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
시를 쓴지는 4년이 되었다. 물론 아주 유치한 습작들이었지만, 나는 시다운 시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으므로 4년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2년 전엔 등단을 했고,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이따금 지면을 얻어 작품을 발표하기도 한다. 나는 시인이 되었고, 수험생이 되었고, 교사가 되었다. 돌아보니 어느덧 혼자 습작만 하던 시간과 시인으로서 시를 내보여야 하게 된 시간이 얼추 비슷해졌다. 두 시간은 서로 너무나 다른 시간이었다. 서로 다른 두 시간을 통과해오면서도 유일하게 변함이 없는 것은 내가 여전히 시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들이라면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동안 나는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고 시를 쓰는 시간이 뜸해졌다. 가득했던 시 대신 다른 것들이 비집고 들어오게 되었다. 삶을 시에 바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난 뒤로부터 시를 삶에 바치게 되는 때가 많아졌다. 시만 생각하기에는 살아가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시가 아닌 것들의 시간이 많아졌다. 시가 없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가 없어도 괴롭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마음을 좀먹지 않아도 시를 데려올 수 있음을 깨달았다. 꼭 시를 데려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시를 데려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시를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시를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면 나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여전히 시를 꿈꾸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이 충분히 기쁘지 않고 충분히 괴롭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여전히 꿈을 꾼다는 것은, 꿈을 꾸는 일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이거나 꿈을 꾸지 않는 일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때 꿈을 꾸는 일이 무척 기쁘고 무척 괴로워서 매일 매일을 견뎌내는 사람이었으나, 지금 나는 꿈을 꾸지 않는 일이 꽤 기쁘고 꽤 괴로워서 매일 매일을 견뎌내는 사람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시를 꿈꾸고 있다. 시를 써야 한다고 마음먹은 지 한 달이 또 지나고 있다. 문득 펼쳐 본 옛 습작노트에는 유치한 습작들이 무척이나 기쁘고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을 기뻐하고 괴로워했을까. 꿈을 꾼다는 것이 괴로운 일일 수 있음을 처음 느낀 기쁨, 나는 아직도 그 기쁨의 이자를 먹고 살고 있다. 잔뜩 꾸어댔던 꿈, 나는 이제야 시를 쓰지 않는 시간으로써 그것을 갚는다. 그러나 시를 쓰지 않기 위해서는 또다시 꿈을 꾸어야 한다. 꿈을 꾸지 않고서 시를 쓰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시를 데려올 수 있다는 믿음 아래서만 시를 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시를 꿈꾸어야 한다. 여전히,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서로 다른 견딤의 방식으로. 어쩌면 그때 그 곡진한 유치함이 가장 시다운 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는 그때 가장 기뻤고, 괴로웠으므로. 온통 시가 들어차 있었으므로. 시가 들어찬 삶과 삶이 들어찬 삶. 둘 중 하나만이 삶을 증명해줄 수 있다면, 마땅히 전자일 것이다. 삶은 삶 아닌 것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삶은 삶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시도 마찬가지 아닐까. 시는 시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 시는 시 아닌 것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나는 시가 아닌 방식으로 시를 꿈꾼다. 다른 시간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시를 꿈꾼다. 나의 가장 시다웠던 시는 지금 없지만, 여전히 그렇다. 여전히 견딤이다. 나는 시를 쓴지 4년이 되었고, 4년째 시를 꿈꾸고 있다. 시를 쓰지 않을 때가 많지만 나는 늘 시를 쓴다. 쓸 수 있다. 그렇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