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7
지금껏 자격지심의 자격이 자격(資格)인 줄로 알았다. 자격지심이라고 함은 누구 혹은 무엇인가를 대하는 데에 있어 필요한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줄로 나는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스스로를 결격 사유가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자격지심의 자격은 자격(自激)이었던 것이다. 이거 은근 충격이 크다. 나름 한글과 한자어에 관심이 많아 아는 단어라도 그 뜻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자격지심이라는 그 흔한 단어의 뜻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으니, 덮어두고 모른 체하던 나의 천성적인 게으름과 엉성함이 발각되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좋지만은 않다.
자격지심이란 스스로 부딪치는 마음으로서, 자기 자신 혹은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스스로 모자라거나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뜻한다.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스스로를 결격 사유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일견 비슷해보이지만 서로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자격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일에 있어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어떤 ‘정도’를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예를 들어, 교원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능력의 정도와 상관 없이 가르치는 일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을 좋아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내가 당신을 좋아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자격을 들먹이는 순간 비참해진다. 자격의 문제는 충/부족의 문제를 매정하게 눈 앞에서 치워버린다. 얼마나 충분한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저 pass/fail의 문제가 된다.
나는 자격지심의 의미를, ‘당신을 좋아하기에는 내가 부족해’가 아니라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은 잘못이야’라고 받아들였으니 지금껏 나는 가깝고 먼 여러 연애사들을 남들보다 퍽 무겁게 느껴왔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남들의 자격지심을 어떻게 이해하든 지금의 내겐 딱히 알 바가 아니지만, 딱 한 가지, 내가 유일하게 갖고 있던 ‘자격지심’ 만큼은 다시 이해해야만 한다.
나는 시를 쓰는 일과 마주할 때 ‘자격지심’을 느낀다. 시를 좋아하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바깥에서 온 사람이었다. 적어도 시를 읽기만 했었더라면, 시를 읽고 좋아하기만 했었더라면, 자격을 덜 따질 수 있었겠지만, 시를 쓰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나는 자격을 따지는 죄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시를 쓰는 일에 있어 내게 결격 사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를 좋아하는 일이 갈수록 죄스럽게 느껴지는 날이 잦아졌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은 나로 하여금 성실해질 것을 요구한다. 나는 시를 좋아하므로, 시에 성실하고 싶다. 성실하지 못할 때마다 나는 시를 좋아할 자격이 있냐고 되묻게 된다.
그러나, 그 마음은 자격지심이었다. 자격을 묻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부딪치는 마음 말이다. 좋아하는 일에 자격이 필요할까? 좋아하는 일에 이유가 필요할까? 성실하고자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굳이 자격을 들먹일 필요까지 있었을까? 그래서 이제 내게 돌아올 질문을 바꾸어 보는 것이다. “나는 지금 충분히 좋아하고 있는가?” 좋아하는 일은 pass/fail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 기왕 좋아하는 거 굳이 성실하고 싶다면, 굳이 충/부족을 매기고 싶다면, A~F의 문제로 가자. 아니, F는 빼고 A~D로 가자!
근데, 좋아하는 일에도 장학금이 있을까?
장학금은 모르겠고, 좋아하는 일에도 등록금은 있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자격지심의 참 뜻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수시로 나를 부딪는 자격지심은 시 쓰는 일에 대한 나의 등록금이라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시 쓰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시 쓰는 일에 진심인 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