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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모리 Oct 09. 2022

대낮의 커피 테러, 인종차별 없다는 캐나다에서

주간 토마토 - 토론토에서 맞이하는 토요일 아침

캐나다에 온 지 열흘이 됐다. 

소소한 행복과 드문드문한 불행이 오갔다. 이를테면 던다스 광장에서 샘플로 받은 친환경 세제는 소소한 행복, 보증금을 이체하자 사기가 의심된다며 카드가 정지된 건 드문 불행이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겪지 않았을 일을 더듬으며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좀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우버 기사가 "왜 캐나다 왔어? 한국이랑 엄청 멀잖아"라고 물어봤을 때,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와 캐나다를 고민했는데 캐나다가 상대적으로 인종차별이 덜하대서"라고 얘기했다. 유색인종인 우버 기사도 적어도 캐나다는 인종차별 문제는 적다고,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길을 걷다 친해진 마크가 밤 9시에 자전거 타자고 했을 때, "위험하지 않아?"라고 하자 마크는 껄껄 웃었다. 캐나다는 안전해. 길가에 있는 홈리스한테 말만 알 걸면 돼. 말 걸면 그냥 무시해.


포트폴리오 업데이트하고 레쥬메도 쓸 겸 토론토에서 제일 큰 도서관인 'Toronto Reference Library'에 갔다. 토론토 대학 근처고, 주변에 고급 호텔과 명품샵, 좋은 레스토랑도 많은 번화가에 있다. 걸어서 40분 정도길래 오전 11시쯤 나와 터벅터벅 걸어서 도착했다. 


도서관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누가 소리를 질렀다. 에어팟을 빼며 힐끔 보니 나한테 뭐라 뭐라 하는 것 같았다. 캐네디언이 알려준 수칙 하나. 홈리스나 길가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무시할 것. 눈을 피하려던 찰나 후두둑- 뭐가 쏟아졌다. 커피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순간 얼어붙었다. 대낮에, 토론토 도서관 앞에서 저 여자가 나에게 던진 커피를 뒤집어썼다. 그 자리에 멈춰서 커피가 날아온 쪽을 쳐다봤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쳐다보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뭘 쳐다봐. 차이나로 꺼져!

이거 안 보여?


소매를 걷더니 손목에 두른 칼을 보여주며 내게 다가왔다. 왜 손목에 칼을 차고 다니지? 피하자. 일단 피해야 된다. 손을 덜덜 떨며 한국에 있는 친구한테 전화하니 또 소리를 지르면서 누구한테 전화하냐며 쫓아왔다. 황급히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고, 화장실로 숨었다.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폭력이 더해지니 견디기 어려웠다. 흔한 일이 아니고, 특별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다. 알고 있다. 아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저 문 밖에 여전히 칼을 들고 있진 않겠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지나간 장면이 다시 떠오르며 하지 못한 말과 왜 하필 나였을까, 수많은 왜가 떠올랐다. 왜 아무도 안 도와주지? 그렇게 사람이 많았는데. 눈 마주친 사람도 있었는데.


진정된 후에 도서관 로비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미 그 사람은 사라진 것 같았다. 이미 오늘 하루는 망쳤고,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했다. 신고는 늦었고, 안전 가드에게 상황이라도 말해야겠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 도서관 앞에서 누가 저한테 의도적으로 커피를 던지고, 칼로 위협했어요. 이미 사라진 것 같은데 밖에 나가기가 무서워요. 


가드는 깜짝 놀라며 몇 가지 주변 순찰을 강화하고, 필요하면 CCTV를 기반으로 신고해주겠다고 얘기했다. 사실 다 못 알아 들었다. 신고하고 싶어도 언어가 나오지 않았다. 다른 가드가 오더니 나를 지하철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정말 흔한 일은 아니야, 괜찮아? 뭐 좀 먹을래? 바로 집에 갈거니? 어디서 왔어? 이름이 뭐야? 남자 친구 있어? 응?


지하철역에 있는 팀호튼 카페에서 핫 초콜릿 한잔을 얻어 마셨다. 좀 진정이 됐는데, 가드가 자꾸 말을 걸었다. 


너 오늘 저녁에 일정 있어? 바로 집에 가?
아니 딱히 없어. 오늘 하루 망쳐서 그냥 숙소 가려고
그래? 그럼 너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올래? 아니면 호텔?
..??
나 네가 좋은데 너 캐나다에서 남자 친구 안 만들어? 내 여자 친구 할래?
도와준 건 고마운데 나 이제 갈게. 


인종차별과 캣 콜링. 환멸이 났다. 정말 간절하게 한국음식이 먹고 싶었다. 지금까지 한인타운 근처도 안 갔는데, 오늘을 위해서였나 보다.


육개장을 시켰다. 인종차별주의자와 플러팅 보이, 옐로우 피버. 모두 안녕히 뒤지시길. 육개장으로 장례를 미리 치릅니다. 너무 맛있게 먹고 가게 주인인 한인 사장님께 오늘 겪은 일을 얘기했다. 


"저는 20년째 캐나다 살았는데 한 번도 그런 일 없었어요. 세상에.. "라며 몸을 부르르 떠셨다. 잔돈은 괜찮습니다. 맛있게 먹었어요. 정말 별일이네요. 제가 조심한다고 될 일은 아닌데. 


밥을 먹고 코인 빨래방에 갔다. 옷은 이미 커피 얼룩으로 엉망이었다. 던다스 광장에서 받은 소소한 행복, 세제 덕분에 얼룩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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