 서울에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지금 월계동은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고 학원가가 성행하는 곳이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친할머니 댁에 가면 허름한 집에 마당에서 간이펌프로 지하수를 길어 식수로 사용했고, 빨래는 집 옆 우물가에서 했다. 그런데, 엄마가 처음 시댁을 봤을 때는 허허벌판에 살았다고 했다. 


엄마는 시댁에 처음 간 날 자신이 중매쟁이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고, 결혼을 물리고 싶었다. 결혼식을 위해 서울에 올라온 외할머니도 엄마에게 결혼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엄마는 결혼 전 이미 나를 임신하고 있었다. 당시의 여자에게는 결혼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둘의 잘못된 만남이 나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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