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가뭇없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씨네멘터리’도 3년째 ‘올해의 영화’를 뽑습니다. 뒤돌아 보건대 올해의 극장가는 한 해를 이끌어 가는 조류(潮流)나 패턴, 힘, 결 같은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던 한 해였습니다. 이것이 영화 산업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인지, 올해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의 라인업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쌍천만' 영화가 나온 해였습니다만, (2023년 “범죄도시3”, “서울의 봄” · 2024년 “파묘”, “범죄도시4”) 지속적으로 회복되고 있던 관객수와 극장 매출의 상승세가 꺾이면서 주저앉았고, 이것을 영화 산업의 뉴노멀로 사실상 확정한 한 해였습니다. 공은 다시 영화계로 넘어왔습니다. 영화의 미래는 영화의 재정의를 요구합니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7년 동안 이어졌던 연간 관객수 2억 명 시대가 코로나로 종지부를 찍고 이제는 그 절반 조금 웃도는 수준에서 고착화하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현상에서 할리우드도 예외는 아니어서 2009년부터 2019년까지 연매출 100억 달러를 넘던 북미 시장도 코로나 이후로는 그 고지를 밟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 (외국 영화 대비)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지난해보다 10% 가까이 증가한 57%에 이르지만 관객수 300~600만 명의 중급 규모 흥행 영화는 크게 줄면서 허리가 끊어지는 아픔과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올해 한국 영화 시장 흥행 톱10의 관객수를 지난해 톱10 관객수와 비교해보면(그래프 참조) 6위 이하부터 중급 영화 시장이 얼마나 붕괴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한국과 글로벌 영화 시장 모두 프랜차이즈 영화의 초강세장은 계속 됐습니다. 올해 글로벌 흥행 1~10위까지 영화 중에서 프랜차이즈 영화가 아닌 작품은 《위키드》 딱 한 편이고(이 영화도 내년에 속편이 나옵니다), 한국 시장 흥행 톱10 중 절반이 프랜차이즈 영화입니다. 그리고 독립·예술영화 흥행 톱10 중 절반이 재개봉 영화라는 점도 눈에 띕니다.
이런 가운데 연말을 맞아 세계 유수의 영화 전문지와 미디어에서는 어김없이 ‘올해의 영화’들을 속속 선정했습니다. 제가 과문한 탓일 수도 있는데 최근 몇년 사이 올해처럼 서로 보는 눈이 많이 달랐던 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국영화연구소(AFI)와 『사이트앤사운드』, 『까이에 뒤 시네마』, 『뉴욕타임즈』, 『뉴요커』가 각각 뽑은 ‘올해 최고의 영화 10’ 리스트를 살펴봤는데요, 거의 다른 리스트라고 해도 좋을만큼 겹치는 영화가 드물었습니다. 『뉴욕타임즈』는 자사의 저널리스트 두 명이 각각 선정한 두 개의 리스트를 제시했는데, 심지어 동료인 두 사람의 순위 안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영화조차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그린 보더》 딱 한 편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위 다섯 곳의 10위 안에 모두 들어있는 영화는 전무(全無)하고, 『까이에 뒤 시네마』를 제외한 네 곳에 공통적으로 10위 안에 든 영화도 《니켈 보이즈》 한 편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제시한 올해 최고의 영화 50여 편 가운데 한국에서 개봉한 건 10편 남짓입니다.
‘씨네멘터리’도 ‘올해의 영화 10’을 선정했습니다. 저 역시 다양한 평가들을 참고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리스트는 제 안에 있는 마음의 진자나 저울이 기우뚱하는 순간을 만들어낸 영화들로 채워졌습니다. 다만 -영화학자나 비평가가 아니라- 영화에 대해 칼럼을 쓰거나 코멘트하는 저널리스트로서 이 시대(의 삶)를 보여주는 영화들에 끌리고 있다는 것을 털어놓습니다. 리스트의 순서는 개봉순입니다.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확신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면 정황을 봐야해요 (추락의 해부)
지난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추락의 해부》는 ‘진실은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영화의 매력은 이런 거대 담론을 담는 그릇이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의문의 사망 사건, 즉 가정사 또는 부부지간의 일이라는데 있습니다. 새로운 스타일의 법정 드라마가 주는 흥미가 진진한데다 쇼팽을 변주한 OST는 노동요로 쓰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나왔다고 거기서, 겁나 험한 게 (파묘)
올해의 흥행 1위는 《파묘》입니다. 오컬트 장르 영화와 대중 영화의 앙상블, 베테랑 배우와 중견·신인 배우의 앙상블, ‘무속과 컨버스’라는 전통과 모던의 앙상블이 ‘새롭다’라는 관객들의 인식을 이끌어냈습니다. 지금 한국 영화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새로움’입니다. 김고은은 이 영화로 차세대 대표 여배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세계라고 하는 것은 저쪽을 향해서 가면 반드시 결국 이쪽에서 돌아온다. 그런 겁니다 (오키쿠와 세계)
《오키쿠와 세계》는 일본 에도 시대의 직업인이었던 ‘똥퍼’ 청년들의 삶과 몰락한 사무라이의 딸 오키쿠의 사랑을 똥을 매개로 더럽게 웃기게 그려낸 흑백 영화입니다. 제작비가 없어 3년 간 12회차 만에 찍어낸 이 영화는, 영화는 돈이 없으면 만들 수 없지만 돈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키네마준보』가 뽑은 2023년 일본 영화 베스트 1위 작품입니다.
