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루나의 신간 픽] 최승자 시인의 첫 산문집이다. 담배를 태우는 시인의 사진을 표지 전면에 내세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책 읽기에 나름의 습관이 있는데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책을 만지작거리며 본문 외 주변 텍스트를 먼저 읽는다. 거대한 이미지를 먼저 설정하는 것인데, 대개 필자가 낯설 때 그렇다. 그러다 표지만큼이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띠지 뒷부분이다.
1989년 시인이 처음 출간한 책이다. 2014년 시인에게 재출간을 요청한 책이다. 2019년 시인이 재출간을 허락한 책이다. 거처를 병원으로 옮긴 시인이 2021년 11월 11일 섞박지용 순무 써는 듯한 큼지막한 발음으로 수화기 너머 또박또박 ‘시인의 말’을 불러준 책이다. ( -띠지 글)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시간을 어림했다. 출간 후 새 옷을 입고 나오기까지 꼬박 32년이 걸렸다. 무엇보다 재출간 요청과 재출간 허락의 시간차가 절로 세어졌다. 그러고도 2년이 더 걸려 나온 책이니 시인에게도 편집자에게도 남다른 의미였을 테다. 본래는 3장이었지만, 증보되어 4장이 생겼다. 비교적 최근의 글을 볼 수 있었다.
표지와 띠지에 매료되어 손에 들게 된 책은 읽어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인의 반짝이는 통찰들이 긴긴 문장에 가려져 종종 길을 잃었다. 마치 희뿌연 안개가 눈앞에 가득 찬 느낌을 더러 받으며 내 읽기 수준에 대한 회의감을 마주해야 했다. 이런, 문장이 너무 길다.
그의 문체에 좀 익숙해지고서야 빛나는 표현들이 눈에 들어온다.
잡균 섞인 절망보다는 언제나 순도 높은 희망을 산다.(22p)
내 인생은 언제나 예감 혹은 암시에 앞이마가 얻어터지고, 기억에 뒷덜미를 물렸다.(24p)
아마도 인간은 상처투성이의 삶을 통해 상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모순의 별 아래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상처 없는 삶과 상처투성이의 삶. 꿈과 상처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을 더욱 굳건하게 받쳐주는 원리, 한 몸뚱이에 두 개의 얼굴이 달린 야누스의 원리이다.(59p)
시인의 글을 통해 그가 걸어온 필사의 길을 짐작해본다. 그는 오랜 시간 침잠했고 어느새 노장이 되어 작가의 말도 시처럼 썼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무게감이 상당해 읽어 내려가기 쉽지 않았던 한 시인의 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