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난다. 태어나 보니 나 자신의 존재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과 관계로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상태로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 태어나보니 미국, 한국, 영국, 북한, 일본인이라는 것.
그래서 생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켜, 피투적 존재라고 했다. 세계 내 존재(being - in - the - world)로서 던져진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현존재(다자인)를 말한다.
그런데 이 현존재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운명이므로 일정한 시간 안에서만 실존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과거(생전) - 현재(현존) - 미래(사후)와 같은 시간구조의 시간성 속에 놓여 있다.
현존재의 마음속에는 이미 던져 버린 과거가 있고, 또 자기를 던져 버릴 미래도 있으므로 이 시간구조가 현존재의 본질이다. 이처럼 시간에 자신을 던져서 시간성으로 투사된 존재는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강조하여 마음의 고려(Care)라고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상태이므로 불안한 존재라고 한다. 불완전하고 불확정적인 세계에서 불안한 존재로 살아가는 존재가 우리인 것이다. 모두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로서의 삶 그리고 실존이라는 것, 그래서 그의 철학이 생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존재가 아무런 의미 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죽음울 향해 가는 실존이지만 그 죽음이 우리의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불안한 세상에서 결코 불안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 요즘 묵상하는 로마서가 이에 대한 말씀을 제시한다. 로마서 5장 1-11절, 로마서 5장 12-21절, 6장 1-14절, 8장 1-17절, 8장 18-30절이 바로 그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