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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례온 Aug 27. 2022

책 <자살에 대하여: 죽음을 생각하는 철학자의 오후>

by. 사이먼 크리츨리

출처: Notes on Suicide


또한 살아 있는 사람들을 기이하게 매혹하며 나를 포함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외설적이라고 할 만한 매력이 있다.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Kay Redfield Jamison)은 "자살의 상세한 사실들은 우리의 상상을 어두운 방식으로 끌어당긴다"라고 말했다. 자살은 전혀 건전하지 않지만 주의 깊은 관심을 받을 만한 현상이다. (p. 14)


자살은 다소 신과 같다. 누군가 나에게 "신을 믿으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항상 "어느 신이요? 신은 아주 많잖아요."라고 대답하고 싶어 진다. 적어도 우리는 자살이라는 주제 아래 함께 묶이는 현상을 서술할 더 섬세하고 다양하며 폭넓은 개념이 필요하다. (p. 30)


중요한 것은, 이런 성찰 작업을 계속하면서 자살을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할 대상, 옹호하거나 맞서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단순한 생각에서 단호하게 벗어나는 것이다. 자살은 그보다 훨씬 더 미묘하다. 자살이 인간에게 유일무이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나는 문어가 자살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한다. 그러나 자살보다 더 인간적인 것은 없다. 인간은 복잡한 생명체다. 우리가 때로 삶을 끝내기로 결정하는 방식에 대해 논의할 때는 왜 그 복잡성을 박탈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p.31)


우리에게는 자살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할 언어가 없다. 자살이라는 주제는 매우 불쾌하면서도 끔찍할 정도로 강력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아주 힘들기 때문이다. 친구나 가족, 심지어 우리가 동질감을 느끼는 유명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늘 두 가지 중 하나의 반응이 이어진다. 그들이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고 은근히 생각하거나 그런 행동은 그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요인(심한 우울증, 만성 중독 등)으로 초래되었다고 단정한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자유롭게 행동했다면 은연중에 그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우울증같이 통제할 수 없는 행동 요인에 의해 강제되었다고 단정하면 그들에게서 자유를 없애버리게 된다. (p. 38)


이런 경향에 맞서 나는 자살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조용히 규탄해서는 안 되는 자유로운 행위로써 생각해볼 여지를 열어보고 싶다. 자살은 이해되어야 하며, 자살에 대해 더 성숙하고 관대하며 성찰적인 논의가 절실히 필요하다. 자살에 대한 논의 전체가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히는 일은 너무나 흔하다. 자살한 사람의 배우자와 가족, 친구들은 자살에 대해 논의하려는 어떤 시도든 이해할 만한 분노로 반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우리는 이야기해야 한다. (p. 39)


[자살에 대한 글쓰기] 사람들은 가볍게 또는 되는 대로 목숨을 버리지는 않는다. 사후 출간된, 자살에 관한 뛰어난 짧은 에세이에서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말했듯이, "삶을 유지할 가치가 있을 때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주저하게 하는 구절은 "유지할 가치가 있을 때"라는 부분이다. 어떤 조건에서 삶은 유지할 가치가 있거나 없는가? 흄의 주장은, 삶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 될 때 목숨을 끊는 행위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내의 한계에 있으며, 그 한계는 장 아메리로부터 빌려온 공감(empathy)과 자기성찰(introspection)이라는 두 가지 수단을 사용해 연민(compassion)을 갖고 생각하면서 이해해야 한다. (p. 42-43)


우리가 죽어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글쓰기를 통해서일 것이다. 글쓰기는 삶으로부터의 작별이며, 세계의 일시적인 유기이면서 사물을 더 명확하게 보기 위한 작은 집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글 쓰는 사람은 삶을 더 냉정하게 보기 위해 거리를 두면서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삶에서 한 걸음 물러나 밖으로 나간다. 더 차분한 눈길로, 글을 쓰면서 없앨 수 있게 된다. 환영, 잊혀지지 않는 것, 후회, 우이를 깎아내리는 기억들을. (p. 45-56)


불행해서 삶을 잘 살아갈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삶을 끝낼 수 있다. 세네카는 현자, 철학자는 "살아야 하는 만큼 사는 것이지, 살 수 있는 만큼 사는 게 아니다"라고 조언한다. (p.49)


