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
5학년이 되자 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나도 고학년이 된 만큼 방과 후 혼자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학원 가는 길에 나는 항상 학교 앞 문방구에 들렸다. 그 앞에 각종 오락 기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50원을 넣고 손오공이 되어 대마왕을 만날 때까지 싸우고, 전투기를 조종하며 적의 항공모함을 공격했다. 버튼을 긁어대며 총을 쏘고 주먹을 휘두르느라 내 오른손 엄지손톱은 항상 닳아 있었다.
한참 오락을 하고 학원 가는 길에는 시장이 있었다. 시장에 들어서면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아저씨가 즉석에서 굽는 군만두 때문이었다. 갓 구운 만두를 간장에 찍어 먹으면 맛이 그만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100원에 3개 하는 만두를 사 먹었다. 오락에 정신이 팔려 동전을 다 써버려도 만두 가게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먹는 걸 멍하니 구경하고 있으면 인심 좋은 아저씨는 나에게 군만두를 하나씩 주기도 하셨다.
그렇게 오락 기계와 군만두를 통과해서 시장 안쪽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선생님은 내가 피아노를 치면 옆에서 노래를 즐겨 부르셨다. 그런데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내 오른쪽 옆구리가 점점 간지러워졌다. 그러다 후렴구가 되어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이면 나는 너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참다못해 피아노를 치다 말고 옆으로 쓰러져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선생님은 영문을 몰라 당황하셨다. 내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자 신기해하시며 일부러 더 크게 노래를 불러 나를 괴롭혔다.
나는 혼자 미술학원도 다녔다. 미술학원에서는 가끔 소풍을 갔다. 여의도 광장도 가고, 석촌호수에도 같이 놀러 갔다. 학원 선생님은 여름 방학에 양평에 있는 선생님 집에 1박 2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부모님과 떨어져 밖에서 자본 적이 없기에 두려웠다. 그러나, 양평 가는 길에 처음 타 본 기차는 신기했다. 특히 대학생 형들이 기차 안에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게 좋아 보였다.
기차에서 내려 용문산에 올라갔다가 선생님 부모님이 하는 약국으로 갔다. 거기서 저녁으로 해주신 닭볶음탕을 먹고 약국에 딸린 방에서 친구들과 같이 잤다. 아침에 일어나 북한강의 안개로 온 사방이 자욱한 길을 지나 시골 학교를 구경했다.
나는 학교에서도 즐겁게 지냈다. 발표도 적극적으로 하고, 장기자랑이 있으면 앞에 나가 노래도 맘껏 불렀다. 엄마와 함께 다니는 학교는 집보다도 편했다. 마침 5학년 담임선생님은 4학년 때와 달리 아이들을 때리지도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 꽃도 사다 드리고, 심부름도 열심히 했다. 담임선생님은 그런 내가 귀여우셨는지 여름 방학 때 직접 편지를 써서 보내주기도 하셨다.
어느덧 5학년을 마치고 6학년이 되었다.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과 달리 나는 아직도 어린애에 불과했다. 하루는 과학경시대회에 선발되어 학교 대표로 광릉 수목원에 갔다. 견학 후 점심때가 되어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싸준 볶음밥을 먹는데 눈물이 나왔다. 그냥 엄마가 같이 없는 게 서러워서 울었다.
나는 6학년임에도 학교에서 철없이 굴었다. 그때 내 짝은 유정화라는 여학생이었다. 정화는 동그란 얼굴에 안경을 쓰고 단발머리를 했다. 또 성악을 하듯 노래를 불러 가수 이선희 같았다. 짝인 정화는 내가 발표할 때 실수하면 옆에서 속삭이며 정답을 알려주었다. 내가 준비물을 안 가져오면 어디선가 구해 와 나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나는 그저 장난만 쳤다. 그 애가 줄넘기 놀이를 하면 줄을 끊고 도망가고, 공기 잡기를 하면 손을 저어 방해하곤 했다. 정화는 안경 너머로 나를 잠시 째려보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을 뿐 화 한번 내지 않았다. 정화는 항상 차분했고, 생각도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나는 어느새 정화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6학년이 마무리되어 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쉬는 시간에 정화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주저해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윽고 수업이 끝나서 나는 책가방을 정리해 나가려 했다. 그때 뒤에서 정화가 나를 불렀다. 내가 돌아보니 그 애는 편지봉투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게 뭐야”
“그냥 아무도 없을 때 읽어봐”
정화는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보라색 편지봉투를 손에 쥐고 학교 건물 뒤편 공터로 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봉투에서 곱게 접힌 편지를 꺼냈다.
'창밖에는 귀뚜라미가 울고 있고 나는 밤에 혼자 앉아 네 생각을 해'
편지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이게 좋은 건지, 화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편지를 읽다 말고 편지지를 북북 찢어 근처 쓰레기장에 버렸다.
그 후 다음 날부터 나는 정화에게 못되게 굴었다. 그 애에게 차갑게 말하고 대놓고 무시하기도 했다. 정화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다 내가 계속 그렇게 대하자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나는 정화에게 별로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랬다. 나는 몸만 6학년이지 그저 어린애였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내가 그때 얼마나 바보같이 굴었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좋은 친구를 잃어버린 뒤였다. 나는 그렇게 철부지인 채로 6학년을 마치고 초등학교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