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참 많습니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을 만들어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엊그제 보았던 tvN 채널 '알쓸별잡'의 이야기처럼 '가짜 노동'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많이 생각해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애벌레처럼 사실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꾸역 꾸역 기어올라온 감도 없지 않지만 지나온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이 많고 감사가 많아서 그렇게 까지 비관적이지는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일이 많고 바쁜데, 무슨 일이 많고 뭐가 바쁜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게 문제의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의 시간은 모두에게 하루 24시간입니다. 하지만 그 쓰임은 모두 다르겠지요. 그렇다면 정말 '내'가 쓸 수 있는 '나'만의 '가용시간'은 얼마나 될까 고민해 봅니다.
직장에서 내가 해야하는 업무를 하는 시간, 가정에서 가족들과 삶의 지속성을 위한 일을 하는 시간, 생물학적 생존을 위해서 해야하는 이를테면 자는 시간, 식사 시간들을 모두 뺀 내가 정말로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가용시간'입니다. 이 개념은 오래전 6학년 담임을 하면서 어린이들과 생활 계획을 세우면서 함께 고민해본 개념이기도 합니다.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시간 소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정해진 규칙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외는 있기 마련이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 시간을 제외한 변수가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면 가정에서의 가족과 삶의 지속성을 위한 시간이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1인 가정일 수도 있고 가족의 수가 모두 다른 각각의 가정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변수는 생존을 위한 일을 하는 시간이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아침을 거르고 점심 한끼를 먹는 사람도 있을 거고 삼시 세끼 모두 챙겨 먹는 사람, 화장실에서 금방 나오는 사람, 화장실에서 오랜 시간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야기가 길어지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방식이 비슷하다보니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가용시간'도 비슷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의 삶은, 너무 폭이 넓으니까 '저'로 한정해서 저의 삶은 이 가용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런 결론이 당연한 것이긴 합니다.
지난 몇년 간은 삶의 지속성을 위한 시간을 제외한 모든 가용 시간을 '창작활동'에 쏟아 부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그런 일들이 안정화 되며 나름의 메뉴얼도 생기고 효율성에 대한 부분도 노하우가 생겨서 좀더 적은 시간을 투자해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 그런 중에 가용 시간의 폭이 조금더 여유로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여유로워진 가용시간 중의 가용시간에 또 다른 일에 최선을 다해서 그 일에 필요한 강좌를 듣고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까지 마치고 또 한 걸음을 딛기 위한 준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불현 듯 이런 시간들이 한없이 덧없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오고 있습니다. 뭐랄까요, 시쳇말로 다 귀찮습니다. 뭐하러 이렇게까지 하고 살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 가용시간들을 놓아버렸습니다. 삶의 지속성을 위해서 필요한 일들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냥 다 놓아버렸습니다. 처음엔 좀 막막하고 불안했는데 이젠 조금 적응이 되었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불안한 감정을 담고 직장으로 향햐는 건 내가 아니더라도 잘 돌아가는 조직이라는 걸 숨기고 싶어서라고 하는 가짜 노동식 해석의 '알쓸별잡' 패널의 말에 극 공감했습니다. 책임감에 대한 부분이기도 하고 전문성에 대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나 하나 빠진다고 내가 속한 조직이, 이 지구가 안돌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아득바득 이러고 있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그 가용 시간에 제가 하고 있는 일이 하늘 바라보기 입니다. 언제 찍은 건지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은 사진 찍은 장소는 같은 곳들입니다.
퇴근 길에 막내를 학원에 내려주고 집으로 가기 전에 하루 종일 감성 한 방울짜낼 수 없었던 일상에 숨을 틔워주기 위해서 노을이 매일 내려앉는 바닷가로 향해서 차 트렁크를 열고 거기 걸터 앉아 좋아하는 노래 한곡 틀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해가 저물어 가는 그 한 시간 반에 이르기까지의 그 시간이 참 귀하게 느껴집니다. 뭘 위해서 가는지도 모를 시간들을 그나마 의미 있게 갈무리 해주는 시간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뻔뻔'해지는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좀 못해도, 듬성듬성해도, 별 볼일 없게 해내더라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스스로를 위해서 '뻔뻔'해 지고 있는 중입니다. 행복의 순간들을 삶의 저금통에 조금씩 넣다보면 그 저금통의 이름이 '행복한 삶'이 되는 걸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일상을 조금이라도 털어내보고자 조금더 '뻔뻔'해져 보기로 합니다.
어제는 예배 마치고 시험기간이라 학원에 있는 둘째를 빼고 막내와 근처 산에 차로 올라 트렁크를 열고 돗자리 깔고 둘이 한가하게 누워 노래도 듣고 책도 읽고 했습니다. 창문 다 열어두니 한낮인데도 제법 시원한 바람도 불고 지나는 구름이 가득한 초가을 하늘에 잠자리도 많이 날고 하더라구요.
두서 없는 오늘 글은 제가 참 좋아하는 김남조 시인의 '설일'의 일부분을 발췌해 소개하며 마무리해봅니다.
<2023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