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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례온 Oct 08. 2022

이해가 없는 사이

편함을 정의하라면, 이 관계를 예로 들지 않을까 싶다. 남들한테 함부로 말 못 했던 것들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대학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새삼 느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다른 생각을 갖고 있고, 때로는 내 신념이 이해받지 못함을 넘어서서 경멸당할 수도 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런데 이 관계는 좀 다르다. 딱히 이해받지 못함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해와 수용은 다르다. 이해하지 못해도 수용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하못한는 건, 공감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거나 가까워질 수 없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서 그건 곧 너의 생각을 내 뜻대로 오해해서 받아들이거나 왜곡해서라도 공감하려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나를 나대로, 너를 너대로 바라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마주할 때, 가장 자신다운 모습을 꺼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참 이 시간이 편하고도 온전하다.


우린 "이해"의 개념을 굳이 정의하지 않는다. 서로의 고민을 말할 때 "이해한다"며 위로하지 않는다. 각자의 삶 속에서 느끼고 있는 것들을 함께 바라본다. 그것이 우리가 공유하는 소통방식이다. 이 관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만, 애초에 그들의 이해를 바란 적 없는 사람들끼리 모였기 때문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디 가서 이런 관계를 또 맺겠는가. 앞으로도 너를 억지로 틀에 맞추고 살을 붙여가며,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늘 말하지만, 그렇기에 너와의 만남과 우연, 여정과 동반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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