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24
2010년 1월에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다. 7박 8일이었는지 8박 9일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도시들을 다녀왔는지는 기억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오래, 그리고 선명히 기억나는 것은 여행 어느 날 숙소에서의 밤이었다. 며칠 째 되던 날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 조그만 호텔 방을 기억할 수 있다. 숙소를 들어서자마자 넓은 대로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펼쳐져 있는 한적한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고, 숙소의 오른편 가운데에는 싱글사이즈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날 휴대폰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내일 들를 도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라디오를 켰다. 그즈음 한국에서 나는 10시만 되면 늘 스윗소로우의 텐텐클럽을 듣곤 했었고, 비록 텐텐클럽을 들을 수는 없지만 이탈리아에 와서 습관처럼 라디오를 켰던 것이다. 습관이라고는 했지만 기실 나는 이국의 언어로 듣는 라디오가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다. 주파수를 돌려가며 가장 깨끗한 라디오 채널을 찾아 들었다. 음악 방송인 것 같았고, 그때 당시로 말할 것 같으면 이탈리아판 ‘태연의 친한친구’ 같은 느낌의 방송이었다. 어떤 노래가 나왔는데, 이탈리아에서 처음 듣는 노래여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노래 자체도 요들송처럼 이상하게 신나서 기억에 오래오래 남았다. 너무 신기해서 녹음까지 해놓고 한국에 와서도 두고두고 재생했다. 비록 노래의 제목은 모르지만 계속 들었다. 그러다 1년쯤 지났을까, 늘 그 노래의 제목을 알아내는 것이 당면 과제였던 내가 TV광고에서 우연히 그 노래가 나오는 것을 들었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최대한의 검색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그 노래가 Focus의 ‘Hocus Pocus’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성취감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나는 2018년,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그 노래가 나오는 것을 보고 신나서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하간 나는 이탈리아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가 없고, 그날 밤 숙소의 풍경과 정취를 잊을 수가 없고, 그날 밤 숙소 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듣던 MP3플레이어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그때 그 MP3는 내가 지금 10년째 갖고 있는 MP3플레이어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도 실은 서서히 잊히고 있는 것일까. 기억은 기억하지 않을수록 먼지가 덮여 흐릿해진다. 나는 그때 내가 보물 1호라고 여기던 MP3플레이어가 어떤 기종이었는지 떠올려야 했다. 나는 네이버와 구글 검색창에 ‘2010년 MP3플레이어’나 ‘삼성 YEPP 기종’, ‘아이리버 MP3’ 따위의 검색어들을 입력하며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나는 분명 그때 그 MP3플레이어를 버스에서 잃어버렸던 기억이 있고, 또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바로 다음날 교실 뒤편 사물함 위에 올려져 있는 MP3플레이어를 찾았던 기억이 있는데, 어쩌면 후자의 기억이 실은 나의 상상이었을 뿐이었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러다 구글 이미지들 가운데서 나의 그때 그 MP3플레이어와 같은 기종의 것을 찾았고, 그제서야 모든 기억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져 온전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삼성 YP-M1이라는 MP3플레이어를 갖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Hocus Pocus를 들었던, 매일 밤 스윗소로우의 텐텐클럽을 들으며 수학 문제를 풀다가 어른의 연애를 상상하곤 했던, 하단에 푸른 빛이 나던 나의 검은색 MP3플레이어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 푸른 빛을 떠올리자마자 중학교 3학년 때 느꼈던 막연한 기분과 느낌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이탈리아의 그날 밤 숙소를 떠올리는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되찾게 해 주었다.
“공간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사라진다. 시간은 공간을 데려가 형태를 알 수 없는 조각들만 내게 남겨놓는다:” (153)
멀찍이 떨어진 대로변의 주황색 가로등이 빛나는 숙소 창가, 내 손에 쥐어진 푸른 빛, 거기서 나오는 이탈리아의 라디오, 그리고 Hocus Pocus.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어느 밤은 그런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내게 필요한 것은,
“글쓰기: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무언가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기. 점점 깊어지는 공허로부터 몇몇 분명한 조각들을 끄집어내기, 어딘가에 하나의 흠, 하나의 흔적, 하나의 표시, 또는 몇 개의 기호들을 남기기.” (153)
나는 아직 푸른 빛을 내던 그 MP3플레이어가 내 손에서 어떻게 떠나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앞으로의 당면과제. 나의 푸른 빛은 어디로 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