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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모리 Apr 14. 2023

겨울에 보지 못했던 여름의 얼굴들

토마토 - 토론토에서 맞이하는 토요일 아침


간밤사이 토론토에 여름이 찾아왔다. 어제까지 입던 기모 외투를 챙겨 나왔는데 등허리에 땀이 흘렀다. 나무는 아직 앙상한걸 보니 나만 어리둥절한 건 아닌가 보다. 창 밖으로 보이는 꽃망울이 하루가 다르게 두툼해진다.


겨울 내내 토론토의 여름에 대해 들었다. 캐나다는 겨울로 유명한데 토론토는 그중에서도 악명 높다. 5월까지도 눈이 온다는 얘기를 11월부터 들은 나는 바짝 긴장했다.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겨울을 저주하며 눈폭풍 소식에 몸을 사렸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이 정도쯤이야, 하며 대수롭지 않았다. 눈폭풍에 관공서가 학교가 버스가 문을 닫았을 때는 참을 수 있었지만 나의 타코야키 모임이 취소된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집에 있고 싶지 않다며 강하게 만나자고 주장하다 광인이 되어버렸다. 토론토에서 겨울을 나는 현명한 방법, "따듯한 나라로 떠난다" 이런 밈은 캐나다에서 유명하다. 실제로 토론토에서 세계 최고 휴양지인 멕시코 칸쿤까지는 비행기로 4시간이면 간다.


쌓인 눈이 진창이 되어 겨울 신발이 없으면 나갈 수 없는 날들을 집 안에서 보냈다. 캐나다의 겨울은 슬로우 시즌이라 일도 없고 사람도 없다. 인동차를 마시는 기분으로 긴 겨울을 집에서 견뎠다. 하루는 너무 지겨워 초코칩 쿠키 베이킹을 시도했고 화씨와 섭씨를 착각해 쿠키는 다 타버린 브라우니가 됐다. 겨울이 너무 길어. 비가 오는 것보단 눈이 좋긴 한데, 매일 오는 눈은 반갑지 않아. 영하 18도에 너무 춥다고 발목까지 쌓인 눈을 불평하자 토론토 현지인들은 이번 겨울은 따듯하다고 했다. 그리고 항상 토론토의 여름을 얄미울 정도로 찬양했다. 토론토 아일랜드에는 누드비치가 있고, 피크닉과 공원 호수와 해변. 온갖 재미있는 일들이 여름에 있을 거라며. 외로워서 만난 겨울의 인연은 여름이 되면 헤어질 거라고. 아직 토론토의 여름을 겪어보지 못한 나는 겨울도 여름찬양도 그저 권태로웠다.


3월 어느 날은 하루 만에 한 장소에서 사계절을 겪었다. 오래간만에 화창하고 따듯한 날에 기분 좋게 출근했는데, 갑자기 쌀쌀해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한 시간 뒤 눈폭풍이 몰아닥쳤다. 3월은 으레 봄이라고 약속된 계절 아닌가, 한국 친구들이 보내는 벚꽃 사진이 이젠 정말 멀게만 느껴졌다. 6개월 동안 겪은 토론토는 웅크리고 찡그린 얼굴들 틈에서 잰걸음으로 걷는 도시였다.


반팔을 입고 있는 저녁 8시가 어색하다. 아직 여름옷은 캐리어에 있고 겨울옷을 미처 정리하지도 못했는데 따듯한, 더운 날들이 갑자기 이어졌다. 매일 다니는 길거리에 새로운 얼굴들이 보였다. 윗옷을 벗고 우버용 음식 보냉가방을 메고 자전거로 배달하는 사람, 얼굴까지 문신한 사람, 팬티가 다 보이게 바지를 내려 입은 사람, 노브라에 얇은 나시만 입은 사람, 윗옷을 벗고 열쇠 꾸러미를 목에 걸고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뛰는 사람, 손을 잡고 다정하게 눈 맞추며 걷는 여자들, 하이힐을 신고 치마를 입은 남자들. 나는 아직 반팔도 어색해 후드집업을 챙겨 나왔는데 사람들은 이미 여름 안에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여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한 줌의 겸연스러움도 없었다.


이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에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카페 창문을 열어두고 팔짱을 끼고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실례임을 알면서도 자꾸 눈이 갔다. 부활절이 있는 긴 연휴여서 오가는 사람도 유독 많았다. 한 남자가 내가 일하는 카페 앞으로 오더니 사람들에게 컵을 내밀었다. 늙고, 마르고, 남루한 그는 팀홀튼 카페 컵에 동전을 구걸 받았다. 창 밖으로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갑자기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캐나다 국민 카페 팀홀튼의 대표메뉴인 더블더블은 다방커피 맛인데 워낙 맛있어서 노숙자들도 자주 와서 사 먹는다고 들었다. 내가 일하는 카페에도 더블더블이 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인사하고 주문받을 채비를 했다. "God bless you". 그는 나를 축복하는 긴 인사와 동전을 남겨두고 그대로 떠났다. 25센트 몇 개와 1달러. 방금 구걸한 동전과 환한 웃음과 축복이 내 손안에 있었다.


여름을 목 빠지게 기다리며 여름 대화에서 소외되던 나는 막상 여름이 오자 허둥거린다. 겨울용 이불이 그대로 침대에 있고, 패딩과 코트도 아직 옷걸이에 걸려있다. 토론토의 계절은 변덕스러워서 갑자기 여름이 왔다가 또 겨울로 돌아가곤 한다. 다음 주에 눈이 온다고 해도 나는 조금 놀라고 그러려니 차분한 척을 할 것이다. 겨울에서 초봄에서 봄에서 초여름으로. 희미한 경계와 자연스러운 변화에 익숙하던 나는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여름 안에 있었지만, 토론토는 새롭다. 아직 조금 보여준 여름의 얼굴을 아무 채비도 못한 채 반기는 중이다. 각자 겨울을 견디고 나온 사람들이 얼마나 다채로울지를 조급하게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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