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골목
3. 골목
“이 담배만 마저 피우고 가는 거다.” 그가 말했다.
간밤에 또 남편 꿈을 꿨다.
우리는 그 골목의 계단에 앉아있었다.
그때 우리는 둘 다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옆구리엔 두툼한 유인물(그땐 그렇게 불렀다) 덩어리를 끼고 있었다.
각자 맡은 동네 집집마다 유인물을 모두 던져넣는 것이 그날 밤 우리의 일이었다.
유인물 배포가 있는 날엔 몹시 두려워서 아침부터 손끝이 차가워지고 배가 아팠다. 몇 차례 화장실을 들락거려도 배앓이는 가라앉지 않았다.
골목길이 늘 무서웠다. 한적한 동네의 골목길은 대낮에도 어딘가 서늘한 기분이 들어서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망설여졌다. 해가 지면 골목길은 더 무서웠다. 수상쩍은 어둠이 골목과 큰길을 나누었다. 밤에는 낯선 동네의 골목 어귀를 선뜻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난한 우리 집은 골목의 끝에서 시작되는 언덕배기 맨 꼭대기에 있었다. 지금은 그 동네는 모두 사라지고 큰 길이 났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사람들은 내가 사는 동네를 ‘유달리’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집회를 마치고 막차를 타고 돌아온 그날, 너무 늦어서 있는 돈을 모두 털어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택시 기사에게 집의 위치를 설명했다.
“아, 유달리!”라고 택시 기사가 중얼거렸다.
유달리. 우리 동네를 부르는 이름이 달리 있었구나.
우리 동네 사람은 누구도 그 동네를 ‘유달리’라로 부르지 않았다.
‘유달리’는 바깥사람들이 우리 동네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유달리, 유달리 사람들.
유달리 평지 골목을 돌고 가파른 언덕길을 한참 올라야 언덕배기에 우리집이 나온다.
언덕을 오르는 가파른 길은 여름엔 괜찮았지만 눈이 오는 겨울엔 상황이 달랐다.
간밤에 눈이 와서 얼어붙기라도 하는 날엔 학교 가는 길은 거의 공포였다. 남자아이들은 주루룩 잘도 미끄러져 내려갔다. 겁이 많은 나는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이 오면 언덕길 아래에서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몇 번을 부르면 엄마가 허물어져 가는 담장 위로 고개를 내민다. 내가 부르는 소리를 언덕 꼭대기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엄마는 양손에 허연 연탄재 두 개를 들고 탁탁 길에 부수며 내려왔다. 엄마 손을 잡고 마치 징검다리 건너 듯 연탄재가 깔린 곳을 골라서 밟으며 언덕길을 올라가곤 했다.
가장 좁은 골목길 끄트머리 언덕에 사는 나는 늘 골목길이 무서웠다. 밤늦게 모임이 파하고 집으로 갈 때마다 모임의 누구라도 붙잡고 데려다 줄 것을 호소했다. 대개는 남편이 나를 데려다줬다. 나의 집은 K 대학교 후문 쪽에 있었고 남편은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골목에서 우리는 가끔 마지막 남은 담배를 나누어 피웠다. 서로 한 모금씩 나누어 피면서 짧게 타들어 가는 담배를 아쉽게 바라봤다. 마지막 남은 담배를 다 태우고 꽁초를 발로 밟으며 그는 일어났다. 나는 항상 일어나기 싫어서 뭉그적거리며 겨우 일어나곤 했다. 그리곤 서로 손을 한번 흔들고 휙 돌아서 제 갈 길로 갔다. 그때 우리는 써클 친구였지 연인은 아니었다. 아닐지도 몰랐다. 흔한 말로 친구와 연인의 그 어느 중간일 수도 있었다. 사랑한다고, 사귀자고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가끔 생각했었다. 내가 결혼한다면 얘랑 하게 될 것이라고.
어젯밤 꿈에 우리는 동네 집집마다 유인물을 던져 넣어야 했다. 늘 그렇듯이 두려움과 긴장감에 온몸의 힘이 빠졌다.
대문 사이로 유인물을 밀어 넣었다. 갑자기 어느 집에서 개가 짖기 시작했다. 한 마리의 개가 짖기 시작하면 온 동네의 개가 다 짖었다. 너무 놀라서 한걸음에 골목을 뛰어 내려왔다. 다시 그 골목으로 들어설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남은 유인물을 털어야 했다. 가방에 넣어 다니다가 불심 검문에라도 걸리면 끝장이 날 것이지만 골목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선은 가방에 대충 구겨 넣고 낯선 동네를 빠져나왔다.
내가 사는 동네 어귀까지 같이 걸어온 우리는 골목의 계단에 앉아서 마지막 담배를 나누어 피웠다. 늘 헤어지던 그 계단이었다. 어둠 속에서 담배가 빨갛게 타들어 갔다. 그가 힘껏 담배를 빨아들이면 빠지직 소리를 내며 불꽃이 더욱더 빨갛게 타 올랐다. 불꽃이 타 오를 때마다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있었지만 눈 코 입을 찾을 수 없었다.고개를 숙인 채, 헝클어진 긴 머리가 이마 전체를 다 덮고 코가 있어야 할 부분까지 떨어졌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검은 동굴같았다. 목이 아파 왔다. 자꾸만 목구멍 저 안이 따갑게 아프고 목이 메었다.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몸을 뒤척이다가 깨어났다. 꿈이었다. 손끝에 닿을 듯 닿을 듯 잡으려던 것을 놓쳐버린 허탈한 마음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