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모리 Feb 27. 2023

캐나다에서 받은 첫 수표

토마토 - 토론토에서 맞이하는 토요일 아침


22살, 학교 앞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끔 친구들이 찾아와서 "어이 노엘아가씨, 늘 먹던 거로 줘" 하면 나는 낄낄대며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재떨이를 내어줬다. 노엘 카페 사장님은 맥심 믹스커피를 좋아했고 나는 커피를 못 마시는 바리스타였다. 바리스타는 너무 거창하고 그냥 카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빙수 주문이 들어오면 만들기 귀찮아서 재료가 떨어졌다고 거짓말하는...


6년이 지난 지금, 토론토 로컬 카페에서 메인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커피를 못 마신다. 이 두 문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워킹홀리데이로 캐나다에 온 외노자답게 나는 전형적인 일을 찾아야 했다. 직접 가게에 찾아가 심호흡 한 번 하고 준비한 문장을 외워 밝게 인사 후 안부를 묻고 매니저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레주메를 놓고 가는, 이 과정을 언제까지고 피할 순 없었다. 워킹 없는 워킹홀리데이는 숨만 쉬어도 돈이 사라지는 토론토에서 조급함과 외로움만 남길뿐이다.


도서관에서 이력서 10장을 인쇄해서 무작정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가장 큰 쇼핑몰인 이튼센터에 하이어링이 붙어있는 가게마다 레주메를 돌리면 10장은 금방이겠다 생각했다. 수줍어야 할 때는 객기를 부리고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일에 수줍은 나는 고작 3장을 돌리고 현타와 함께 집으로 왔다.


집에 오는 길에 오픈 준비 중인 카페에 붙어있는 채용공고를 봤다. 이메일은 쉽다. 레주메를 보내고, 다음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받았다. 통신사 스팸전화가 아니라 카페 매니저였다. 바로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유튜브로 카페 인터뷰 시나리오를 연습하고 자기소개를 외웠다. 대부분 후기는 딱딱한 인터뷰라기보단 스몰토크가 다라고 하길래 사실 별로 준비하지 않았다. 자기소개를 해보세요. 좋아 예상대로군. 인생과 인터뷰는 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단점이 있다.


당신의 미래 목표는 무엇입니까?

0점부터 10점이 있습니다. 당신은 우선순위를 조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스코어와 함께 이유를 알려주세요.

team oriented, organization... blah..


나는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하하 웃으며 질문이 긍정적인 것 같으면 "definitely 10 score"라고 대답했다. 무슨 질문인지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나는 책을 읽지 않고도 책을 읽은 척 발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충 눈치껏 대답했다. 커피를 너무 좋아하고, 여기서 내 미래 커리어를 쌓고 싶다는 다소 과장된 열정과 함께.


인터뷰가 끝나고 나는 망한 것 같음을 느끼고 그냥 허허 웃기만 했다. "보통 3일 정도 뒤에 결과를 알려주는데, 모리 축하해 너는 기다릴 필요가 없어. 우리 가게에 딱 맞는 파지티브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너를 메인 바리스타로 채용할 거야." 역시 뭐가 부족해도 허허실실 웃으면 착해 보이나 보다. 착한 사람을 좋아하는 매니저는 착한 사람인 것 같다.


면접은 11월 말이었으나 가게는 12월이 다 끝나갈 무렵에도 여전히 오픈 준비 중이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으나 결제 시스템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나는 오리엔테이션과 교육 두 번이 끝이었다. 명확한 날짜를 알려주면 좋을 텐데 12월 말쯤에는, 1월 초에는 이런 식이었다. 어장에 갇힌 나는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에는 지금 어장이 좋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다행히 12월은 출판 외주 성수기라 외주 일로 한 달을 벌어먹고 살 수 있었다. 덕분에 내가 어장관리 당하는 중이라는 심각한 고민은 조금 덜 수 있었다.


카페는 1월에 드디어 가오픈을 했다. 나는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9시-15시 풀타임으로 고용됐으나, 가오픈 기간에는 제한된 쉬프트만 받았다. 1주일에 2~3번 정도 일하며 감을 잡았다. 일 하는 시간이 너무 적어서 1월에는 일본라멘집 인터뷰를 보고 일 두 개를 병행하려 했다. 4시부터 11시까지 라멘집 서버 일을 하면 팁도 받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9-15시였던 카페 일 시간이 11- 17시로 바뀌고, 갑자기 마감 교육도 잡히고, 1월 말에는 그랜드 오픈 할 거라고 하길래 카페 일만 집중하기로 마음먹고 정중하게 서버 포지션을 거절했다.


글을 쓰고 있는 2월 말까지도 카페는 여전히 가오픈 중이다. 그랜드 오픈 이후로 풀타임으로 일하고 직원 할인도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아직도 묘연하다. 매니저는 착한 사람이지만 캐나다는 장사하기에 못된 곳이다. 공사도 설치도 무조건 기다려야 한다. 기약 없이. 진작 다른 일을 잡았으면 더 좋았을까를 생각했으나, 모든 선택에는 좋은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거창할 것 없이 다시 돌아가도 나는 귀찮아했을 것임을 안다. 페이롤은 2주급이고, 나는 2월이 되어서야 첫 번째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 받은 첫 번째 수표다. (캐나다는 급여를 수표로 준다..)



매니저는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줄 알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고, 카페인 때문에 커피를 한 모금도 먹지 못한다. 매번 커피를 권하지만 이미 마시고 왔다는 둥 다양한 핑계를 댄다. 메인 바리스타인 주제에 라테아트는 형편없어서 가오픈 중인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어떤 날은 팬케이크 반죽을 쏟고, 유리잔을 깨고, 주문을 못 알아 들어서 바쁜 매니저를 호출하고, 현금 결제 거스름돈을 잘못 내어주고, 스티밍 온도가 너무 낮거나 높고, 우유 폼이 후지고, 레시피를 착각하고, 라테를 카푸치노로 만들어 버리고, 원두를 너무 많이 추출하거나 샷 농도를 착각한다. 쓰다 보니 내가 왜 채용됐는지 의문이다.


beautiful (짱)

You are the best. (네가 최고야)

You can see how you are perfect (네가 얼마나 완벽한지 봐봐)

I don't need to check coffee orders, coz you did great. (네가 잘해서 커피 주문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어)

You are the first barista who memorize all the recipes just in one day. (너는 모든 레시피를 하루만에 외운 첫 번째 바리스타야)


매니저는 칭찬이 후하다. 양치만 해도 칭찬받던 유치원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데,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다. 칭찬에 약한 나는 청소를 한 번 더 하고, 미리미리 재료를 채워 넣고, 설거지를 한다. 매니저는 아무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파악한 것 같다.


노엘아가씨는 결코 손님과 얘기하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이요, 영수증 필요하신가요 - 가 대화의 전부였다. 캐나다 손님들은 다정하다. 날씨 얘기부터 메뉴 추천까지 나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 나도 최대한 친절하고 말 많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영어가 노력하는 마음을 다 보여주진 못한다. 그래도 단골손님이 생겨서 내가 보고 싶었냐고 농담할 수 있는 정도가 됐다. 아, 농담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도하며 우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