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지게 돼.
너에게 감사 / 나태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단연코 약자라는 비밀
어제도 지고
오늘도 지고
내일도 지는 일방적인 줄다리기
지고서도 오히려
기분이 나쁘지 않고
홀가분하기까지 한 게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 많이 지는 사람이
끝내는 승자라는 사실
그걸 깨닫게 해 준 너에게
감사한다.
사랑하는 윤서야.
생일 축하해.
이 세상에 나타나줘서,
엄마에게로 와줘서 고마워.
윤서를 사랑하는 일이 엄마에게는 행복한 일이야.
가끔 엄마보다 더 어른스럽고 성숙해서
엄마에게 가르침을 주는 윤서가
많이 웃고, 많이 즐거워하고
많이 기뻐하고, 많이 감동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
엄마가 언제나 질게.
윤서를 사랑하니까.
사실 윤서가 엄마에게 늘 져주는 기분이긴 해
고맙게도.
오늘 윤서의 날
엄마 기쁨이고 보물인 윤서야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으로
하루를 감사하게 보내자.
2025년 2월 20일 윤서 생일에. 엄마가.
이렇게 편지를 쓰고 난 다음 날, 엄마는 윤서에게 화가 많이 났지.
결국 내가 질 것을 알면서도 말이야.
제시간에 일어나고, 제시간에 자고, 제시간에 먹고, 규칙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는 엄마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을 때 공부하는 윤서는 많이 달라서 말이지.
중학생도 고등학생도 아닌 그 어정쩡한 자유의 몸으로 방학을 누리는 중인 윤서의 시간들이 엄마는 무척 안타깝고, 아까워서 잔소리를 퍼붓고 싶은 걸 꾹 참다가, 아마도 비언어적 메시지로 충분히 전달이 되었을 거 같았지만, 윤서는 요즘 표현으로 chill 하게 넘기더구나.(엄마의 약 올리는 포인트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거 아님?)
화가 많이 났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온몸으로 화를 내는 엄마 눈치를 좀 보면 좋겠다 생각하지. 놀랍게도 윤서는 엄마의 분노에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과 놀고 있을 때, 엄마는 일기를 써.
윤서 흉도 엄청 보고, 윤서가 얼마나 얄미운 지도 쓰고, 윤서에게 뭐가 속상한지도 막 써,
유치하게 말이야. 그러면서 엄마는 알게 돼. 내가 왜 이리 화를 많이 내고 있나?
윤서가 늦잠을 자는 거? 왜 그리 화가 날까?
내 신념이 얼마나 강한지 알겠더라고, 늦잠을 자면 안 되고, 부지런히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면 왜 안되는지 엄마에게 물어보니, 결국 불안이더라,
엄마가 세상을 뜨고 나면 혼자 세상을 살아갈 윤서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엄마가 있는 거지.
엄마의 불안이 시작되면, 아주 비극적 스토리텔링으로 끝을 맺을 때가 있곤 하니까.
그래서 일기를 쓰면 도움이 돼.
내가 얼마나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고, 걱정과 불안으로 인생각본을 쓰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밥도 제시간에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왜 그래야 하지? 엄마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서 도달한 답은
윤서와 같이 밥 먹고 싶어서, 엄마도 윤서에게 챙김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서라는 답을 얻었지.
혼자 밥 먹는 거 엄마는 안 좋아하니까.
결국 윤서의 행동에 대해 화가 난 게 아니라, 엄마가 가진 생각과 신념으로 이게 옳다고 생각하니까
윤서의 행동에 화가 났던 거지. 미안해. 윤서가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텐데 말이지. 너를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에도 좀 화가 나는 거지. 분노를 터뜨리고 나면 엄마가 이래서야 되나 라는 죄책감도 꼬리표처럼 따라와.
일기를 쓰다 보면, 내가 가진 감정, 내가 가진 불안, 내가 가진 욕구를 깨닫게 돼서, 상대의 탓이 아니라
내가 가진 생각으로 만들어 낸 감정에 갇혀 있음을 알고 나올 수 있어서 좋아.
비록 그 일기장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테지만 말이야.
엄마가 재경과 윤서에게 생일마다 축하 시를 남기고,
독립일기로 브런치에 글들을 남겨 놓는 이유는, 언젠가 엄마가 떠나고 윤서와 재경이가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야.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시를 요즘에서야 읽을 때 공감하게 돼.
나를 사랑하셨구나, 걱정하셨구나. 믿으셨구나. 이런 마음들을 이제야 보게 되더라.
엄마도 그러길 바라.
윤서에게 남기는 엄마의 글들이, 엄마의 사랑이고, 엄마의 믿음이고, 엄마의 축복이길 바라.
잘 삐지고, 화도 잘 내고, 잘 우는 엄마를 오히려 토닥거리는 윤서가 엄마에게 늘 져줘서 고마워.
"엄마. 나만큼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걸요?"라고 말하던 여섯 살의 윤서가 있었지.
엄마가 너무나 지치고 힘들 때, 곁에 와서 엄마를 꼭 껴안아주며 말하던 윤서 덕분에
엄마가 많이 웃었지.
물론 지금도 윤서 덕분에 많이 웃어.
사춘기를 잘 지나고 있는 윤서야~~
그래도 가끔은, 아니 자주 엄마에게 좀 물어봐줘. 다정하고 친절하게.
"엄마. 왜 화가 나셨어요? 뭐가 그리 걱정되세요? "
그럼 엄마는 금방 알아차릴 거야.
엄마가 원하는 것과, 엄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윤서와 다르다는 것을 말이야.
언니도, 윤서도 정서적으로 모두 엄마에게 독립하는 중이니, 엄마도 같이 준비 중인데
엄마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좀 늦어. 그래도 속도 맞춰가볼게.
엄마의 정서적 독립을.
그리고 너희에게 진다면서도 뒤돌아보면 너희가 엄마에게 늘 져주고 있는 기분이야.
고마워. 엄마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