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 Henri Bergson]
"What philosophy has lacked most of all is precision."
“철학에 가장 결여되었던 것은 정확성이다. (What philosophy has lacked most of all is precision.)” 우리가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유일한 설명은 대상과 설명 사이에 공간(space)이 없으면서도, 다른 설명이 끼어들어갈 틈(crevice)이 없어서 그 대상에만 적합한 설명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과학적 설명은 절대적 정확성과 완전하면서도 늘어나는 증거(absolute precision and complete or mounting evidence)에 기초하고 있기에 그러한 만족스러운 설명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에 철학적 설명에는 이와 같은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베르크손은 시간에 대한 관념과 관련해서 철학의 정확성 문제를 지적하려 한다. 특히 그는 스펜서를 포함한 모든 진화의 철학에서 실재 시간이 어떻게 수학을 벗어나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실재 시간은 지나가는 것이므로 그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과 중첩(superposition)되는 상황은 상상 불가능하며(unimaginable), 생각할 수도 없다(inconceivable). 게다가 모든 측정에는 규약(convention)의 요소가 들어가며, 사람들이 같다고 말하는 두 크기가 직접적으로 포개질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무언가를 측정할 수 있으려면 그 크기들의 무언가를 보존하고 있는 그들의 측면들이나 결과들의 하나에 대해서는 중첩이 가능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양을 측정하거나 세기 위해서는 질의 추상(이것이 규약의 요소)과 공간 안에서의 병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수를 세기 위해서는 서로 질적으로 다른 것들이 '추상'된 상태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어서 같은 ‘공간’에 '동시성'을 가지며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시간의 경우는 중첩의 관념이 부조리(absurdity)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위 정의에 따라서 스스로와 중첩이 될 수 있는, 즉 측정할 수 있을 지속(duration)의 모든 결과는 지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질로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수학적 시간은 움직이지 않는 공간적 선(line)이지만, 실재 시간은 이루어지고 있는 운동성의 시간이다. 측정을 통해 수학적으로 공간화한 시간은 이미 진정한 지속으로서의 시간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측정은 지속을 결코 지속으로 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떤 수의 간격의 극단들이나 순간들을, 즉 요약하자면 시간의 잠정적 정지들만을 셀 뿐이다. 바로 이러한 시간의 관념이 제논의 역설을 낳기도 했으리라.
제논의 역설이란 무엇인가? 그에 앞서 제논의 역설을 낳은 사상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엘레아 학파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으며, 따라서 (2) 있는 것은 없어지지도 않고, 반대로 없는 것이 있게 되지도 않다. 그러므로 (3) 있는 것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4) 있는 것은 그것 아닌 다른 것으로 나누어질 수도 없다. 이러한 (5) 있는 것은 수적으로는 하나이며, (5) 형태로는 완전한 구형이다. 이러한 파르메니데스 존재론은 다(多, the many)와 운동(motion)을 부정하게 되는 귀결로 이어지게 된다.
제논의 역설은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지지하기 위해 고안된 사고실험이다. 제논은 ‘다’와 ‘운동’이 있다는 주장을 전제한 뒤에, 그러한 전제를 통해 도출한 결과가 전제와 모순됨을 보여줌으로써 운동의 불가능성을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사고실험으로는 '이분법'(The Dichotomy), '아킬레스와 거북이'(Achilles and the Tortoise), '화살'(The Arrow), '스타디움'(The Stadium)등과 같이 네 가지의 역설이 있다. 예컨대, 화살의 역설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Pr1. 모든 날아가는 화살은 지나갈 때 한 점에 존재한다.
Pr2. 한 점에 존재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C. 그러므로 모든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
위 역설을 포함한 네 가지 역설을 통해서 제논은 다와 운동의 불가능성을 결론으로 이끌어냈다. 이러한 제논의 논법은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모로 중요한 논증 방법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위와 같은 제논의 역설은 중국 진나라 시절의 승려 승조가 제시한 '물불천론'(物不遷論)과 상당히 닮아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경험적 세계에서는 실제로 '많은 것들'(多, the many)이 여기에서 저기로 '운동'(motion)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지점을 통해서 제논은 우리가 살아가는 경험적 세계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파르메니데스 존재론의 역설적인 결론을 귀류적으로 옹호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주요한 주제들 중 하나는 이처럼 역설적으로 보이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극복하는 해법들을 제시하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