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시작하자.‘
2011년 광화문 교보문고 핫트랙스에는 신기하게도, 당시 아무도 모르는 첫 EP 음반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연인지 실수인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오프라인에서 그래도 만날 수 있던 시절.
그 이후에 그나마 조금 더 나은 정규 음반들을 냈지만 종종 가던 교보문고 핫트랙스는 물론이고 오프라인 매장에서 나는 내 음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사이 이미 오프라인 시장은 온라인으로 엄청 기울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아무리 상을 받은 음반이어도 우리는 그저 관심 밖의 무명 밴드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유통도 되지 않고 있고 나도 까마득히 잊고 있던, 유통사에 남아있던 옛 EP 음반 재고를 받아왔었는데 그 재고에는 그냥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음반도 있었지만 오프라인 매장까지 갔다가 반품되어 돌아온 음반들도 십여 장 있었다.
반품된 것들은 비닐 포장 상태가 좋지 않아 판매용으로는 쓸 수가 없어 비닐을 하나씩 뜯어내어 선물이나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그중에 이게 붙어있는 음반을 발견했다.
오프라인 매장 한구석에 있다가 다시 창고로 돌아가고, 오랜 시간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가 다시 돌고 돌아 내 손으로 돌아온 2011년 그 시절 핫트랙스 딱지가 붙은 이 음반.
나에겐 나름 기념이 되고, 의미도 있고, 언젠가 지금보다 더 나은 음악인이 된다면 이 시절을 잊지 말자는 생각에 이건 비닐을 뜯지 않고 미개봉 상태로 잘 보관 중이다.
지금 들으면 부족함과 부끄러움이 가득한 첫 EP 음반이지만 그때는 진심과 열정을 다했던 음반이었다. 어쨌든 첫 출발이 있었으니 지금 뭐라도 있는 것이겠지.
요즘 들어, 사람들은 보지도 않는 5년이 다 되어가는 여행 영상을 편집하고 있노라니 음악 작업도 아니고 뭐 하러 시간 날려가며 이걸 하고 있을까 생각도 들지만, 얼마 전에 문득 든 생각이 나태해지고 수지 타산이나 생각하던 나를 일깨워줬다.
‘많이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시작하자.’
사실 이 [상실의시대] EP도, ‘이상의날개’ 밴드 활동도 그렇게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 당시,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어느덧 잊고 있었는데, 매년 돌아오는 이 시기에 다시금 되새겨보게 된다.
지금 돌이켜보면 새파랗게 젊었고, 시작하기에 전혀 늦지도 않았는데 그땐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조금은 어리석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지금 하는 것, 하려는 것들도 미래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겠지.
12년 동안 잘 견디고 버티었다. 앞으로도 그래야지. 느려도 조금씩 해야지. 2011년 3월 25일 핫트랙스 딱지가 붙어있는 CD를 보며 2023년 3월 25일에 다시금 마음을 챙겨 본다.
2023.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