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둑이 무너지고 약 없이는 나를 다스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이유 없이 당신에게 분노를 토해내는 날들이 늘어났다. 사실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당장의 감정이 아닌 과거의 앙금을 이유로 지금의 당신에게 억울함, 서러움, 실망감 같은 것들을 소리쳤다. 그때 내게 왜 그랬냐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 아니냐며.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바닥만 쳐다보는 당신에게 내 마음을 휘젓던 아픔을 노발대발 털어놓았다. 어쩌면 당신이 나를 외면하고 방치했던 것에 대한 업보라며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당신이 나를 외면한 것도 맞고, 그러면서도 내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그런 나의 상처를 고백하면서도, 묵직한 죄책감에 짓눌렸다. 나중에,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참 철없었다며 나의 언행을 후회하려나. 당신에게 내가 그랬듯이, 내게도 그런 존재가 생긴다면 그때는 오히려 당신을 이해하게 되어버리려나. 그리고 그때 당신이 내 곁에 없다면, 나는 그저 자책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여생을 살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들이 자꾸만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게 나를 찔러댔다. 정해지지도 않은 미래의 수많은 가정들을 가져다가 나의 현재를 죄책감으로 메워버렸다. 그래서 당신이 내게 준 상처를 말하면서도, 어쩐지 나의 과거보다는 당신의 현재가 더 안쓰러웠고, 당신의 과거보다는 나의 미래가 더 후회스러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등 뒤로 쌓이는 상처가 커질 때마다 나의 고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과거를 넘어서 당장의 현재까지 불안으로 점철되는 걸 실감할 때마다 나의 아픔밖엔 보이지 않았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당신의 나이가 된다면, 그때는 지금의 나를 후회하게 될까. 설령 내가 몸도 마음도 이렇게나 아프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나의 병보다는 당신의 연약함이 더 마음에 와닿을까. 글쎄, 이제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던 나에게 죄를 짓는 기분일 것 같아서, 그러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