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사는 것의미학
오랜 세월을 펜으로 노트에 글을 쓰는 습관을 들였더니, 랩탑으로 글을 쓰는 게 익숙지가 않다.
노트에 글을 쓸 때는 문장이 술술 떠오르는데, 랩탑 화면 앞에서는 머리가 백지장이 된다.
브런치에 글을 올릴 수 있게 되면서 랩탑으로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오늘도 나는 펜을 들었다.
한 번에 익숙해지는 것은 없으니까. 나의 오래된 시간과 습관에게 한 번에 변화되라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하니까.
2016년 미국 이민후 5년 만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에도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3년 뒤 2019년 한국에 재 방문했을 때에는 더 이상 나는 한국에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인공지능 서비스가 달린 티브이 하나를 켜서 보는 것도 어려움이 있었고, 택시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앱으로 콜을 해야 한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여전히 더 빠른 서비스, 더 나은 품질을 추구하는 모습에 사람의 만족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플로리다는 "발전"이나 "속도" 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2-30년 전에 할머니 댁을 가다가 본 듯한 낡은 시골 상가들이 여긴 여전히 존재한다. 몇십 년을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더 이상 발전을 시킨다던지, 리모델링을 한다던지 하는 것이 거의 없이 그냥 그때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다. 그리고 그곳은 몇십 년 전 손님이 여전히 단골로 그곳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세월의 흔적 앞에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길에는 오래된 차들이 더 많고, 누구도 그런 걸로 주눅이 들거나 잘난 척하지 않는다. 오래된 것과 새것이 함께 공존하면서 함께 걸어간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새로운 오늘과 나의 옛 추억들이 공존하는 것이 인생이다.
과거가 있었기에 현재가 존재하고, 완전하다 생각했던 것들도 시간과 함께 불완전한 것으로 바뀌어 간다.
그러니 지금을 너무 완전하게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나의 불완전한 지금이 모여서 미래의 더 나은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의 불완전함과 완전함이 함께 오늘을 사는 것이 인생이다.
결국 새것도 헌것이 되고, 빠른 것도 느린 것이 되며,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가 어느 때 보다도 확실히 증명되는 시대이다. 그러니 너무 "빨리빨리" "더 더" 하면서 자신을 압박하지 말자.
천천히 걸어야 볼 수 있는 것이 많다. 길의 들풀도, 나무에 앉아있는 새도, 길바닥의 작은 돌 하나도. 내 인생에 선물처럼 찾아온 그 작은 순간들이 우리의 무관심 속에 얼마나 슬퍼할까.
빨리 급진하는 세상의 물결은 우리에게 제트스키를 주며 함께 가자 한다. 그것도 익사이팅하다. 그러나 나는 작은 카약 하나를 택하여 천천히 노를 저으며, 인생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던 아름답고 작은 것들을 보길 택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