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반드시"는 없다
플로리다 5월의 하루는 더운 것으로 시작해 뜨거운 것을 지나, 더운 것으로 끝난다.
이럴 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시원한 소나기나 한차례 쏟아지면 좋으련만, 습한 공기와 구름들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부을 듯하면서도 웬일인지 며칠째 비는 오지 않는다.
아침 9시에 반려견 감자와 산책을 나가도 -Sunshine State라는 별명다운- 플로리다의 햇살이, 아침에도 기승을 부려 집에 돌아오면 둘 다 녹초가 된다. 두꺼운 삼중모 털옷을 입은 감자는 조금이라도 시원한 타일 바닥을 찾아 그곳에 털썩 엎드려 버리고 나는 얼른 에어컨을 켠다. 시원한 것도 잠시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추워지기 시작하고, 참다못해 에어컨을 끄면 다시 금세 더워진다.
도대체 어쩌라고.. 그래서 에어컨을 켜고 카디건을 걸쳐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된다.
어릴 때는 뜨거운 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부산이 고향인 나는 4-5살 때부터 할머니를 따라 온천장에 있는 할머니들이 많이 가시는 목욕탕에 자주 갔다.
그곳은 엄청난 곳이었는데, 뜨거운 욕탕에는 심지어 차가운 물이 나오는 "파란색"수도꼭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어린아이가 할머니 따라 그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니, 은근히 그런 손녀가 자랑스러우셨던 할머니는 나를 자주 데려가셨다.
음식도 차가운 것보다는 입천장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것을 좋아하고, 침대보다는 온돌을 좋아하는 내가
뜨거운 플로리다에 사는 건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뜨거운 것을 견디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뜨거운 햇볕에 두통 알레르기도 생기고, 얼굴엔 선크림을 발라도 주근깨가 빽빽이 들어서고, 밖에 주차된 차량에 탑승하다가 허벅지 다 데고, 뜨거운 한 낮엔 실내에 가만히 있는 게 신상에 이로운,
이 뜨거운 플로리다의 삶이 나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이 여름은 플로리다를 떠나고 싶게 만든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시원한 것 같다가 추워지고, 뜨거운 게 좋았는데, 좋아하는 것에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싫어하게 되고, 싫어했었는데 좋아하게도 되고. 지독히 사랑하던 사람이 미워지기도 하고, 영 관심 없던 사람과 어느 날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과연 "내 인생은 딱 이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 아닐까. 인생에 좋은 일만 있으면 그건 "좋은 일"이 아니라 "평범한 일"이 될 것이고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삶은 적절히 오르막과 내리막에 섞여있도록 만들어졌다. 누구도 그 인생을 단정 지을 수 없도록.
플로리다도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찾아오는 겨울이 있다. 그 겨울은 뜨겁고 길었던 플로리다의 여름을
싹 잊게 할 만큼 너무나 아름답다. 가을의 단풍과 봄바람이 섞이고, 초여름의 풀냄새와 겨울의 쌀쌀함이
함께 찾아온다. 그 계절은 플로리다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래서 플로리다를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기나긴 터널 속에도 우리의 인생을 "살고 싶게" 만들어지는 순간이 온다. 반드시.
더 이상 버티는 인생이 아니라 기대하는 인생이 되었으면 한다. 뜨거운 여름을 꺾고 찾아올, 플로리다의 겨울 같은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