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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피스 Mar 26. 2020

한(恨)

성장기

          

“아들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당장 나가라”


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들은 말이었다. 나는 엄마 옆에 누워 할머니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울고 있었다.


부모님은 2월에 결혼식을 했는데, 나는 그해 9월에 태어났다. 나는 어렸을 때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 년을 즐겨 봤는데, 엄마는 드라마에 나오는 한명회를 보며 나도 그와 똑같은 ‘칠삭둥이’라고 했다. 


엄마는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 결혼 첫날부터 시댁에서 밥을 먹는데 돈이 없어 고춧가루도 넣지 않은 허연 콩나물국만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평생 콩나물국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신혼살림은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엄마는 시골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다. 입덧이 심해 거동하기도 불편했다. 좁은 방에서 헛구역질을 하다 더우면 집에 선풍기도 없어 집 밖으로 나가 쓰레받기로 바람을 부치며 남편을 기다렸다. 


연애할 때는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며 절에 마련된 방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남편은 결혼을 하니 공부는 안 하고 직장을 다녔다. 부잣집에 명문대를 졸업한 미래의 판검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해 9월 출산할 때가 되어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검사를 받아보니 아이가 머리가 너무 커서 자연분만을 하면 위험하다고 했다. 제왕절개를 하면 병원비가 몇 배는 더 비싸 당시 아버지 월급의 몇 개월 치를 지불해야 했다. 


그만한 병원비가 없어 곤궁한 처지였는데 마침 저렴한 시립병원에 자리가 생겨 입원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겨우 월급을 가불해 입원비용을 마련했다.  


엄마는 나를 낳기 위해 배를 갈랐다. 나중에 엄마의 수술 자국을 본 적이 있다. 배꼽 아래로 길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내 동생을 낳으러 다음 해에 갔더니 첫 애를 제왕 절개했으면 둘째도 자연분만이 안된다고 해 내 동생을 낳을 때도 배를 갈랐다고 했다. 그래도 내 동생을 낳을 때는 돈을 모으고 형편이 나아져서 사립병원을 갈 수 있었다.

 

엄마가 나를 출산하자, 그 소식을 듣고 외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왔다. 외할머니는 귀한 딸이 허름한 병원에 독방도 아니고 여러 명과 같은 방을 쓰며 입원해 있는 게 안쓰러웠다. 


그래서 결혼식 후 다시 만난 친할머니에게 별로 뜻 없이 자기 사는 얘기며 딸이 고생한다는 얘기를 했다. 사실 나는 이제 갓 태어났으니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어쨌든 아마 부자였던 외할머니가 한 말에, 친할머니는 아들을 둔 엄마의 우월감과 부자에 대한 열등감이 더해져 화가 폭발했다. 친할머니는 엄마가 수술 후 누운 채 나를 안고 있는 병실에 들어와 소리를 질렀다.


“애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너 당장 나가, 다 필요 없으니 지금 당장 나가라고”


엄마는 자신과 남편의 꿈을 이루어 줄 아들을 낳고 누워 있는데 갑자기 시어머니가 들어와 자신을 쫓아내려 하니 혼란스러웠다. 자신도 이 집에 시집오기 싫었으나 어쩔 수 없이 임신한 아이 때문에 지금까지 버텼는데, 정작 시어머니가 나가라고 하자 억울했다.


 ‘나가면 내가 나가지, 당신이 뭔데’ 하는 마음에 화도 났다. 하지만 당시 아이를 가진 유부녀가 이혼해서 사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엄마는 시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갓 태어난 나를 안고 울기만 했다. 


엄마는 이때의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그녀에겐 이런 가난한 집에 시집온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아들을 낳았는데도 당장 나가라는 시어머니의 말은 평생 한으로 남았다. 내가 커가면서 엄마는 나를 출산했을 때 당한 이 일을 반복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직접 보지도 못했지만 마치 내가 겪을 일인 양 생생히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엄마가 한을 갚는 길은 내가 잘 돼서 자신을 쫓으려 했던 시댁과 자신을 버렸던 친정에 보란 듯이 아들을 자랑하는 일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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