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
고등학생 시절, 그 아이
그냥.. 자꾸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우리 학교는 매주 목요일이면 전교 임원 회의를 하였다.
뭐 늘 그렇듯 전교 회장이 회의를 진행하고 각 반의 반장들과 회장들은 안건에 대해 의견을 내는 등 토의를 했다.
그렇게 매주 만나도 그렇게 친하거나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회의만 빠르게 끝내고 집에 가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수능이 끝나고 전교의 2학년, 3학년 각 반 간부들끼리 수련회를 가기로 결정이 되었다.
수능 보느라 고생했다는, 고3을 위한 학교의 배려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놀지도 않았던 고등학교 생활이었기 때문에, 그 수련회는 그다지 고맙지도 귀찮지도 않았다. 가라니까 가는 정도..
전교 임원들, 각 반의 반장과 회장들의 모임이라 그런가, 수련회는 요란하지 않았다.
낮에는 인근 관광지를 구경하고 밤에는 수다를 떨다가 각자 방에 돌아가서 잤다.
매주 만나던 사이였지만 수련회에서야 비로소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와중, 한 아이가 자꾸 눈이 마주쳤다.
매주 회의때 봐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 아이는 밝은 갈색 머리에 흰 얼굴, 쌍꺼풀이 있는 큰 눈, 나보다 살짝 큰 키에 말이 없는 타입이었다.
그 아이와 대화는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자꾸 눈이 마주쳤다.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니 2학년이라고 했다.
아.. 2학년이구나.
그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를 했다.
나는, ‘내가 선배니까 선배답게 인사를 받아야지.’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매번 그 아이를 따라 목례했다.
묘한 기분의 간부 수련회에서 돌아와, 그때 찍은 사진들을 받아보았다.
삼삼오오 찍은 사진 속 늘 그 아이가 있었다. 자꾸 그 아이가 신경 쓰이는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마이마이에서는 이원진의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가 흘러나왔다.
네가 아침에 눈을 떠 처음 생각나는 사람이 언제나 나였으면, 내가 늘 그렇듯이
좋은 것을 대할 때면 함께 나누고픈 사람도 그 역시 나였으면 너도 떠날 테지만.
그래, 알고 있어. 지금 너에게 사랑은 피해야 할 두려움이란 걸.
불안한 듯 넌 물었지. 사랑이 짙어지면 슬픔이 되는 걸 아느냐고.
하지만 넌 모른 거야. 뜻 모를 그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는걸
네가 힘들어 지칠 때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바로 내가 됐으면. 내가 늘 그렇듯이.
너의 실수도 따뜻이 안아줄 거라 믿는 사람. 바로 내가 됐으면. 너도 떠날 테지만
이제는 걱정하지 마. 한땐 나도 너만큼 두려워한 적도 많았으니
조금씩 너를 보여줘. 숨기려 하지 말고. 내가 가까이 설 수 있도록.
엉뚱하게도 이 노래 가사가,
그 아이가 내게 해주는 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아이의 이름도 모르고 2학년 몇 반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아이가 생각이 났고,
이 노래만 들었다.
그렇게 졸업식이 되었다.
졸업을 축하해 주기 위해 가족들까지 많이 오셔서 교실은 북적북적 정신이 없었다.
깔깔거리며 친구들끼리 사진을 찍고, 서로 잘 살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는 와중에 친구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야. 복도에 누가 찾아왔어.”
“누구?”
“몰라. 다른 반 애 같은데.”
복도에 나가자 그 아이가 있었다.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놀람을 감출 수 없었지만, 놀람을 감추려 안간힘 썼다.
난 또다시, 선배다워야 한다는 생각에
“야. 고맙다.”라며 멋진 표정을 지어 보이려 했다.
그 아이는 별다른 말 없이 장미꽃만 건네주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얼떨떨하게 교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교실 속에서, 나 혼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장미꽃이라니.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선배다운 척하지 말걸.
내일부터 못 보는데 조금 더 일찍 표현해 주지.
대학에 가면 고등학교 생활은 완전히 잊힐 텐데.
사진 찍자고 팔을 잡아끄는 친구들의 성화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고, 취직을 하였으며, 중년이 되었다.
지금도 이원진의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를 들을 때면 그 아이 생각이 난다.
장미꽃 한 송이라니.
고등학생 용돈으로 비싼 꽃을 사려니 한송이 겨우 샀겠네.
꽃을 주기 위해 굉장히 용기를 냈겠다.
그 아이도, 그때의 나만큼이나 나를 생각했나 보다.
음악은 타임머신 같다.
이원진의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는 고3 졸업식으로 나를 데려다준다.
졸업식날의 시끌벅적한 주변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수줍게 장미꽃을 건네던 그 아이와 당황하던 내 모습이 느낌으로 생생히 기억난다.
그 아이도 중년이 되어 잘 살고 있겠지.
그 아이도 가끔 그날 생각이 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