문제는 균형이야.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수의 미디어에서 올해의 영화로 꼽힌 흔치 않은 영화 중 하나로 하마구치 류스케를 3대 국제 영화제와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한 그랜드슬램 감독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 영화 역시 깊고도 아리송한 질문을 던지며, 감독 특유의 개성있는 대화씬과 리듬으로 풀어나가는 영화입니다. 작은 산골 마을에 사는 홀아비 타쿠미가 글램핑장을 건설하겠다며 온 도시인들을 상대로 벌이는 행각의 끝은 여전히 충격적입니다. 티없이 깨끗한 눈밭이 배경이어서 더더욱.
그이는 저를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고 불러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새 술은 새 부대에, 새로운 내용은 새로운 형식에. 새로운 스토리텔링은 새로운 비주얼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홀로코스트 영화의 새로운 전범(典範)입니다. 이 영화와 《추락의 해부》가 칸에서 동시에 상을 받는 바람에 두 영화의 주연인 잔드라 휠러는 떼놓은 당상이었던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칸은 한 영화에 복수의 상을 주지 않습니다) 지난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입니다.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퍼펙트 데이즈)
독일의 빔 벤더스와 일본의 야쿠쇼 코지, 두 ‘선수’가 빚어낸 《퍼펙트 데이즈》는 많은 ‘I’들이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을 것만 같은 영화입니다. (제가 칼럼 제목을 가장 먼저 알리는 에디터도 -MBTI는 모릅니다만- 올해의 영화로 이 영화를 꼽았습니다)
도쿄 시부야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를 연기한 야쿠쇼 코지는 일종의 ‘수도승’이자 ‘미니멀리스트’로서 별 볼 일 없는 청소부의 루틴을 반짝반짝 닦아나갑니다. 이 영화를 본 이후로는 배부른 투정들이 머리 속에서 하나 둘 고개를 들면 히라야마의 삶을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의심할 여지없이 ‘올해의 엔딩’입니다.
왜 사소한 것에 목숨거냐고 하지말고 그냥 쟤한테는 그게 목숨같나보다 하세요 (대도시의 사랑법)
저는 이 대사를 듣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이게 인터뷰 기사였다면 문장 뒤에 ‘(웃음)’이라는 지문을 넣었을 겁니다] 작품성과 대중성 양쪽에서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고, 많은 분들이 ‘올해의 영화까지?’하며 고개를 갸우뚱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세월이 좀 흐른 뒤에는 이 영화가 마치 단원의 풍속도처럼, 영화로 그린 2024년의 풍속도로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룸 넥스트 도어)
올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룸 넥스트 도어》는 올해 봤던 영화 중에 가장 우아하고 미려한 오프닝과 엔딩 장면을 가졌습니다. 감독의 음악적 페르소나인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의 음악과 절정에 이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컬러 감각은 경탄을 불러 일으킵니다. 대교약졸(大巧若拙). 줄리안 무어는 대배우의 경지가 어떠한지 보여줍니다.
고통스러울 겁니다. 지켜보기 고통스러울 광경이죠. 하지만 보기 고통스러워야만 합니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
관객수 3천여 명에 그치고 만 이 다큐멘터리는 마땅히 더 많은 관객들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이런 고통과 비극을 상업적인 계산 끝에 ‘시리즈’로 만드는 것은 당연히 말이 안될 테니까요. 전쟁도 미디어로(가?) ‘소비’하는 세상에서 왜 우리가 절실하게 ‘반전(反戰)’을 외쳐야 하는지 말이 필요없게 보여줍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입니다. 올해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수상작입니다.
이유가 아니라 사정이 있지 않나 (아침바다 갈매기는)
독립 영화가 이런 저런 사회적 부조리와 약자들의 삶을 특유의 만듦새에 담아온 건 사실이고, 그것이 독립 영화의 클리셰가 되버려 비판받는 지경에 이른 것도 사실이고, 《아침바다 갈매기는》도 바로 그 클리셰를 다룬 것도 사실이지만, 때로 중요한 건 ‘왜’가 아니라 ‘어떻게’입니다. 다양한 이슈를 영화에 ‘쑤셔넣은’ 것이 아니라 잘 ‘비벼넣은’ 영화는 선 굵은 연기와 차진 대사를 앞세워 불도저처럼 엔딩을 향해 달려나갑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 수상작입니다.
자, 이렇게 ‘씨네멘터리’가 뽑은 ‘2024 올해의 영화’를 전해드렸습니다.
영국영화협회(BFI)가 발행하는 저명한 영화 잡지 『사이트앤사운드』는 그들이 선정한 ‘올해의 영화’를 소개하면서 이런 글을 덧붙였습니다. 이 의견을 지지합니다.
올해처럼 폭력적이고 분열된 해에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영화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많지만 바라건대 잘못된 정보와 문화 전쟁 그리고 완전히 양극화된 정치 논쟁의 시대에 우리에게 정보를 주고 우리를 교육하고 집단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기를 희망합니다. … 영화는 언제나 여행의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추신>
‘씨네멘터리’가 올해의 영화로 선정한 영화에 대한 자세한 리뷰는 모두 씨네멘터리 연재 칼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추천작으로는 《노베어스》, 《바튼 아카데미》, 《듄: 파트2》, 《가여운 것들》, 《메이 디셈버》, 《키메라》, 《챌린저스》, 《여행자의 필요》, 《태풍클럽》(1985년작), 《러브 라이즈 블리딩》, 《리볼버》, 《룩백》, 《장손》, 《수유천》, 《해야 할 일》, 《클로즈 유어 아이즈》, 《위키드》, 《서브스턴스》, 《시빌 워》(국내 개봉 전)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