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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놀이

211023

by 이건우


어릴 적 하교길에 나는 그림자 놀이를 하며 걸었다. 내가 움직이면 나의 그림자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신기하고 좋았다. 그러다 길가에 웅크리고 앉아서 사물들의 그림자를 가만히 관찰하곤 했다. 사물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손을 움직여 사물의 그림자에 나의 손 그림자를 천천히 갖다 대었다. 그림자에 그림자를 아주 천천히 갖다 대면 그림자에는 아주 잠깐 조그만 혹이 생기다 맞붙는다. 맞붙음의 순간, 혹이 생기고 그림자와 그림자가 하나가 되는 그 미세한 순간, 나는 그 순간이 좋아서 손을 천천히 움직이며 놀았다. 사물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고, 나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사물의 그림자는 영원히 그대로일 것처럼 멈춰 있는 게 좋았고, 나의 그림자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처럼 움직이는 게 좋았다.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것 역시 좋았다.

그림자 놀이를 하던 나는 문득 그림자에도 색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림자는 회색 같았다. 하지만 아스팔트 도로 위 그림자의 색과 공원의 풀밭 위 그림자의 색은 달랐고, 나는 그림자의 색을 알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드리운 바탕의 색을 알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림자에는 색이 없다. 색깔은 사물의 속성이다. 하지만 도로 위 양달과 응달의 색은 달랐고. 나는 사물의 색깔이 그림자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양달과 응달 중 어떤 색이 진짜 색일까. 나는 거기서 멈췄고, 그 수수께끼를 영원히 풀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내게 영원의 순간은 오직 그림자와 함께 온다. 영원을 생각하면 이 세상은 온통 빛과 그림자로만 가득한 세상인 것 같다.

광원과 가까울수록 그림자는 짙고 선명하다. 광원과 멀수록 그림자는 옅고 모호하다. 광원과 더욱 멀어질수록 그림자는 빛과 하나가 된다.

그림자 놀이를 하던 어릴 적 나의 세상은 너무나 선명했고, 선명한 내가 선명한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을 즐거워했다. 이제 나는 그림자 놀이를 마지막으로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림자 놀이를 즐기지 못한다는 것은, 빛과 그림자가 하나가 된 세상에 서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광원에서 더더욱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빛과 그림자로만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빛에 가까울까 그림자에 가까울까 하는 질문에 골몰한다. 나는 그 수수께끼를 영원히 풀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안다.

양달과 응달 중 어떤 색이 진짜 색일까. 멈췄던 그 자리에서 늘 다시 시작한다. 나는 빛에 가까울까 그림자에 가까울까, 하는 질문으로 다시 시작한다.

빛과 그림자가 하나가 된 세상이라면, 이 세상은 거대한 빛인 걸까 거대한 그림자인 걸까. 결국 나는 어릴 적 내가 세상과 하나가 되던 그림자 놀이를 잊지 못했던 것 아닐까. 세상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세상과 내가 불화하지 않고 작은 혹으로 맞붙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여전히 욕망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빛에 가까운지 그림자에 가까운지 그리도 치열하게 골몰하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은 거대한 빛인 걸까 거대한 그림자인 걸까. 나는 빛에 가까울까 그림자에 가까울까. 이제 하나로 수렴되는 물음, 나는 세상과 가까울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세계는 선명해지기보다는 모호해진다. 호기심이 많아 모든 것에 답을 찾고 싶어했던 어릴 적의 나에게서 멀어질수록, 삶과 세상은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투성이라는 것만 확실해진다. 광원과 더욱 멀어질수록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흐려지다 결국 하나가 되는 것처럼, 이 세상은 온통 옅고 흐리고 모호하다. 같은 이유로, 나와 세상의 경계 또한 옅고 흐리고 모호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좋다. 나의 그림자와 사물의 그림자가 맞닿던 순간의 조그만 혹처럼, 나와 세상이 경계 없이 모호해지는 수수께끼의 순간이 좋다. 나를 영원의 순간에 들여보내는 것은 그런 수수께끼들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나는 영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림자 놀이를 더이상 즐기지 않아도 나는 영원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상의 진짜 색깔이 무엇인지, 나의 진짜 색깔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괜찮다.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듯, “대상들은 색깔이 없”지 않은가. 빛인지 그림자인지 모를 세상이 있고 내가 있다. 그것만으로 이미 나의 삶은 영원해질 수 있다. 세상과 내가 작은 혹으로 맞붙어 있음을 느끼는 지금의 순간. 이런 순간을 오래오래 살고 싶다.

어쩌면 나의 그림자 놀이는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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