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날개옷은 필요 없다.
나는 나무꾼과 살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선녀여야 하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가 않다.
나는 ADHD를 가진, 늘상 철없는 꿈만 꾸고 있는 얼렁뚱땅 40대 아줌마다.
선녀 대신 덜렁이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나무꾼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
남편을 처음 만난 건 그러니까 12년 전 울산의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에 뿌연 김이 흩어졌다.
그는 서울에 있는 직장에서 퇴근하여 저녁 7시에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4시간 여를 달려 자정이 다 돼 울산에 도착했다.
1.만남
나는 남편이 도착할 시각에 맞춰 경차를 끌고 터미널 근처 갓길에 차를 세웠다.
차가 조금 더 근사했으면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차창 밖으로는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달려가는 차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멘 사람들, 피곤한 표정을 한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그 얼굴들 속에서 터미널 특유의 분주함이 느껴졌다.
바쁘게 지나는 사람들처럼 내 심장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차 안에서 수없이 떠올린 첫인사와 말들은 막상 시간이 다가오자 뒤엉켜버렸다.
숨은 짧게 끊어지고, 손바닥엔 차가운 땀이 배어 나왔다.
띠링
도착했어요. 어디에요?
왔다!
통화버튼을 누르는 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고 있다.
남자는 곧 나를 발견했다. 서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는 성큼성큼, 점점 더 빠른 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때 나의 나이 서른하나,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우리가 만난 건 영어 회화를 배우고 싶어 가입했던 채팅 어플에서였다.
영어를 잘 하고 싶어 가입했는데, 우연히 매칭된 남자와 서툰 영어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서로에 대해 조금씩 호기심이 생기고 이런 저런 사소한 이야기들까지 나누게 되었다.
얼굴조차 모르는 상대와, 아무도 모르게 속내를 털어놓는 일이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마치 비밀 일기장을 하나 공유하는 것처럼.
How did you spend today?
I was introduced to a man.
Wow! How was it?
Well, it wasn,t so good. I still beilive in fateful iove.
Yeah, that,s cool.You,ll definetely meet.
갈수록 그와 대화하는 시간이 즐거웠고, 그도 나의 마음과 같기를 바랐다.
그렇게 우리가 채팅을 시작한 지 100일이 되어 갈 무렵 그가 이렇게 물어왔다.
Aren,t you curious about me?
We already know each other a lot.
I want to know you more.
오늘 그와 나는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될까?
오늘이 지난 다음에 우리는 어떤 관계가 되어있을까?
짧은 순간 이렇게 떠오르는 상념을 애써 모른척 하며 나는 그를 마주했다.
2, 결혼식
♪그대는 선샤인 나만 믿어요.
행복하게 해줄게요.
그대의 사랑 행복에 겨워 나는 눈물 흘려요.
처음 만난 날로부터 1년하고 2개월 뒤 가을,
그렇게 만난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축가를 부르고 있었다.
서울 홍대의 한 레스토랑.
늦여름의 끝과 초가을의 시작이 공존하던 날, 더 가브리엘 레스토랑의 정원은 부드러운 햇살을 머금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빛바랜 잎들이 간간이 나무에서 떨어져 정원 바닥에 노란 점을 찍었다.
그 날의 하늘은 하객들을 맞이하는 신랑 신부의 미소만큼이나 맑고 투명했다.
늘 도망치고 싶어 하던 선녀였지만, 그날 정원의 햇살은 나를 붙잡아두었다.
3. 출산
그로부터 3년. 2017년 봄 어느 날.
서울 은평구의 한 산부인과, 3일째 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예정일에 맞춰 휴가를 낸 남편이 내내 함께 해주고 있었지만, 그가 함께 있다고 해서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산모는 너무 힘든데 아기가 안 내려오고 있네요. 이제 수술을 하시는 게 나을 듯 합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낳을 거에요! 할 수 있어요!”
“여보, 여보 힘들어서 안 돼. 그냥 수술하자.”
“아니야. 나 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럼 마지막으로 촉진제를 한번 맞아 볼까요?
“네! 해주세요. 당장.”
그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힘이 한순간에 모아지는 걸 느꼈다.
내 옆에 그가 있다는 사실이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여보....”
아기가 내 품에 안겨 온 순간, 그는 마치 나 대신 울어줄 듯이 붉어진 눈으로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4. 권태기
“나, 언제부터 이랬어?”
“……”
“언제부터 이렇게 틱틱거리고 있었냐고!”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처럼,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을 내고 있는 나 자신을 순간 깨달았다.
은평구의 한 아울렛, 계산대 앞에서 불현듯 이 말이 튀어나왔다.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옅은 웃음을 남긴 채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 사이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침묵을 먼저 깬 건 나였다.
“여보… 나… 계속 이랬던 거지?”
“…… 여보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거겠지?”
“여보는 계속 참고 있었어?”
“그럼… 나는 여보를 사랑하니까.”
“…”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어이없는 결론을 냈다.
“나… 여보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
5.진단
돌이켜보니 내가 이상한 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직장도 쉽게 그만두었고, 아니, 무단 퇴사한 적도 있었고, 방향 개념이나 돈 개념도 없고, 쉽게 울고, 헤프게 웃었으며, 사랑에도 쉽게 빠졌다.
왜 몰랐을까? 내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내게 상처받은 남편이 되려 나를 달래며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여보, 병원을 가 보는 게 어때? 여보가 너무 힘들어 보여.”
“......”
처음 찾아간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늘 바빴다.
대기실은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내 차례가 오면 질문조차 할 틈이 없었다.
진료실에 들어간 지 10초 만에 진단은 끝났고, 나는 처방전만 들고 황망히 나왔다.
그러다 우리가 이사를 하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병원을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나영 님의 문제는 약물만으로는 치료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심리상담이 병행되면 훨씬 효과적일 것 같아요.”
의사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었다.
여러 차례의 검사와 상담 끝에, 마침내 나는 내 문제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조울증. 그리고 성인 ADHD.
마흔이 넘은 내게 내려진 진단명이었다.
그 이름들은 내게 위로를 주기도, 변명을 허락하기도 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내가 이상했던 게 아니구나. 아팠던 거구나.”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다가도,
“나 아프다잖아! 왜? 안 되는데, 어떡하라고!”
하고 뻔뻔해 지기도 했다.
남편은 끝없이 나를 다독이고, 때로는 질책하며, 또다시 위로했다.
그 앞에서 마흔이 넘은 나는, 이제야 사춘기를 맞은 아이처럼 남편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여보, 나도 지쳤어. 나는 더 이상 여보를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모든 걸 갈아 넣어도 여본 만족하지 못할 거 같아. 여보의 이상은 저 밖에 있겠지.
나는 그걸 해줄 수가 없어. 여보, 제발 이곳에서 행복을 찾을 순 없을까? 그게 여보가 편안해 지는 길이야.”
나는 늘 먼 곳에서 이상을 찾았다.
내가 있는 곳에서 만족하지 못했다
그곳에만 내가 채워질 유토피아가 있을 거라 믿으며 날개옷을 입고 날아가려 했다.
하지만 이내 지쳐 땅으로 떨어졌다.
나무꾼은 내가 잃어버린 날개옷을 고이 접어 조용히 내 곁에 두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You will think of things. And I’ll get bored with you and feel trapped, because that’s what happens with me.”
완벽하지 않음을 이미 알면서도 그들은 결국 다시 사랑을 선택했다.
나도 더 이상 날개옷을 찾지 않는다.
내가 있는 이곳이 나의 하늘이고, 나의 천국이다.
이제 날개옷은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