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릴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다림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은 강물처럼 물 흐르듯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이를테면 납작해질 때까지 짓밟혔다거나 살점을 뭉텅 도려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사건, 살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과거의 상처 같은 것은 입으로는 '과거'라고 말해도 사실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문득 내 표정을 스쳐가며 플래시백(flashback)처럼 별 것 아닌 계기로 나를 뒤흔든다. 찢어진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과거가 '지나[過]-가는[去]' 것이라고 한다면, 상처는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서 따끔거린다. 언제까지나 과거가 되어주지 않는 사건, '지금' 바깥으로 미끄러져 떨어져 나가지 않는 사건이다." (p.24)
1.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때 그 기억은 잊을 수 없는 흔적(trace)으로 여전히 몸에 각인되어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그때 그 사람을 떠나보내서 시간이 지난 뒤에 "다 잊었네 이제 아무렇지도 않네"라고 말하면서도, 어느 순간 "문득 내 표정을 스쳐가며 플래시백(flashback)처럼 별 것 아닌 계기로 나를 뒤흔든다." 단단히 봉합했다고 생각한 그 슬픔은 나도 모르게 방심한 틈을 타 불현듯 '풍크툼'(punctum)처럼 나를 찔러댄다. 그것은 객관적인 물리적 시간상으로 '과거'라고 불리지만, 결코 과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현전으로 느껴진다. 결국엔 어쩔 수 없이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언어는 사람을 '지금'으로부터 떼어낸다. 언어에 의해 사람은 시간의 지평을 넘어선다. '엄마'라는 말을 익힌 아이에게 엄마는 눈앞에 있든 없든 엄마다. 개는 눈앞에 있든 없든 '개'다. 따라서 그것의 부재 때문에 흐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눈앞에 두고도 울고불고 소리치며 엄마와 개를 찾기도 한다. 사람의 현실은 이렇듯 부재하는 것과 더불어 짜여 있다. 눈앞에 있는 것[現前]과 이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희망과 추억을 가능하게 해주고 자긍심과 낙담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지금'이란 디지털시계가 표시하는 순간적인 점이 아니다. 시시각각 현재가 과거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차례로 미래가 현재로 흘러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p.28)
2. 현재는 현재 아닌 것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데리다가 『햄릿』의 구절을 잘 인용하듯이 "시간의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The time is out of joint)기 때문이다. 일단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과거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는 흔적으로 얽혀있는 현재가 있다. 그리고 현재는 단순히 과거의 집적물이 아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 사건에 대한 인식이 뒤늦게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 지닌 인식과 현재의 인식은 서로 일치하지 않게 된다. 즉, 우리에게 과거는 언제나 현재 속에서 재구성되는 과거밖에 없다. '순수한' 과거란 존재할 수 없다. 이렇듯 과거라는 것이 현재에 의해 재구성된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면, 시간적 간극에 의해 오염되어 있지 않는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시간의 사후성'이다. 마찬가지로 순수한 현재 또한 존재하지 않고, 이미 지나가버렸거나 아직 오지 않은 형태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매순간 흔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아무런 보증도 가능성도 없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 왜 이러한 행위가 우리에게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시작되는 것일까. 어쩌면 기다리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보증이 없는 채 기다리는 것은 사람에게 궁극적인 행위라기보다 '나'라는 것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시원(始原)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온갖 종교의 모든 문제는 필시 보증이 없는 것으로 귀착한다."고 말한 자크 데리다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있느냐 없느냐의 보증이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마지막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아마도 이 문제일 것이다." (p.201)
3. 기다림은 언제나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다. 그대가 과연 올 것인가, 오지 않을 것인가? 그 사람이 언젠가 '필연적으로' 올 것이라고 결코 장담할 수 없다. 그저 '아마도'(perhaps)라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아무런 보증도 가능성도 없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게 되는 대상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한없이 작아져서 쪼그라든 나에 비해서, 타자는 무한성을 지닌 타자로 느껴진다. 그렇게 타자를 기다리는 순간순간은 '무한한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기약이 없는 그대 앞에서는 나는 어찌할 수도 없고, 한없이 "자꾸자꾸 작아지는", 그래서 나를 비울 수밖에 없게 되는 무한한 기다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것을 기다리게 되어 있다. 존재 자체가 텅 비어있는 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텅 비어있는 존재는 타자를 향해 열림으로써 환대하고 있는 존재다. 그것은 곧 '메시아적인'(messianic) 기다림이자 진정한 환대(hospitality)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다림은 『우연과 상상』에 나오는 첫째 단편의 제목처럼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환대란 손님을 맞아들이는 자를 끊임없이 동일성으로부터 일탈시킨다. 동시에 타자를 맞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이해를 뛰어넘어 맞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타자와 같이 소원한 것으로 전화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환대'는 자신이 부서지는 가운데 찾아올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틀을 계속 고집하며 언젠가 그것이 부서지지는 않을까 불안하게 여기는 사람이 그 틀 자체를 부수어버림으로써 불안에서 놓여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다." (p.208)
"내게 상처 주게 허락할 테니 다시 걸어보게 해줘 사랑에"
"어느 날 그대가 나에게 왔고
나는 갑자기 무대 위로 끌어 올려졌어요
그대를 만나기 전에 무엇을 사랑했는지
생각나지 않아요"
4. 위 노랫말은 심규선이 쓰고 부른 <달과 6펜스>와 <연극이 끝나기 전에>의 일부다. 그야말로 데리다가 말한 '환대'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구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환대는 환대불가능한 것에 대한 환대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내가 기존에 지녔던 이해를 뛰어넘어서 이질적인 것으로까지 느껴지는 타자를 환대하는 것이다. 결국 항상 자신을 부정하고 변화하는 경계선상에서 타자에게 열려있을 때에만 진정한 환대가 가능한 것이다. 『헤어질 결심』에 나온 대사처럼 나 자신이 '무너지고 깨어짐'을, 즉 '붕괴'를 체험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환대가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상처입을 가능성을 감수하고 타자에게 나 자신을 노출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 "내게 상처 주게 허락할 테니 다시 걸어보게 해줘 사랑에."
게다가 우리가 환대하며 기다리고자 하는 그것은 결코 준비가 완벽히 되어서 딱 들어맞는 순간에 찾아오지 않으며, 언제나 너무 이르거나 너무 뒤늦게 찾아오는 방식으로 불쑥 찾아온다. 위에서도 쭉 이야기해온 것처럼 그것은, 그리고 우리 존재는 시간적인 간극이 있는 방식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며 내가 끝내 소화할 수 없는 무한성의 타자다. 그러니 오히려 역으로 나를 타자라는 무대 앞에 나를 내밀어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편하게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는 무대에 서는 것은 너무나 두렵고 위험한 일이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잘 갖추어진 무대도 아니고, <헤어질 결심>에 나오는 이포처럼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것만 같이 안개가 자욱한 무대다. 어떻게 해야 될 지도 모를 만큼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내가 아닐 때에만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실히 깨닫고, '아마도'라는 가능성에 따른 자아의 '붕괴'에 그 언젠가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어느 날 그대가 나에게 왔고 나는 갑자기 무대 위로 끌어 올려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