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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지으시고, 입김으로 모든 별을 만드셨다." [시편 33:6 (새번역)]
"'나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으니까 내가 하느님이 아닌가?' 이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 그때부터 나는 내가 하느님이다. 그러면 내가 하느님일 것 같으면 하느님이 사시는 것처럼 살아야 된다."
[다큐멘터리 사제 3부 '그리스도의 향기' (1분 20초)]
"해월은 ‘만사지 식일완(萬事知 食一碗)’이라는 말을 남겼다. 밥 한 그릇을 먹게 되는 이치만 알게 되면 모든 이치를 다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주 만물을 유기체적인 생명공동체로 인식한 해월은 만물이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신 존재(侍天主者)로 보았다. 사물을 생명으로 보고 나아가 그 자발성과 우주적 연대성을 강조하는 동학사상이 갖는 혁명성은 민중들의 삶이 피폐(疲斃)해지고 식민화의 위기를 목전에 둔 19세기말의 역사적 상황에서 생명세계와의 상호 긍정적 관계를 첨예하게 주장했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상황과의 연관을 무시하지 않고 인류의 미래까지도 살리려고 하는 동학의 이러한 역사의식은 오늘에도 큰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천도교의 음식문화: ‘만사지 식일완(만사지(萬事知) 식일완(食一碗))’ - 밥의 의미를 중심으로>]
온우주에 충만해있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껴보자. 세계의 존재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있다. 그러다보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숨결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라는 생각까지 나아가게 된다. (창 1:27) 더 나아가서 나 자신은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도 하나님의 일부라는 생각까지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본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도 하나님께서 살아가시는 것처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마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숨결로 만들어져 하나님을 닮은 신성한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하게 될 것이다. 복음서에서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온우주가 하나님의 숨결로 충만해있음을 느낄 수 있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1827~1898)도 하늘은 사람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낸다고 했다. 진정한 하늘님은 지금도 숨쉬고,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자고, 또 다시 일어나서 일하고 창조하는 각각의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이다. 즉, 우주 만물을 유기체적인 생명공동체를 통해 드러나는 하늘님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동학은 '향벽설위(向壁設位)' 위주로 가득한 인류문명사를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제사문화로 전환했다. 벽을 향해서 지내는 조상 중심의 제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강조한 것이다. 누구나 자신들의 몸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해월은 ‘만사지 식일완(萬事知 食一碗)’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밥 한 그릇을 먹게 되는 이치만 알게 되면 모든 이치를 다 알게 된다는 뜻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하늘님을 모시는 자기 자신을 소중히 보필하는 밥 한 그릇도 마찬가지로 곧 하늘님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 만물을 유기체적인 생명공동체로 인식한 해월은 만물이 자기 안에 하늘님을 모신 존재(侍天主者)로 보았다. 이렇듯 하늘님은 생명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용>에서 공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시고 먹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맛을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먹는 밥 한 그릇을 하늘님처럼 공경하는 태도로 소중하게 대한다면 공자처럼 맛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음식을 먹으면서 이 음식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감사해하며 먹어보도록 하자. 이것이 어디로부터 내 몸으로 들어가면서 어떤 작용을 거치고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서 순환을 하게 되는지 그 자연의 오묘함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사과 하나를 먹을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자연의 은혜를 입으며 먹는 것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며 먹어보도록 하자. 사과나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묘목으로 만들어졌고, 그것이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결실을 맺어, 어떤 농부의 땀방울 맺힌 손에 수확되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천천히 떠올려보자. 그렇게 되면 저절로 감사함이 온 몸에서 피어나는 기분이 느껴지면서 나를 괴롭히던 잡념이 끼어들 틈이 자연스레 줄어들고 편안해진다. 더 나아가서 나 자신이 얼마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지를 여실히 깨달으며 저절로 겸손하게 된다.
그만큼 우리 각각의 존재는 수많은 인연들이 얽히고 섥혀서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깨달은 연기(緣起)다. 달리 말하면, 서로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인연들이 모두 사라지면 존재는 사라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공(空)'이다. 도올 김용옥은 그의 저서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에서 다음과 같이 짧고 강렬한 오도송으로 연기와 공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나는 좆도 아니다."
그 특유의 직설적이고 유쾌한 표현이 정곡을 찌른다. 한 마디로 나는 좆도 아니라는 것이다. 내 삶은 그냥 거저 주어진 삶이 아니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타자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숨결과 은혜로 가득찬 경이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잠깐 멈추고 나와 내 주변에 경이로 가득찬 세계를 음미해보도록 하자. 이렇게 경이로운 세계에 눈을 뜨면 행복의 조건들을 저절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