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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파트 Apr 27. 2020

모두 떠나고 난 저녁, 비로소 진짜 가파도

가파도 백패킹 이야기

사람이 그리운 섬, 가파도


제주도 서남쪽 모슬포에서 배를 타고 10여 분. 무척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지만 가파도는 본래 외로운 섬이었다.


모두가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로 향하는 배를 타고 지나갈 때, 가파도는 뱃길 가운데 서서 지나가는 이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사람이 그립고 사람이 필요했던 섬 가파도. 흙바람이 세차게 불어 농사도 쉽지 않고 배를 띄우기도 어려웠던 섬 가파도. 관광객들도 거의 찾지 않았었던 중간의 섬 가파도.


그래서 오랜만에 찾은 가파도에서의 백패킹은 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울 것으로 기대되었고, 아주 드물게 바람이 세지 않고 하늘이 더없이 파랬던 어느 봄날, 가파도에 설레는 발을 디뎠다.



가파도는 무척이나 낮은 섬이다.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 해발 20m 밖에 되지 않는다. 섬 전체에 전신주가 없어 그 낮은 지면에 뿌려진 청보리는 더욱 돋보인다. 천천히 걷다 보면 아주 어린 시절 동화책 속에서나 존재하던 마을이 비로소 눈 앞에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이 푸른 길이 아주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가파도에는 하루에 일곱 번 배가 들어왔다 나간다. 모슬포 하모리 운진항에서 아침 아홉 시에 떠나는 배가 10분 만에 가파도 북항에 도착하고, 오후 네 시 이십 분에 마지막 배가 가파도에서 떠나면 섬 전체는 이른 휴식을 맞이한다.



가파도에서 처음 보게 되는 제주도의 모습은 아주 낯설다. 바다 건너 바로 보이는 모슬포의 송악산과, 사계리의 산방산, 그리고 저 멀리 한라산까지 켜켜이 키대로 줄을 서 있는 장면은 가파도 북쪽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인 것이다.


사계리 앞바다의 형제섬도 또렷이 보인다.


이렇게 잔잔한 바다가 제주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바람이 지나가는 곳이라는 사실을 외지인들은 잘 모른다.

이 바다가 집어삼킨 무수한 슬픔은 여전히 제주인들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


늘 바람 앞에 겸손하고 파도 앞에 고개 숙이는 것, 그것만이 섬사람들이 파도와 바람에 무너지고 부서지면서도 지켜야만 했던 제일의 덕목이었다.


가파도에 마련된 올레길 10-1 코스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걷기 쉬운 길이다. 섬을 S자로 순회하며 걷는 이 코스는 가파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파도의 즐거움과 슬픔은 무엇인지, 가파도가 얼마나 사람을 그리워했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가파도의 진가는, 모든 관광객이 떠나 버린 오후 네 시 이십 분 이후에 비로소 드러난다.


단지 섬 주민 몇십 명만이 남아 이르게 일과가 정지된 섬의 찬란한 노을을 만끽할 때, 가파도에 들어와 잠시 발을 붙인 백패커는 단 하루의 게스트가 되어 그 아름다움을 눈에 빌려 담았다.


푸르른 청보리 위로 내려쬐는 노랗고 붉은 마지막 햇살, 그 사이로 살랑거리는 바람은 여행자를 몇 번이고 멈춰 세우고는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특별한 저녁을 선사해 주었다.


눈 앞에 보이는 청보리와 노을도 아름답지만, 이 장면의 주인공은 바람이다.

내 상기된 뺨에 아른거리는 제주 저녁 바다 바람의 다정함이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함께 전해지길 기원한다.


가파도에서 백패킹을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환해장성이 바람을 막아주는 동쪽 해안가였다. 청보리가 심어지지 않은 비농지를 찾아 오늘 몸을 뉘일 곳을 정했다. 가파도를 걸으며 만난 주민들이 추천해 준 장소였다. 모든 주민들이 가파도의 거센 바람에 텐트가 날릴까 걱정을 해 주었다. 가파도 사람들의 세심함과 다정함에 새삼 감동한다.


그리고 이보다 더 환상적인 텐풍을 만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박지의 모습이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사진에 미처 제대로 담지 못한, 광공해 없는 가파도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의 노래가 있었다.


그 밤 노래를 듣기 위해 새벽에 일부러 깨어 바람 부는 가파도 밤 풀밭 위에 누워있던 시간은 누구에게나 인생에 잊지 못할 최고의 시간 중 하나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밤새 분 바람은 새벽의 해가 뜨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환해장성 위로 비치는 돌아온 태양의 노란빛이 반갑다. 큰 나무가 없는 가파도 위의 태양이 밤새 젖었던 텐트를 빠르게 말려낸다.



아홉 시 첫 배가 들어오기 전 까지는 아직 섬사람들의 시간이다. 산 정상의 백패킹처럼 빠르게 철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일출을 맞이하고 다시 텐트로 들어와 쉬다가, 빼꼼히 내다본 하늘이 더욱 정다워 보였다.


그래서 다시 아침 산책을 나섰고, 이렇게 돌담과 청보리와 하늘은 제주다운 색의 향연을 각자 뽐내며 이 섬의 매력을 한껏 발산해 내고 있었다.


산책길에 만난 가파도 길고양이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손짓을 따라 구르며 춤을 함께 추었다.


아쉽게 떠나기 직전. 텐트를 쳤던 자리를 마치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던 것처럼 왔던 때의 모습 그대로 남기고 일어났다.


아침 배가 들어오고 다시 많지 않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들어와 가파도 명물 핫도그를 찾고 파아란 청보리밭에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외로운 섬, 외로웠던 섬 가파도는 모든 배가 떠나고 난 저녁에 비로소 가파도 다워 지는 것이었고 그 모습은 가파도 섬사람들 외에는 여전히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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