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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월산 Jun 21. 2020

아빠가 보고 싶을 땐 하얀 밥 위에
명란젓 한토막

브런치 우리가한식 공모전

'뎅뎅뎅뎅...' 오늘도 어김없이 거실의 괘종시계가 울린다. 잠결에 숫자를 세어본다. 일곱 번이다. 조금 더 자도 되겠군. 아침 햇살이 창문을 관통해 굳게 닫힌 내 눈꺼풀을 뚫고 들어온다. 난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버틴다. 오늘도 어김없이 부엌에선 엄마의 분주한 칼질이 시작된다. '탁탁탁탁' 호박 써는 소리, '송송송송' 파 써는 소리가 아침 공기를 경쾌하게 가른다. '보르르르르르' 냄비 뚜껑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저께 친구 집에서 LP판 턴테이블을 처음 구경했다. 친구가 골라준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을 떠올리며, 부엌의 상황을 그려본다. 따라다라단, 따라다라단, 따라라라라따라라라란~ 한껏 웃음을 머금고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춤을 추듯 우아하게 야채를 썰고 있다. 양파와 호박의 단맛이 가미된 된장찌개 냄새가 내 방문을 스윽 넘어 예고도 없이 코로 훅 들어온다. 동시에 '딱딱딱딱' 김치가 들어 있을 사각 스테인리스 통 여는 소리. 아침식사가 준비됐다는 신호이다. "밥 먹고 빨리 학교 가야지!" 엄마의 하이톤 목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지며 나의 음악도 멈춘다.


나의 아침은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엄마가 도마에 야채 써는 소리, 방 밖에서 들려오는 아빠의 분주한 발걸음, 찌개 끓는 소리, 그리고 온 집안을 진동하는 달달한 된장 냄새. 그것은 나에게는 아침을 여는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았다. 그래서 내가 유독 아침잠이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명란젓에 대한 기억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김치와 된장찌개는 식탁과 혼연일체가 된 듯 매끼를 함께했다. 오늘은 웬일로 빨간 소시지 부침이 올라왔다. 세 남매의 바쁜 젓가락질에 소시지가 순식간에 사라질 무렵에야 상 한편에 올려져 있는 명란젓이 눈에 들어왔다. 난 명란젓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섯 살쯤 되었을 때다. 엄마 따라 재래시장에 가는 게 제일 행복했던 시절.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주시는 꿀떡을 얻어먹고 춤을 추며 시장을 누볐고, 눈 앞에서 바로 구워주는 수수부꾸미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호호 불며 먹었다. 그렇게 내 맛집들을 지나 엄마가 다다른 곳은 각종 젓갈을 파는 가게였다. 가게 할머니는 주름진 얼굴로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무엇을 사러 왔는지 묻지도 않고 곧바로 물컹하고 길쭉하게 생긴 물건을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엄마에게 건넨다. 옅은 분홍빛을 띠는 껍질 아래 선명한 푸른 핏줄. 탱탱하게 꽉 차 있는 알. 나는 그렇게 명란젓과 첫 조우했다. 젓가락으로 자르기엔 질겼던 껍질. 비릿한 냄새. 명란젓을 먹어보라는 엄마의 권유에 도리질을 하며 도망쳤던 기억이 난다. 우리 삼 남매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명란젓은 늘 냉장고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땐 명란젓이 그렇게 싸고 흔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빠는 명란젓을 자주 드셨다. 늦게 퇴근한 아빠가 보기에도 퍽퍽해 보이는 명란 찜 몇 점을 안주로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 그것이 명란젓에 대한 내 어릴 적 단상이다.


그렇게 명란젓이라는 이름도 생소하게 느껴질 때쯤, 성인이 되어 일식집에서 계란찜 속에 든 명란을 발견하게 된다. 껍질에 쌓여있지도 퍽퍽하지 않았던, 계란과 어우러진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다. 어릴 적 알던 그 촌티 나던 명란을 고급스럽게 다시 만났던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무의식적으로 명란젓은 일본 음식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아주 어렸을 때는 흔하게 접하던 명란젓을 언젠가부턴 구경할 수 없었고, 원래 좋아하지도 않았기에 잊고 있다가 일식집에서 다시 먹게 된 탓이다.     