자살이 범죄행위라면 그것은 신이나 우리의 이웃, 우리 자신 중 어느 쪽에서든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흄은 쓴다. 자연법에 대한 호소가 허위이므로 자살은 신을 향한 어떤 의무의 위반도 될 수 없다. 내가 참을 수 없고 끊임없는 고통을 겪기를 바란다면 악의적이고 사악한 신일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는 의무에 관해서라면, 내가 치유할 수 없는 병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고 내 존재가 나 자신에게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원하는 방안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런 상태에 계속 있기 위해 나는 어떤 의무를 가져야 할까? 이웃과 사회와 관련해, 흄은 "은퇴한 사람은 사회에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선한 일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것이 해가 된다고 해도 매우 약한 부류의 것일 뿐이다"라고 쓴다. 반대로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너무 무거운 부담이 되었을 때 자살은 우리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그는 덧붙인다. 자살은 "우리가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모두가 삶에서 행복할 기회를 갖고 모든 불행의 위험에서 자유로워져 우리가 사회에 유용해질 수 있는 방법이다." 자살에 의지하는 것의 타당성, 다시 말해 법적 책임이나 도덕적 수치심으로 끝없는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는 통찰은 어떤 식으로든 행복해질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비결이다. (p. 58-59)


삶이 신이 준 선물이라면 정확히 선물이란 무엇인가? 선물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주는 행위 후에 선물은 받는 사람에게 속한다. 정의에 따르면 선물을 주는 사람은 선물을 주고 나면 더 이상 선물을 소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살 금지가 삶은 신이 준 선물이라는 생각에 근거한다면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다.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삶은 거부되고, 버려지고,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주어지고, 돈을 받고 되팔거나 거주 주어질 수 있어야 한다. 삶이 신이 준 선물이라는 신은 그 선물을 거부하는 행위로써 자살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중략) 삶이 선물이라면 받는 사람에게 어떤 조건도 없이 주어져야 한다. (p. 66-67)


때로 신은 무한히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 하지만 신이 무한히 사랑한다면 그런 사랑은 피조물이 고통을 견디기 너무 힘들 때는 자살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는가? 무한히 사랑을 베푸는 신이 어떻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지속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그런 지속 상태를 요구하는 것은 사랑과 계명의 순전한 힘을 혼동하는 것이 된다. 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결국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에서 정의한 게 옳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고 자신은 어떤 권한도 없는 것을 받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이 보답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은 아닌 채, 그렇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사랑은 가정법에서 일어난다. 그렇게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좋을 것이다. 사랑의 논리는 은총의 논리와 유사하다. 진정으로 내 통제 능력밖에 있는 것을 주고, 그것에 완전히 전념하지만 사랑이 보답받으리라는 보장은 있을 수 없다. (p. 67-68)


자기 소유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과 더불어 나를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고상한 독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의존하는 합리적 존재이고 그런 의존은 나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 그것이 삶의 조건이다. (p. 74)


그런데 삶을 끝내겠다는 결정이 어떻게 합리적일 수 있을까? 그 결정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살펴보고 죽어야 할 이유와 비교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을 내가 정확히 경험해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내 현재 상태보다 죽은 상태가 더 낫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사실 분명히 그럴 수 없다. 이때 현명한 에피쿠로스를 인용하게 된다. 죽음이 존재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면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왜 걱정하겠는가? 에피쿠로스의 지혜는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합리성에 근거해 죽음을 정당화하면, 이성은 죽음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고 그에 대해 어떤 합리적인 판단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p. 81-82)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므로 죽음을 초래할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대신 살아가라. 다양한 자살 방법의 상대적인 가치에 대해 도로시 파커가 쓴 유명한 구절이 생각난다.


면도칼은 아프고

강물은 축축하다

산(acids)은 얼룩을 남기고

약은 경련을 일으킨다

총은 불법이고

밧줄은 풀어질 수도 있으며

가스는 냄새가 끔찍하니

차라리 사는 게 낫다.


(p. 84)


자살하는 사람은 유서에서 항상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 자살 유서는 소통을 시도한다. 유서는 마지막으로 소통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다. 마지막 소통이다. 유서를 쓰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에서 포기하려는 갈망을 나타내면서 소통의 실패를 소통한다는 의미에서 자살 유서는 실패한 시도이기도 하다. 자살하는 사람은 홀로 죽는 것을 원하지 않고, 유서의 수신인 또는 그 외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고 싶어 한다. (p. 89-90)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2005년 케니언 대학교에서 매우 정확하게, 비애감을 담아 말한 것이 바로 이 살인으로서의 자살 개념이다. 그는 마음은 뛰어난 하인이지만 형편없는 주인이라는 말이 진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 말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들이 총기를 심장 대신 머리를 쏘아 자살하는 이유라고 덧붙인다. 그들은 그 형편없는 주인을 죽이고 싶어 한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의미한 것이다. 자살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각오이다. 마음, 머리, 두뇌, 눈 뒤 어딘가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그 모호한 영역이 우리를 노예화한다. (p. 95-96)


내가 아는 가장 가슴 아픈 자살 유서 하나는 그저 다음과 같다.


베티에게

당신을 증오해.

