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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s Sep 15. 2020

앞동산

8. 스치듯 만나는 것

Simon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항상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때로는 주방을 개구리 점프로 활보하며 우리에게 웃음을 주던 친구였다.


3월의 구름이 많았던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물었다. 같이 조깅하러 가자. 기가 막힌 코스가 하나 있어. 그때 내 머릿속에 그려진 것은 강가의 산책로를 따라 달리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한강공원의 한 장면 말이다. 출발할 때까지도 그랬다.


그리고 막상 도착한 곳은 기숙사에서 걸어서 5분 이면 도착하는 한 국립 식물원. 이름이 아마도 'Botaniska trädgården'이었을 것이다. 고양이 하나가 안내해주는 대로 식물원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동산 하나가 나온다. 그곳이 Simon의 조깅 코스였다.


'산에서 달리기라니!' 나는 달리는 내내 속으로 생각했다. 스웨덴 사람들이 아무리 조깅을 좋아한다지만 산에서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다시는 산에서 달리기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정말 오랜만에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느꼈다. 마침내 다리가 산소 부족을 호소하며 더 이상의 기능을 멈추려 할 때에 Simon은 이미 저 멀리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그 덕분에 좀 더 눈치 보지 않고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었는지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어 응시한 산 반대편에는 시리게 푸른 숲이 바다까지 뻗어 있었다. 거친 숨이 만들어낸 어지럼증은 그 풍경에 아지랑이를 첨가해 더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었다.


예테보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와의 어지러운 첫 만남. 다음에 꼭 다시 리라. 걸어서.




앞동산. 뒷동산과는 다르다.  내가 사는 곳 너머의 존재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내 앞에 놓인 더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산에만 오르면 누군가의 그리운 목소리를 듣고 싶은 기분이 든다. 해 질 녘에는 더욱 그렇고, 술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어딘가에 두고 온 모든 것들을 그립게 만드는 그런 장소이다. 그러니 나는 여행하는 모든 곳에서 앞동산에 걸어 올랐다.


새벽 세 시. 백야가 물들인 진한 오렌지 빛 하늘을 돌 위에 가만히 누워 바라보고 있자면 내가 산에서 온 존재라는 사실을 느낀다. 시원한 바위만큼 편한 곳이 없다. 두세 시간 전에 마셔둔 와인 몇 잔은 비로소 그 효과를 발휘한다. 외로움이 씻겨나간 빈자리엔 선선한 새벽 공기가 들어차 열 오른 몸과 마음을 식혀준다.


그렇게 다음날 외로움을 견딜 준비를 마친다.


5월 어느 날, 산 정상에서 늘 그랬듯 숲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은 높은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때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아주머니 한 분이 말을 걸었다. 급한 일이었을까, 인사말도 없이 다짜고짜 물었다.


"Are you ok?"


이름 모를 누군가의 걱정.


여행하던 중 문득 저 앞에 있는 산에 오르리라 생각했다. 출발하기 전에 어깨춤의 가방에 와인 한 병을 챙겨 넣었다. 숙소에서 플라스틱 컵을 챙겨 나올 때 두 개를 챙긴 것은 아마도 스치듯 만날 누군가에 대한 예의이다.


정상에 있는 국기 게양대 근처에 자리를 잡고 반대편으로 떨어지는 오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 병을 열었다. 시큼한 듯 달콤한 이 냄새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한 잔, 두 잔. 병이 비어가면서 해는 어느덧 마지막 분홍빛을 내며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모호한 곳을 넘어가고 있었다.


한 사내가 어느덧 근처에 와 자리를 잡았다. 동네 주민일까 나 같은 산에 오르는 이상한 여행자일까. 그에게 술을 한 잔 권했다. 잠깐의 대화가 오고 갔다.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우린 정말로 스치듯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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