아빠의 마지막 모습

2015년, 난 미국에서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잘 적응할 것 같았던 미국 생활은 유독 나에게만 힘들게 다가왔다. 아들을 키우겠다고 직장보다 쉬울 것 같았던 전업 주부의 길을 택했지만, 매일 실수의 연속이었고, 그 어떤 것도 쉽지 않았다. 한식은 평생 안 먹어도 될 것 같았던 내 글로벌화된 입맛도 토종으로 변했다. 매일 먹고 싶은 한식이 생겼고, 밤마다 인터넷 서핑을 하며 한국 가서 꼭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를 만들었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두어 달 전 메르스 바이러스가 한국을 강타했지만, 내 열망을 꺾을 순 없었다. 메르스가 잦아든 7월, 난 마스크로 무장하고 아들과 함께 마침내 한국땅을 밟는다. 아빠는 나의 방문을 반대하셨다. 메르스 바이러스로 위험한 한국을 굳이 올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아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찾아간 한국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그해 여름이 아빠와 보낸 마지막 여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찹찹찹찹', '송송송송'

아빠가 신나게 마늘과 파를 썰고 있다.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아빠는 점심을 늘 혼자 준비해 드시곤 했는데, 명란젓을 즐겨 드셨다. 명란젓에 마늘과 파를 썰어 넣고, 청량고추도 다져 넣고, 그 위에 참기름 두어 방울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깨를 톡톡 친다. 명란젓 특유의 냄새와 참기름의 고소함이 코를 찌른다. 아빠는 명란젓을 갓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에 척 올려도 먹고, 숟가락으로 밥과 슥슥 비벼 점심을 맛나게 드셨다.


"아빠, 근데 명란젓 일본 음식 아냐? 나 어릴 때는 너무 흔했던 거 같은데, 언젠가부터 귀해지고 비싸진 거 같아." 아빠는 놀란 표정을 지으시더니 명란젓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명란은 명태의 알인데, 생태, 동태, 황태, 북어, 코다리, 노가리가 전부 명태를 가리키는 말이고, 가공 방식에 따라, 붙는 이름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명태처럼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생선은 드물고, 명태의 알은 명란젓으로, 창자는 창난젓으로 만들어진단다. 그리고, 명란젓의 원조는 엄연히 한국이고, 한국의 명란젓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양한 요리에 쓰이게 됐다는 것이다. 코다리, 노가리가 전부 각자 다른 생선인 줄 알았던 내게는 명란젓도 한국이 원조라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왔다. 


"우리 손자 맛있는 한국 과자나 좀 사 줄까?" 아빠와 함께 간 집 앞 마트에서 아빠는 젓갈 코너에 들른다. 젓갈을 파는 아가씨가 아빠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나에게도 말을 건넨다. "미국에서 왔다는 그 따님이시구나. 아버님이 매주 오셔서 명란젓 사가세요. 아버님이 명란젓 정말 좋아하시거든요." 아마 아빠는 매주 마트를 들러 명란젓을 사면서 그 아가씨와 두런두런 얘길 나눴던 거 같다. 미국에 살면서 연락도 자주 못했던 미안한 딸이었기에 한편으론 아빠의 말동무가 되어준 그 아가씨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친구를 만나러 인천 송도에 간 날, 핸드폰이 울렸다. 남동생이었다.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셨어." 동생의 담담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외출 나간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장례식장에 걸려 있는 환하게 웃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보고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우리 가족은 그렇게 아버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유언

일주일이 흐르고, 또 다음 일주일이 흘렀다. 낮엔 아버지의 유품 정리를 하고 또 망연자실한 엄마를 위로하기도 하고 저녁엔 홀로 숨죽여 우는 날이 이어졌다. 다들 잠든 밤에 혼자 아버지가 썼던 방을 둘러보고, 아직 정리하지 않은 아버지의 물건을 만져본다. 아빠의 손글씨는 참 멋스러웠고, 글도 잘 쓰셨다.

