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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머핀 Nov 15. 2020

[김머핀과 고양이] 나와 코코와 살바도르 달리를 마치며

이별에 관하여


 동물을 키운다는 것, 생명을 책임진다는 건 언뜻 보면 아이를 키우는 과정과 비슷하다. 분명 처음에는 그렇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사랑하고, 그럼에도 눈 깜짝할 사이에 줄줄이 벌어지는 사고들에 야속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우리의 사랑하는 원수들에게 작은 것 하나하나 신경 쓰고, 늘 노심초사하며 그들을 살피면서 아, 육아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면서 약소하게나마 부모의 기분을 맛본다. (물론 인간 아이의 육아는 이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보다 어리게 태어난 그들의 시절은 우리보다 이르게 익어서 마침내 그들의 나이가 우리의 나이를 초월할 때, 부모와 자식 같았던 관계가 전도된다. 늘 우리를 집에서 기다리고, 우리가 전보다 소홀해져도 이해하고, 아파도 티를 내지 않고, 가끔은 원하는 것을 말하지만 대부분은 오래도록 우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런 모습이 이제는 연로해 예전보다 약해지신 부모님의 모습과 마음을 닮아간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어떤 이름으로 명명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자식의 모습에서 부모의 모습으로 변모해가는 존재. 수고스럽고 힘들게도 하지만 때로는 나를 구원하는 존재. 자기들의 모든 행복을 나의 손에 쥐어주고는 대책 없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존재. 누구는 애완이라 일컫고 누구는 반려라 명명하고 누구는 여행자에 빗대는 이 작고, 수고스럽지만, 깊이 사랑하는 그리고 더 깊이 사랑을 주는 이 존재를 과연 무엇이라고 정의 내려야 하는지 이들과 함께 한지 십 년도 성큼 더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까만 털 중간중간 흰 털이 많이 생긴 11살 아저씨.

 코코의 까만 털 군데군데 희끗희끗한 털이 늘어날 때부터 나는 코코와의 이별을 상상하며 두려워했다. 코코가 가버리고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매번 막막했다. 죽음 앞에는, 그리고 죽음 뒤에서는 수많은 후회가 물음표로 따라붙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반려동물이 죽는 순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밖에서 웃고 있어서 후회하고, 따뜻하고 정든 집이 아니라 병원에서 눈 감게 한 사실이 못내 걸려 후회하고, 집에서 보내준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치료를 조금이라도 더 받게 했으면 달랐을까 후회한다. 어떻게 보내든 후회는 늘 죽음을 그림자처럼 호위한다.

 반려인들이라면 누구나 반려동물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마지막을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죽는 순간 물리적으로 옆에 있는 것일까. 그것을 하지 못하면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일까. 표준국어대사전은 함께를 “한꺼번에 같이. 또는 서로 더불어”라고 정의한다. 더불어, “거기에다 더하여"라는 뜻의 부사. 함께를 “서로 거기에다 더하여”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생의 마지막 순간을 목도하지 못했다 해도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다.

 서로 삶의 많은 순간에 행복과 기쁨을 더하였고, 그들과 작별한 다음에도 우리는 혼자서 계속 사랑과 그리움을 더하고, 상상의 포옹과 쓰다듬음을 몇 번이고 더해나갈 테니까. 그렇게 오래오래 추억을 더 할 테니까. 그리고 항상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왜 더 잘하지 못했나’ 하는 후회를 더 해 나갈 테니까.

집에서 보냈든, 병원에서 보냈든, 죽는 그 순간 곁을 함께 했든 그러지 못했든, 수많은 것들을 더해나가면서 우리는 언제나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다.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리의 사명은 그저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그리워하는 것, 그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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