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는윤 Jun 17. 2021

플로리다가 내게말해준 것들

쏟아지는 빗줄기가 더 시원한 것은 뜨거운 햇빛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달간 이어진 가뭄으로 집 앞 연못도 다 말라버리고, 하루 종일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을 어떻게 견디나 할 정도로 말라 가는 나무들이 측은하게 여겨질 즈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 단비는 하루에 한두 번 모두가 잠든 새벽시간에 시원하게 쏟아져, 바닥을 드러낸 연못을 순식간에 채우고 촉촉하고 싱그러운 아침을 맞이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참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중학교 때는 비를 맞고 싶어서 집까지 4-5 정거장 되는 거리를 친구와 일부러 뒷 산길을 통해 걸어간 적도 있다. 그때는 비 맞으면 감기 걸릴까, 옷이 젖을까 이런 걱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비가 좋고, 비를 맞아보고 싶고, 그 감성이 너무 좋아서 이런저런 것을 재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손에는 우산을 든 채로.

그 추억은 지금까지 내 기억에 아름답게 남겨져 있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비 맞고 가는 우리를 보시고 놀라 태워준다 하실 때도 우리는 해맑게 "아니요! 괜찮아요!" 하며 까르르 웃었다. 그 먼길을 비를 맞고 걸어가면서도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때는 한창 산성비 때문에 머리카락 빠지지 비를 맞지 말라는 때였는데, 그런 어른스러운 걱정은 순수하고 설렘이 가득했던 10대 소녀를 말리지 못했다. 물론 그 날이후 머리카락이 빠지지도 않았고,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다. 온갖 염려에 눌려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 어른들의 세상-에 들어가기 전, 나는 참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고, 행복한 게 뭔지, 그 행복을 잡을 줄도 알았으며, 온몸으로 느낄 줄도 알았다. 이제는 체면과, 지식과, 두려움과, 염려라는 태어날 때 가지고 있지 않던 많은 쓸데없는 것들을 마음에 장착한 채,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행복을 좇으며 행복이 어디 있냐, 있긴 하냐  한탄하는 날이 많아졌다. 행복을 잡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도 모르고.


그런 내게 비 오는 날은 작은 행복을 마음에 피어오르게 하는 날이다. 비 오고 흐린 날을 좋아하는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여전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왠지 내리는 빗소리를 배경으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기분 좋은 커피 향과 함께 책 한 권 읽는-기분 좋은 설렘이 찾아왔다. 물론 그렇게 하지 못한 날이 더 많지만 말이다. 그냥 그 상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고나 할까.

멀리 쏟아지는 폭우. 저곳을 지날 때는 각오해야 한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비가 무서울 수도 있구나 느낀 것은 20대 초반, 인디밴드의 베이시스트로, 전남 광양으로 공연을 갔을 때였다.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는 시골의 들판을 달리고 있었는데 장대비가 마구 쏟아지는 것이었다. 와이퍼를 최대로 돌려도 양동이로 쏟아붓는 것 같은 앞이 보이지 않는 빗줄기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그때 밴드의 유일한 여자 멤버였는데 그때 옆에 있던 기타리스트 오빠가 " 니는 오빠들이 있는데 뭐가 무섭노" 하며 안심시켜줬던 기억이 난다.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든든하고 멋지던지. 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약 6~7년 후 미국에 와서 그 비를 다시 만났다. 높은 건물이 없어 막힌 것 하나 없는 플로리다의 광활한 하늘에서 비는 어떤 저항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아무리 와이퍼를 돌려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빗줄기에 근처에 있는 Gas station으로 피해 비가 잠잠해 지기를 기다린 적도 있다. 이렇게 쏟아지던 비는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그치고, 순식간에 가득 채워진 호수들과 연못들, 웅덩이 만이 얼마나 세차게 비가 쏟아졌었는지 말해주었다.



처음에 플로리다에 정착했을 때, 꼭 하루에 한 번 비가 쏟아져 뜨거운 여름 열기를 식혀주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비는 어느 비보다 반갑고 고마웠다.  타는듯한 한여름의 햇볕을 온몸으로 맞고 서 있는 야자수들과 나무들의 마음을 달래주며, 플로리다의 뜨거운 열기 속에도 일 년 내내 잔디를 푸르르게 만들어 주는 말 그대로의 단비.

우리네 인생들도 그렇지 않을까. 많은 인생의 순간 한여름 가뭄처럼 모든 것이 메말라가고, 뜨거운 상황과 고통의 시간이 끝날 것 같지 않게 타오르며 맹렬히 덤벼들 때, 언젠가 반드시 시원한 단비가 쏟아질 것을 믿으며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야자수 같은- 우리 삶에도 반드시 생명의 빗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질 날이 온다고.

이 플로리다는 온몸으로 내게 말해주는 듯하다. 그날은 반드시 온다고, 그날에는 그간의 맹렬했던 고통만큼  그 빗줄기는 더 시원할 거라고.



작가의 이전글 빠삐코가먹고 싶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