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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Dec 18. 2023

『사유와 동자』서론(제1부) 정리 (2)


"우리가 "왜 무無라기보다 어떤 것이 있는가?" 또는 "왜 무질서라기보다 질서인가?" 또는 "(저것도 똑같이 가능한 것이었을 때) 왜 저것이라기보다 이것인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똑같은 악습에 빠진다. 우리는 더를 덜로 오해해서, 존재보다 비존재가, 질서보다 무질서가, 실존보다 가능이 앞서 있었던 양 군다. 마치 존재가 공空을 메우게 되고, 질서가 선생하는 무질서를 조직하게 되고, 실재가 으뜸의 기능을 실현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존재, 질서, 실존물이 진실 자체다. 그러나 가짜 문제에는 근본적인 가상, "참의 퇴행 운동"이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존재, 질서, 실존물은 원초적이라고 상정된 가능성, 무질서, 비존재 속으로 자기 이미지를 역투사함으로써, 자신이 먼저라고 혹은 자신을 구성하는 창조적 행위보다 먼저라고 여기게 한다. 이 주제는 베르그손의 철학에서 본질적이다. 이 주제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또한 가짜 문제의 원천인 모든 부정의 형식에 대한 그의 비판을 요약한다."

- 질 들뢰즈, 『베르그손주의』, 김재인 옮김, 그린비, 2021, pp.17-18 인용; 원문은 G. Deleuze, Le bergsonisme, PUF, p.7. -


"시간을 위치의 이동으로 단순히 환원하는 것은 시간을 공간과 혼동하는 것이다. 이는 제논의 역설에서처럼 움직임motion과 가로질러진 공간 사이의 혼동이다. 두 점 사이의 간격은 무한히 분할 가능하며, 그러한 간격들과 같은 부분으로 움직임이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면, 그 간격은 결코 좁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실상은 이와 다르다."

- 키스 안셀-피어슨, 『베르그손과 생명의 시간』, 정보람 옮김, 그린비, 2022, p.60 인용. -


 그렇다면 베르크손은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그는 여타 철학자들처럼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생긴 거짓 문제라 간주하며 '해소'하려 한다. 즉,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시간을 지속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공간적 사유로 환원하려 했다는 점에서 거짓 문제를 만들어냈다는 지적이다. 바로 이러한 오해로 인해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있느냐?”라는 라이프니츠의 질문과 같은 철학적 악덕에 빠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 비판하는 베르크손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다."(j’ai dit que le temps était réel, et qu’il n’était pas de l’espace.)


 그런데 이는 언뜻 보기에 이상한 지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가 시간을 공간처럼 간주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베르크손에 따르면 공간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다. 2) 한번에 전체가 주어져야 한다. 반면에 시간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시간은 불가분적이다. (혹은, 나누면 다른 것이 된다) 2) 한번에 전체가 주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창조된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볼 때 베르크손은 제논이 제시한 역설을 불가분적인, 혹은 나누면 다른 것이 되는 시간을 마치 무한히 나눌 수 있는 공간처럼 간주했기 때문에 생긴 거짓 문제라고 본다. 심지어 이러한 거짓 문제는 "철학사를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반열에 놓였고 동일한 종류의 사물로 취급"(All through the history of philosophy time and space have been placed on the same level and treated as things of a kind)되는 경향으로 쭉 이어졌다. 예컨대,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둘 다 감성적 직관의 '형식'(form)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그 둘을 "동일한 반열"로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Ⅰ 두 번은 없다


 이와 유사하게 과학은 지속으로서의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물질세계에서 반복되고 계산될 수 있는 시간의 측면, 즉 지속되지 않는 것만을 뽑아서 기억하며 다룬다. 과학의 역할은 예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이 제거함으로써 지성으로는 생각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지속을 분명히 느끼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한 지속을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때 우리의 의식은 지속을 측정하지 않고 보고자 할 의식, 그것을 정지시키지 않고 파악할 의식, 스스로를 대상으로 생각할 의식, 관객이면서 배우이고, 자발적이면서 반성된 것이어서 고정되는 주의와 도망가는 시간을 총체적으로 일치시키는 데까지 접근할 의식이 될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의식이 완전히 순수한 내적 지속[pure, unadulterated inner continuity (duration)], 즉 우리의 어떤 틀에도 들어가지 않으며 하나도 여럿도 아닌 연속성을 제대로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베르크손은 ‘정신에 대한 연상주의적 사고방식의 불충분함’(the inadequacy of the associationist conception of the mind)을 반성하며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의식적 삶의 인위적인 재구성의 결과일 뿐이다. 베르크손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연상주의'(Associasionism)는 그 당시 심리학의 주된 학풍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는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가 있으면, 이 이미지로 인해 다른 이미지가 연상되는 방식으로, 즉 정지체에서 정지체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의식이 작동한다는 관점이었다. (그에 비해서 베르크손이 생각한 의식은 이처럼 딱딱 끊기는 장면들을 이어 붙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연상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철학사를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반열에 놓였고 동일한 종류의 사물로 취급되었다. 시간을 가리키는 용어들을 공간을 가리키는 용어들에서 빌려온 기존 형이상학의 ‘상식적’ 언어 습관이 이러한 혼란에 큰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말을 통해 의사를 표현하며, 우리의 사유는 대부분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달리 말해서, 언어는 물질적 대상들 사이에서와 같은 선명하고도 명확한 구별, 즉 불연속성을 우리의 관념들 사이에도 확립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대상과 관념을] 동일시하는 것이 실제의 삶(vie pratique)에서는 유용한 것이며, 대부분의 과학에서는 필수적이다.”

- 앙리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 최화 옮김, 아카넷, 2001, p.15 인용. -


 그렇다면 왜 이러한 언어 습관이 우리에게 자리 잡게 되었을까? 그것은 곧 인간 지성의 기능 중 하나가 운동에서건 변화에서건 지속을 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성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준비하고 밝힘으로써 생존에 편리함을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공간화된 고정성을 추구하며 지속을 가린다. 그러나 지속의 본질은 흐름이며, 끊임없는 변화의 추동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실재적인 것은 반대로 유동(flux)이며, 이행의 연속성이며, 변화 자체이다. 변화는 불가분적이며, 심지어 실체적”(on the contrary, it is flux, the continuity of transition, it is change itself that is real. This change is indivisible, it is even substantial)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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