손자에게 장난감 사라고 용돈 주시면서 봉투에 쓴 글귀가 좋아서 아직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쪽에 놓여있는 둥근 사기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명란젓을 본인의 레시피로 양념해 넣어두시던 그릇이다. 뚜껑을 열어보니 반쯤 먹다 남은 명란젓이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 올랐다. 보라색 반팔 상의에 진녹색 반바지를 유니폼처럼 입고 콧노래를 부르며 마늘과 파를 썰던 아빠의 뒷모습. 그리고 하얀 쌀밥에 명란젓을 맛있게 비벼 드시던 모습까지. 그 그릇을 들고 한참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날이 밝았다. 아침을 먹고 집 근처 마트로 향했다. 명란젓 코너의 그 아가씨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오셨네요."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아버님은 안 보이네요? 매주 오셨는데, 어디 여행이라도 가셨는지, 아니면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닌지 걱정했어요."


눈물이 차올랐지만 힘겹게 누르며 입을 열었다.  


"아빠가... 2주 전에 돌아가셨어요. 매주 여기 오셨던 거 같은데, 궁금하실 거 같아 알려드리러 왔어요."


깜짝 놀란 아가씨도 눈 주위가 뻘겋게 되더니,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못 오셨구나... 아버님 좋은 데 가셨을 거예요.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제가 야간 대학교 다닌다고 했더니, 자주 오셔서 팔아주셨거든요. 그리고, 따님 진짜 사랑하셨어요. 늘 저한테 훌륭한 딸이라고 자랑하셨거든요. 마지막으로 오셨을 때,  딸이 아들 키우느라 지금은 쉬고 있는데 언젠간 자기의 길을 갈 거라고, 믿는다고 하셨어요"


둑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 아가씨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엉엉 울었다. 아버지께 좋은 선물 하나 해 드리지 못했는데, 마지막 모습도 지키지 못하고 유언 조차 듣지 못한 채, 아버지를 그렇게 보냈다. 유학하느라 돈도 많이 갖다 썼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타국 생활 힘들다고 칭얼대며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서운한 감정도 미운 감정도 없으셨던 거다. 항상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아빠는 살아생전 본인이 늙어 병원에서 투병하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고,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아빠다운 방법으로 내게 유언을 남기고 가신 것이다. 아빠가 남긴 말을 되씹으며 며칠을 울었다. 어느 날 아침, 장례식을 치른 후 처음으로 뭔가 씻겨 내려간 것 같은 개운한 느낌으로 눈을 떴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명란젓 한토막을 하얀 밥 위에 올리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아빠 생각을 하며 자주 울었고 때로는 깊은 슬픔에 잠겼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떠 올리며 마음을 다졌다. 내가 슬퍼하는 모습을 아빠가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디에 계시던 나를 믿고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텨 아빠가 돌아가신 지 올해로 5주기가 되었다. 아빠의 기일을 가족과 함께 보낼 생각에 올초에 항공 티켓을 미리 예매했었다. 하지만,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며칠 전 예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가족들도 나도 무척 아쉬웠지만, 나는 아빠가 이해해 주실 것을 알고 있다.


한동안은 아빠가 생각나서 명란젓을 먹지 못했다.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났으니까. 이제는 무뎌지기도 했나 보다. 아빠가 그리울 땐 파송송, 마늘 탁탁 썰어 참기름 두어 방울 떨어뜨려 명란젓을 양념하고, 김이 솔솔 나는 하얀 쌀밥 한 숟가락 위에 명란젓 한토막을 척 얹어 먹는다. 입속에서 마늘과 파, 청량고추가 어우러진 명란젓이 톡톡 터지며 씹힌다. 나는 아빠가 식탁 건너편에 앉아 계신 듯 바라본다. 아빠가 환한 웃음을 띠며 '거봐, 맛있지?"라고 하시는듯하다. "아빠, 내 레시피도 맛있어. 담에 만나면 내가 만들어줄게."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밥 한 그릇을 해치운다. 아빠가 그곳에서도 늘 평안하시길, 오늘도 명란젓 슥슥 비벼 맛있게 식사하고 계시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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