사랑을 담아, 조지.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을 증오하면서, 우리의 죽음으로 그들을 벌하기를 바라면서 죽는다. '거 봐 지금 당신 기분이 어떤지 봐. 이제 내가 거기 없으니 분명 나를 사랑하게 될 걸. 당신이 한 짓이 후회될 걸. 안 그래? 어?'


살아있는 것만이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은 삶을 구성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끝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체념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삶을 거부하는 것은 삶이, 삶 자체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삶은 아직 일관성에 도달하지 못했다. 당신의 죽음은 이 일관성을 부여해준다. (p. 122-123)


자살은 삶에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부여하는가? 르베는 강조한다. "네 자살은 네가 말했던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살은 자살자의 일대기를 기이하게 전도시키며, 모든 행동은 그 사람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렌즈를 통해 거꾸로 읽혀진다.

'널 알았던 사람들은 네 각각의 행동을 네 마지막에 비추어 다시 해석한다. 이 마지막 태도가 네 일대기를 전도시켜버리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 다른 사람들의 논에는 네 마지막 순간이 네 삶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 내가 당장 호텔 방을 나가 소용돌이치는 파도 속으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결심한다면, 나의 전 생애는 그 순간을 통해 이해될 것이다. 내 삶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내 삶을 그 마지막 행동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여러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살은 삶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을 통해 삶을 봄으로써, 삶에서 복잡성을 박탈해버림으로써 그렇게 할 뿐이다. (p. 123-124)


2차 세계대전 동안 오래 투옥 생활을 하고 독일인들로부터 잔혹한 고문을 당한 경험을 지울 수 없는 각인으로 남긴 채 감동적으로 길게 써내려간 구절에서 장 아메리는 말한다.


'자살을 하려 그 문턱에 다가간 사람은 삶의 무례함에 맞서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철조망에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수용소의 포로와 마찬가지이다. 저녁에 수프를, 아침에는 뜨거운 도토리 수프를, 정오에는 순무 수프를 들이키고 싶어하는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삶의 요구는 여기서 - 여기만은 아니지만 - 존엄과 인간성, 자유가 없는 삶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삶이 된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삶은 죽어가는 과정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부정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해도 무언가가 된다. 논리와 변증법은 희비극적인 합의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선택이다.' (p. 129-130)


그러나 자살, 그 행동, 그 도약에는 공포뿐만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강박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 때로는 마치 죽은 자에게, 그들의 부동, 휴식, 결국 정지된 인물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거의 스무 해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20분 후쯤 그의 시신을 보고 그런 감정을 느꼈다. 아버지의 삶은 사라졌고 결국 무용하고 의미 없는 고통도 끝이 났다. 그는 기묘하게도 아름다워 보였다. 작아지고 쪼그라든 채 피부는 가무스름하고 주름이 져서 오래된 나무 조각상을 땅에서 파낸 것만 같았다. (p. 131-132)


인간이 되는 것은 매순간 자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투옥, 굴욕, 실망, 질병 - 세계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강제할 수 있지만 자살의 가능성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우리가 이 힘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최소한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다. (p. 133)


어쩌면 우리는 진정하고 상황을 더 냉정하고 염세적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죽음이 어떤 문제든 해결해주고 보상과 보복과 응징을 하고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세계의 고통스러운 혼란으로부터 구해줄 거라는 낙관주의적 망상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시오랑은 유쾌한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자살에 대한 반박: 우리의 슬픔에 그토록 기꺼이 봉사한 세계를 포기하는 것은 무례하지 않은가?" (p. 135)


생각할 수 있는 힘과 기본적인 운동 기능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자유를 행사해 삶을 끝낼 수 있는 무기를 소유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그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너무 막관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우리의 자살로 구원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p. 136)


자살이라는 주제는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무엇 때문에 삶은 의미가 있거나 없는가? 우리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삶을 떠나는 것이 현명하거나 심지어는 필요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이 신이든 공허든 둘의 결합을 위해서든 무엇을 위해서든. 존재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이며 치명적인 잘못이 될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오류로서 그 질문은 그만두어야 한다. 위대한 계시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먹구름은 구원의 약속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의심, 자기기만, 자기연민, 죄의식의 시궁창에 곤두박질치는 걸 멈추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울프의 글을 다시 생각해보면 일상의 작은 기적, 어둠 속에서 켜진 성냥불, 부서지는 파도가 있으며, 램지 부인의 말대로 "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

삶은 여기 정지해있고 우리가 끝없이 변화하는 무심한 회갈색 바다를 마주할 때, 속박, 자기연민, 불평 또는 보상, 빛나는 상에 대한 기대 없이 그 무심함에 우리 자신을 부드럽게 열어둘 때, 그 순간만이라도 우리는 지속해온 것 그리고 지속할 것이 될 것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일종의 충분함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p. 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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