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찌그러져도 추석입니다
오늘밤 하늘에서 동그라미를 볼 생각 하니 지난 토요일에 함께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다.
'컵에 물이 반 밖에 안남았네, 반이나 남았네' 낙관적인 후자도 어찌 매일 그렇게 보느냐고 했다. 내가 낙관적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일말의 죄책감이 있었는데 내 마음을 긁어주었다.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해방감이 들었다. 낙관적이어도 그때 그때 다를 수 있다는 토닥임 문장이었다(44P).
땅 속 매미가 17년을 기다린단다. 초딩부터 대딩까지는 16년이다. 초딩인 아이들에게 이걸 공유해 주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 이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 그들에게 어떤지 궁금하다. 매미소리, 그 소리마저 없으면 여름이 얼마나 더 덥겠느냐는 멘트 역시 생각지 못했다(55p).
이에 대하여 다른 이 생각은
"아이들은 그때그때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게 좋겠어요. 중고딩일 때나 거시적 담론이 필요하죠. 부모는 미시적 관점, 거시적 관점 모두를 갖고 있어야 해요.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도록. 초등학생은 그때 그 순간의 배움을 느끼면 되죠"
어제의 고단이 도깨비바늘처럼 붙어 있다고 했다. 어릴 땐 잠이 쏟아져 밥숟가락 물고도 자는데 어른들은 벌떡벌떡 잘도 일어난다고 했다. 아이들에 비해 어른들은 좀만 울려도 바로 켜진다는 비유가 적절했다(98p).
"타인이 나를 지배해요.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는 질문에 김창완은 "나와 타인을 너무 구분 짓지 마세요. 자신의 외연이 타인입니다. 오른쪽의 당신을 그리기 위해 나는 너무 많은 타인을 채웠습니다"라 했다. 무슨 의미인가?(109p)
이에 대하여 다른 이 생각은
김창완이 라디오를 진행하게 된 것도 진행을 통해 이렇게 글을 쓴 것 등 다 누군가와의 연결 때문에 이룬 게 아니겠는가. 굳이 구분하는 게 무슨 의미.
아침 조각들 호명하는 건 즐거운 일이라며 우리 말에는 모든 게 다 들어 있다고 했다. 김훈은 <허송세월>에서 말의 한계가 있다고 안타까워 했는데. 김훈 글로 내가 다 표현하지 못함에 자괴감이 들었는데 김창완 아저씨는 굳이 다 말을 안 해도 들어 있다며 위로한다김창완은 우리 말에는 모든 게 다 들어 있다고 해요(225P).
매미 소리가 어쩜 그렇게 아련한지, 첫사랑의 기억을 소환한다고 했다. '소환' 단어가 참 좋았다. 00기억 소환하는 00. 얼마나 무수히 만들겠는가. 나도 이런 저런 기억에 '소환'을 소환하고자 한다( 273p)
"무심히 인생 곁을 스치는 바람 같은 선율이지만 내 생을 채우기엔 충분합니다" 문구가 있다. 와이프를 처음 만났을 때로 인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담배 끊은지 일주일 됐다. 끊고 나니 담배 파는 곳의 '타격감' 단어가 내 곁을 스쳤다. 그동안 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에 타격감을 느꼈구나. 타격감이 나쁜 건 아니다. 다만 종류를 달리 해야겠다.(291p)
김창완 원래 팬이다. 20대때 본 김창완이나 60대에 본 김창완은 한결같이 청춘이다. 글로는 처음 만나본다. 스스로 지독한 염세주의자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래 그런지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주는 위로의 글 같았다. 더불어 타인에게 위로가 되는 글이다.
아름다운 아침은 언제나 이 아침입니다, 에서 아침은 희망의 상징이고 아침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어제의 후회로부터 자유,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지나간 생일 파티라고 했다. 아침을 좋아하는 나라서 더 공감 됐다.(59P)
아침은 늘 새 날을 가져옵니다 파트다. 휴대폰이 가끔 전원을 껐다 켜는 게 좋은 것처럼 사람도 아무 생각 없이 껐다 켜는 리셋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의 낡은 생각과 빛바랜 시간들을 용도 폐기하라는 말에서 진정 헌 집 주고 새 집 받았구나 싶었다.(74P)
준비된 어른보다 늘 새로운 어른이기를, 에서 어른들이 다 지혜롭고 심지가 굳다고 여기지 말라고, 흔들리는 어른 모습도 자연스럽다고 했다. 나이듦은 완벽함보다 새로움 아닐까.(71P)
이 책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건 우린 너무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 제목만으로도 느껴진다. 완벽, 강박에서 벗어나자. 김창완이 청춘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가난, 시련 등 자기 트라우마에 갇혀 있지 말라고.
김창완이 16살에 12살 동생을 잃었다. 노래 만들고 발표하면서 치유 했다. 누군가 김창완에게 질문했다. 올 1월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고, 어떻게 치유하느냐고? "정말 아름다운 음악은 사라지는 거"라 했다. 음악은 통으로 만든다. 또 하고 또 하고 덧칠이다. 음악이 사라짐으로써 아름답듯이 이별도 사라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사고의 확장을 일으키는 김창완. 김창완으로 오늘 아침도 행복했다.
책 전반적으로 편안함, 푸근함, 깨달음을 느끼게 했다. 작사 작곡을 하는 사람이 쓴 글이 역시 달랐다. 일상을 남달리 보는 퍼플 카우다. 그간 굉장한 글을 라디오 소개 했었구나. 20대 청춘이 꼽은 1위 김창완. 그 답게 옛 것, 옛 말이 등장하는데 전혀 꼰대스럽지 않은 글이다. 일상을 슬라이스로 느끼게 했고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에 젖어들게 했다.
꾸밈이 하나 없고 힘 빼는 기술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문장은 짧아야 한다'는 잘 쓴 글처럼 보이는 단타성 글과 달리 길면 긴대로 조곤조곤 하듯이 술술 읽힌 점. 글에 언급된 단어 하나 하나를 고소하게 씹을 수 있었다. 가령, '잘'한다, 와 '자알' 한다. 비아냥 되는 뉘앙스 한 마디까지 모든 사물과 동물, 자연 현상을 의인화 해 친구로 만든다.
식상함 속에서도 생각지 못한 한 마디로 마무리를 장식한다. 그 맛에 다음을 또 읽게 만들고 그를 또 찾게 만드는 허를 찌르는 그 무엇이 있다. 예를 들어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봐도 달라지지 않더라, 똑같은 자신을 발견하고는 괜히 전기세만 낭비 했다는 둥, 동전의 양면성처럼 좋고 싫음이 다 있다는 데에 빨간불 여러 번 신호에 화내지 말라는 식이다.
편안함 속에서도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은 허를 찌른다. 풀어줄 땐 풀어주고 조일 땐 조이는, 입맛대로 글을 자유자재로 써 부러웠다. 회색 간지에 눕힌 한 문장, 한 문장은 숲 체험하며 산소를 마시는 듯했다. 소제목과 글, 후려치는 빗물처럼 밑줄이 주룩주룩이지만 빗줄기 함께 맞으면 좋을 것 같아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