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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얼굴을 향한 모험

210301

by 이건우


“존재에 관한 물음은 존재의 낯섦 속에서의 존재에 대한 경험 자체이다. (…) 그러나 존재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의 악(le mal)이다. (…) 존재에 관한 물음 그 이상일 수 있는 것,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선이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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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비극이 있다. 우리의 공포는 존재의 유한성이나 죽음에서 오지 않는다. 공포는 존재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존재에 관한 물음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의 문제가 된다.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학이 제1철학으로서 정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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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existence)가 있다. 그것은 있음 일반이다. “있음 일반은 비가 온다(il pleut) 또는 덥다(il fait chaud)에서 볼 수 있는 비인격적 형식이다. 있음은 본질적인 익명이다.”(94) 이 있음이란 보편적 부재로서의 하나의 현전이다. 이러한 밤의 어둠 속에는 오직 웅성거림과 우글거림만이 있을 뿐이다. 익명적인 있음으로서의 밤은 그러므로 깨어 있음 자체로서의 불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의식이 탄생한다. 잠잘 수 있는 가능성, 존재로부터 물러설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주체가 출현한다. ‘여기(ici)’에 자리를 잡고 누운 의식이 있음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자기 정립을 통해 주체가 출현하는 순간, 존재에서 존재자로 나오는 순간, 바로 현재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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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존재(existence)의 익명적 잡음 속에서의 주체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또 주체는 이 존재(existence)와 맞붙어 싸우고 있으며, 이 존재(existence)와의 관계 가운데 있다는 것을 뜻한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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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는 [모든 대상으로부터의] 물러섬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오로지 자기로 머무를 수 있음(quant à soi)이다. 이런 의미에서 (…) 인식은 모든 자유로운 행위의 조건이다.”(80) 그러나, “인식과 지향의 자유는 (…) 나를 나의 존재(existence) 자체의 결정성에서, 즉 자아는 언제나 나 자신과 더불어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 즉 자아는 결정적으로 하나인 그런 존재(existence) 속에 갇혀 있다.”(14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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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는 자유롭지 않다. 현재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떠맡는다. 그림자처럼 자신의 존재와 맞붙어 있는 주체는,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대상들을 향유하고 만족을 얻는 ‘경제 활동’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떠맡은 현재의 순간으로부터 주체가 탈출하기 위해서 타인(Autrui)은 필수적이다. 에로스를 통해 현재로부터 미래로의 초월, 자기로부터 타자로의 초월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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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은 바로 에로스 속에서 근본적인 방식으로 사유될 수 있는 것이다. 에로스 속에서 초월은 존재 속에 사로잡혀 있는 자아, 숙명적으로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자아에게 이 회귀와는 다른 것을 가져다줄 수 있고, 자아를 자아의 그림자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다.”(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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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인과 만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와 같은 제삼항에 대한 참여가 아니다. 초월은 오직 타인과 “중개자도, 매개자도 없이 무섭도록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관계”(160)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타인은 자아, 나가 아닌 것이다. 자아, 나는 강하지만 타인은 약하다. 타인은 가난한 자이며 ‘과부이고 고아’이다.”(161) 타자는 이타성(異他性) 그 자체다. 그러므로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다. 과부이자 고아로 나에게 현현하는 타인의 얼굴은 나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잊고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자아와 타자의 비대칭적 상호 주관성, 그곳에서 초월이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로부터, 존재로부터 탈출하여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타자성 그 자체로서의 타자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에로스를 통하여 “주체는 완전히 주체 자신의 구조를 보존하면서도 숙명적으로 그 자신으로 회귀하지 않을 가능성, 출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163) 나이지만 나와 다른 존재를 출산함으로써, 나의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미래의 시간 속에서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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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떤 희망거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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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진정한 대상, 그것은 메시아이며 구원이다.”(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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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이자 구원, 그것은 곧 타자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다르게, 혹은 존재를 넘어서’ 나는 모험을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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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위한 시작은 양도할 수 없는 자기 소유를 바탕으로 한 시작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뒤로 되돌아올 수 없다. 그것은 배에 올라타고는 닻줄을 끊어버리는 일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모험에 뛰어들어야 한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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