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osinante
Sep 11. 2022
한 달에 한 번씩 브런치 모임을 하고 있다. 쿠킹클래스 양식 요리 과정에서 만나게 된 홍자매와 쭈와 함께 말이다. 쭈는 올 3월에 발등 골절을 입었는데 내일모레 심을 뽑는 재 수술 일정이 잡혀있어 이번엔 참석을 못 한다고 했다. 우리는 올해 쭈에게 삼재가 낀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살다 보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날들이 있는데 올해가 쭈에게는 그런 한 해인 것 같다. 뼈가 부러져서 고정시키는 수술을 한 번하고, 고정된 못을 다시 빼내야 하는 재수술을 앞둔 쭈의 심정이 얼마나 심란할까..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묶인 다리에서 하루빨리 해방될 수 있길 바란다고 메시지를 보내 주었다. '과거의 나도 골절을 입었을 때 지독히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시간이 약이더라'는 말은 전하지 않았다. 올해의 후반부는 더 이상의 해프닝 없이 무탈하게 지나기를 기도해 보았다.
홍 1과 홍 2는 성만 같은 타인이지만 서로를 살뜰히 챙겨주는 친자매와 같은 사이이다. 홍 1은 근속 25년 차의 베테랑 설계사이고 그녀의 꿈은 최고의 파이낸셜 플래너가 되는 것이다. 늘 엣지 있는 스타일을 추구하고, 확신에 찬 말투와 사람을 이끄는 카리스마로 우리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그녀는 커리어 우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로스팅 경력 20년 차의 홍 2는 이제 막 30대의 터널을 빠져나온 앳된 40대의 얼굴에 긴 생머리와 럭셔리한 블라우스, 똑떨어지는 A 라인의 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여인이다. 숙련된 바리스타답게 커피를 추출하는 손놀림과 나이프로 음식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태가 매우 고운 그녀의 꿈은 '넓은 잔디밭이 있고 물멍을 때릴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카페의' 사장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난 지 일 년이 지난 후에서야 홍자매 둘 모두가 이혼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둘이서 주(酒) 님을 영접하며 자주 만나는 것 같더니만.. 홍 1은 이번 여름에 도장을 찍었다고 했다. 평소에 남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전했기에 놀란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홍 1은 스물한 살의 꽃다운 나이에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이 외벌이 하는 것으로 자녀 둘을 키우는 것이 버거웠던 그녀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게 되고서부터 자녀 둘이 대학생이 된 현재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어야 했단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홍 1의 표정과 말투에서 홀가분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홍 2는 올해로 이혼한 지 4년 차가 되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한 번 더 충격을 받았지만 이유를 물을 수는 없었다. 듣고 나서 돌이켜보니 그동안 매력적이라 여겼던 홍 2의 눈빛에서 풍겨져 나왔던 분위기가 새삼 떠올랐다. 완벽한 외모의 그녀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우수에 차고 쓸쓸해 보였던 이유는 자신의 선택에 일말의 미련이 남아서였을까..? 아니면 남편에게 양육권을 주고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어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어미의 안타까움이 묻어난 것이었을까..? 갑자기 그녀의 어깨가 더욱 가녀리게 보였고 '화법이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이유는 마음고생을 많이 한 반증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걱정과 우려가 시작된 나와는 달리 그녀들은 사생활을 털어놓고 오히려 홀가분한 눈치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까운 지인들 중 이혼한 커플이 적지만은 않은 것 같다. 많지 않은 인맥이지만 주변에서 혼자가 된 그녀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는 것을 보면, 우리 세대가 이혼을 혼자 결정하고 책임질 만큼 성숙한 시기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홍 2는 이혼을 반대하시는 부모님과 한바탕 홍역을 겪은 듯 보였고, 4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티면서 단단해진 모습이 홍 1의 것과는 사뭇 달랐지만, 그 둘은 가슴앓이했던 세월을 청산한 자신들의 결정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홀로 선 그녀들이 안쓰러워 보이는 한편으로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 후 홀가분하게 고독한 자유를 누리는 모습이 부럽기도 해서 '잘했어, 그리고 축하해.'라고 말해 주었다. 삶에 정답은 없듯이 그녀들의 선택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과가 어찌 되었건 오늘과 같은 결론을 얻기 위해 그녀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스스로 만든 상처를 보듬고 나름대로 새로운 삶을 살아내는 그녀들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브런치 카페에서 2시간 동안 유쾌한 수다를 떠는 가운데 홍 1이 나에게 [숲 해설사]가 되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훗.. 숲 해설사라..' '숲'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오늘의 상황과 잘 어울린다 여겨졌다. 우리의 브런치 모임에는 이혼한 홍자매와 이혼 안 한 쭈 그리고 내가 있고, 우리는 각자 하나씩의 아픔과 다른 무게의 추를 어깨에 짊어 진채 그저 주어진 하루를 감내하며 살아내고 있다. 우리 모임을 끈끈하게 이어주고 있는 공통분모를 생각하다 숲이라는 말을 들으니 과거의 시련을 양분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들여다보아도 한 그루의 여린 나무와 같은 많은 이야기가 있었구나.. 그저 나의 아픔에만 골몰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그녀들의 뒷모습에 위로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하루였다. 앞으로 펼쳐질 우리들의 내일이 어떤 것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서로 기대면서 오래 함께 하자고 어깨를 토닥이며 커피 타임을 마쳤다. 돌아오는 길에 추석 잘 보내라고 수제 강정을 선물로 들고 온 홍 1에게 전화를 걸어 말해주었다. '추석 잘 보내고 다음 정기 모임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라고 말이다. 오곡과 함께 갖가지 씨앗으로 빚어진 강정은 달지 않았지만 바삭바삭하고 깊은 맛이 났다. 오늘 우리를 비추는 가을 햇살을 닮은 맛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