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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구원은 가능한가

210822

by 이건우

평온과 폭력이 뒤엉킨 고요한 일상을 찢는 계시의 순간들. 이토록 나약한 우리들에게 구원이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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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하나 하나가 강렬한 영성과 에너지를 내뿜고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인조 검둥이>와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가 가장 좋았다. 대다수의 작품이 그렇지만, 두 작품 역시 마찬가지로 “구원”을 테마로 삼는다. 그리고 두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기만적인 일상이 무너지는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아래는 작품에 대한 가벼운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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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검둥이>
편견과 혐오로 얼룩진 인간의 나약함을 폭로하는 신비하고 계시적인 순간들. 인간이 가장 보잘 것 없어지는 순간은, 내가 혐오하고 멸시하는 존재의 실재성을 체험하게 될 때이다. 내가 공격하던 대상은 그저 나의 상상적 구성물에 불과하며, 그런 편견을 걷어낸 뒤 드러나는 실재를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오싹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혐오와 폭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역설적이게도 종종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나약한 존재라는 방증이다. 누군가를 혐오함으로써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나약한 사람이다. 그의 공포는, 자신의 상상이 걷어진 뒤에 드러나는 존재의 신비와 그가 혐오하던 이들의 실재성에 압도되는 자신에 대한 하찮음과 다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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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진정한 선이 가능한가? 맹목적 선의는 희생자를 낳는다. 이 작품에선 무신론자가 교조적이고 맹목적으로 선을 좇고 기독교도가 악행을 일삼는다. 무신론자는 자신의 선의로 인해 희생당했던 자신의 아들에게 돌아가지만 아들은 이미 죽은 엄마를 보러 우주로 여행을 떠난 뒤였다. 아들의 모습에서 구원의 빛을 보았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과연 그는 구원을 받은 것인가? 아님 구원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작가는 우리에게 순수한 선이란 실현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맹목적 선의와 악행 사이에서 희생양이 되었던 아들에게서 구원의 빛이 드러났다는 데서, 우리는 결국 도덕적 의미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그 어떤 종교적 가치도 표백된 순수한 도덕적 구원. 여기서 오는 역설적인 신성성과 종교성이 플래너리 오코너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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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은 가능한가? 무엇이 구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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