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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피스 Mar 26. 2020

주문(呪文)

성장기

       

나는 1982년 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물론, 내가 다닐 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나는 입학식 날 혼자 갈 수 없어 친할머니와 같이 월계초등학교에 갔다. 학교 가는 길 육교 위에서 학교 운동장을 보니 벌써 아이들이 줄을 서 있고, 입학식이 진행 중이었다. 나와 할머니는 급하게 육교 계단을 내려갔다.


다음 해인 2학년 2학기에 엄마가 근무하던 잠신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엄마는 아무도 없는 집에 애를 두느니 아예 학교에 데리고 다니기로 한 것이다. 월계동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버스를 갈아타며 잠실까지 매일 다니기는 어려웠다. 얼마 후 우리 집에 자가용이 생겼다. 현대자동차의 포니원이었다.

 

잠신초등학교는 아파트에 둘러 쌓여있었다. 흰색의 고층 건물은 새로운 문물이라 그런지 우리 집보다 좋아 보였다. 난 그 이후로 아파트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가 생겼다. 왠지 그곳 아이들은 잘 살아서 그런지 나를 잘 끼워주지 않는 것 같았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엄마가 왕십리로 전근 가게 되었다. 나도 엄마를 따라 전학 갔다. 우리는 엄마가 잠실 지역 학교로 옮길 줄 알고 잠실 근처의 주택으로 이사한 터였다. 나는 가까운 학교를 두고 또다시 멀리 떨어진 왕십리초등학교로 엄마와 같이 다니게 되었다.


새로 간 학교는 잠실과 달리 아파트가 없었다. 아이들은 산 뒤에 형성된 달동네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달동네 중턱에는 큰 불상이 있어 학교를 굽어보고 있었다. 왠지 아파트 출신들과 달리 학교 아이들이 나에게 훨씬 친절히 대해 주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 아들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받아보지 못한 대접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나를 선생님 아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가끔 심부름 가면 다른 반 선생님도 ‘아, 네가 2학년 1반 선생님 아들이구나’하면서 내 볼을 두드려 주었다. 나는 왠지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학교 생활에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전학생임에도 다른 아이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학급 임원선거에 나가고, 선생님이 시키면 발표도 나서서 하는 등 요즘 말로 ‘인싸’가 되었다. 학교에는 농구부가 있었는데, 나는 가끔 선생님 아들이라는 이유로 연습에도 참여해 같이 슛도 던졌다.


어느덧 3학년 겨울이 되었다. 당시에는 날이 추워지면 학급 중앙에 난로를 설치하고, 불을 땠다.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조개탄을 학교 창고에서 받아왔는데 그날은 내가 당번이었다. 


나는 3학년 2반이라고 적힌 양동이를 들고 학교 창고로 갔다. 이미 다른 반 아이들이 많이 있었고, 각자 가져온 양동이를 창고 아저씨 앞에 줄지어 놓고 있었다. 나도 다른 아이들과 얘기하면서 내 순번을 기다렸다.


내 차례가 되었다. 아저씨는 나에게 조개탄을 담은 양동이를 내밀었다. 그런데, 우리 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안 가져간다고 했더니, 아저씨는 그냥 다 똑같은 것이니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뒤에 기다리는 아이들도 많고 어차피 양동이는 다 비슷하게 생겼으니 그냥 아저씨가 주는 대로 받아다 반으로 가져왔다.


얼마 후 담임선생님이 조개탄을 난로에 집어넣다 누가 오늘 당번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주춤거리며 손을 들자, 왜 다른 반 양동이를 가져왔냐며 당장 우리 반 걸 찾아오라고 화를 했다. 나는 두려워 다시 창고로 갔지만 이미 문이 닫혀 있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선생님이 무서워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다른 반으로 우리 반 것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양동이는 다 비슷비슷하고, 한 학년에 15개 반씩 있는데 그 반을 다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울면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학교를 돌아다녔다.


나는 우리 반 양동이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됐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학년이 끝나고 마지막 날 성적표를 받았다. 선생님 의견란에 의례적으로 쓰는 말에 덧붙여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이 학생은 끝맺음이 불분명하다.”


성적표를 받아본 엄마는 분개했다. 동료 교사 아들이고, 평생 기록이 남는데 성적표에 부정적인 말을 썼다는 이유였다. 나는 선생님이 왜 이런 말을 썼을까 궁금했다가 양동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몹시 억울했다.


나는 그 이후 콤플렉스가 생겼다. ‘너는 끝맺음이 불분명한 아이야’ 하고 마치 누가 마법을 거는 것 같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도 시험 전날만 되면 긴장감에 종종 공부가 하기 싫어졌는데, 그럴 때마다 ‘거봐, 결국 그 말이 맞잖아’하고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어른이 되어서도 일의 마무리를 해야 할 시점이 되면 그 성적표가 생각나며 긴장되었다. 선생님의 그 말은 마치 주문처럼 나를 꽤 오랫동안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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