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형제 중 첫째인 엄마는 결혼과 함께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다. 엄마의 다섯 형제자매들은 계속 고향에 머물렀다. 세월이 흐르고 둘째 여동생은 해외로 이민을 갔다. 막내도 결혼과 함께 서울로.
할머니가 혼자가 되신 후로는 셋째와 넷째 다섯째가 할머니와 근거리에 거주하며 할머니를 보살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오면 모진 말을 한다.
"엄마, 걸어. 산책도 하고 운동 해. 먹을 거는 먹을 만큼만 사. 많이 사서 냉동실에 넣어두지 마. 누굴 먹이려고 그렇게 쟁여 놔."
"엄마, 나 할 일 많아. 나도 바빠. 성당에서 친구 만들어서 놀아."
"엄마, 엄마는 티브이 보면서 수화기를 왜 들고 있어. 할 말 없으면 끊어."
그런 엄마는 할머니를 보러 가면 일 년 묵었던 할머니 집을 쓸고 닦고 가구 배치도 새로 하고 할머니가 못 버리는 물건은 싹 버리고 돌아온다.
모질다.
내 생각에는 할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어서 전화한 것 같고, 나이 들면 친구 사귀기 더 어려울 것 같고, 버리기 싫고 아까운 거 눈앞에서 사라지면 짜증 날 것 같다. 그래서 엄마한테 뭐라고 의사표현을 해봤지만 내 얘기야 엄마가 들어봤자 엄마 생각에 더 확신만 가져다 줄 뿐 별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넘어졌다. 근거리에 사는 이모 삼촌들은 할머니는 혼자 거동이 불가능하다 탕탕탕! 결론을 지은 다음 요양원에 보내기로 마음을 먹고 엄마에게 상의를 해왔다.
엄마는 요양원은 아무래도 할머니에게 제약사항이 많을 거라며 엄마가 엄마 집에서 돌보겠다는 의견을 냈고 형제자매들은 엄마 의견에 반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계시던 곳에 계셔야 한다는 것. 엄마네 집으로 보낼 수 없다는 것.
나는 이모 삼촌들이 오랜 세월 할머니를 모시면서 누구보다 할머니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여 요양원을 결정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엄마의 의견에 반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태 할머니 모신 공이 날아가버리고 마지막까지 할머니를 책임지지 못했다는 오명을 쓰게 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계륵 됐네. 어떡해? 엄마가 모셔와."
걱정하는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엄마가 모셔와 버리면 오해 생기지. 걱정 마. 엄마가 할머니랑 통화했어."
통화내용은 정말 간단했다.
"엄마, 요양원 가고 싶어?"
"아니."
"내가 잘해줄게 우리 집에 와."
"응."
"우리 집에 데려다 달라고 엄마가 말해야 돼."
"알았어."
그렇게 할머니는 엄마 집으로 오기로 했다.
매번 모진 말만 하던 엄마와 할머니의 짧은 대화, 건조한 대화에도 가슴이 먹먹하다.
거동이 불편해지신 우리 할머니 병명은
<큰딸좀오래보고싶어병>
그 병 큰딸 보고 싹 나아서, 덩실덩실 춤추며 이모 삼촌들 있는 곳에 내려가 여태 나 챙겨줘서 고마웠다며 이모 삼촌들 한 번씩 꼭 안아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