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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월산 Jun 21. 2020

내가 다시 글을 쓰는 이유  #1

내가 꼰 실타래도 나니까. 

넌 커서 작가가 될 거야.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을 땐 여름, 겨울 방학이 끝나면 숙제로 선생님께 일기를 제출해야 했다. 엄마가 일기를 꼬박꼬박 체크하지도, 숙제 안 했다고 야단치는 스타일도 아니었던지라, 난 늘 개학하기 하루 이틀 전에 수십 일간의 일기를 몰아 쓰곤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날씨 앱이 없을 때라 그날의 날씨를 기억하느라 애먹었지만, 매일의 스토리를 꾸며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떤 날은 여동생이 내 일기의 주인공이 되어 주방에서 사고를 치고, 또 어떤 날은 실존하지 않는 동네 아이와 그 아이가 기르는 성질 사나운 개가 주인공이 되었다. 그렇게 며칠 만에 꾸며낸 여름방학 일기가 꽤 재미있었나 보다. 선생님께서 일기를 잘 썼다고 칭찬하셨고, 급기야 내 일기가 어떤 수필 모음집에 초등학생 대표로 실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위의 어른들께 칭찬을 받았지만, 어린 마음에 일기를 꾸며낸 게 들킬까 봐 불안에 떨었던 기억만 생생하다. 선생님께서 내 머릴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넌 커서 작가가 될 거야." 


아빠가 내 방을 국내 위인 집, 세계 위인 집, 전 세계 유명 소설 전집으로 채워주셨다. 난 '치티치티 빵빵'을 읽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며 잠이 들었고, 백작부인 에이미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 나머지 함께 야반도주하다 마차 전복 사고로 사망한다는 비련의 소설을 썼다.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으니, 나는 또래 아이들 대비 꽤 조숙했다. 그 당시 만연했던 각종 글쓰기 대회에서도 심심챦게 수상해서 전교 조례 때 앞에 나가 교장 선생님께 상장도 받았다. 부모님도 학교 친구들도 모두 내가 장차 작가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나 역시 그것이 내 길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의로움이란 무엇인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은 국어 선생님. 글 좀 쓰는 나와 궁합이 맞기도 했으련만, 안타깝게도 그 선생님과의 인연은 나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선생님은 매로 아이들을 다스렸다. 그것도 여고에서. 학교 명찰을 달지 않았다고,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보충학습 교재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막대기로 출석부로 때로는 손찌검으로 매타작이 이어졌다. 


고등학교 들어와 본 첫 모의고사에서 성적이 떨어졌다. 한 명씩 앞으로 불려 나가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내 차례가 왔다. 


"너 다음 모의고사에선 몇 등 할 거니?" 

"글쎄요. 제가 점쟁이도 아니고, 몇 등할 지는 알 수 없고요. 열심히 공부는 하겠습니다."

 

순간 내 귓방망이에 불꽃이 튀는 상상을 했다. 안경을 벗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나의 일격에 당황하셨던지, 선생님은 너털웃음을 웃곤 나를 그냥 보냈다. 일주일 후, 선생님과 우연히 교정에서 마주쳤다. 선생님은 우리 반의 성적이 전반적으로 떨어져 하루 세장씩 빡빡이 숙제를 낼 거라고 하셨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고 말았다. 


"빡빡이 숙제는 비효율적일 거 같은데요." 

"내 십 년 교사생활의 노하우야." 


난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선생님, 저도 올해로 10년째 학교 다닙니다."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았기에 망정이다. 난 그렇게 또 한 번 맞을 고비를 넘겼다.  


체벌은 일 년 내내 지속되었고, 우리는 겨울방학을 앞두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문과, 이과반으로 나뉜다. 난 일찌감치 문과로 지망을 해 놓았다. 당연히 국문학과에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별거 아닐 거 같았던 선택이, 때로는 인생을 통째로 바꾸기도, 또는 평생을 잘근잘근 흔들기도 한다.   


체육수업 후 다들 힘들었던 여름 오후였다. 맨 뒷자리에 앉았던 키가 컸던 그 아이. '빨간 머리 앤'을 연상시키는 붉은빛 헤어와 양볼을 뒤덮은 주근깨. 공부를 잘하진 못했지만, 자주 웃었고 늘 쾌활했다. TV에서 흘러나오던 보충학습 선생님의 목소리가 테이프 늘어지듯 길어지던 순간... 선생님이 들이닥쳤다. 하필, 대놓고 엎드려 자고 있던 그 아이가 걸렸다. 선생님의 불호령과 이어진 손찌검. 그 아이의 빨강 머리칼이 춤추듯 하늘로 솟았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우리는 숨죽였고, 고개를 떨군 채 그 순간이 얼른 지나가기 만을 기도했다. 그날 이후 그 아이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처음으로 깊은 분노를 느꼈다. 내가 비굴하다는 생각을 했다. 난 뭐라도 해야 했다.   

   

겨울방학이 끝나갈 즈음, 선생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사랑의 매로 포장된 체벌은 폭력에 지나지 않음을, 그것이 사춘기를 맞은 여고생에겐 잊지 못할 평생의 상처가 된다는 것, 선생님도 자식이 있으실 테니 본인의 아이가 그렇게 대책 없이 맞는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 물었다. 익명으로 보냈지만, 선생님이 눈치챌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한편으론 편지가 중간에 유실되었기를 바랐다. 남은 겨울 방학은 더 이상 방학이 아니었다. 사실, 난 시름시름 앓기까지 했다. 


선생님께 야단맞는 악몽을 꾼 어느 날, 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뉴스를 듣게 된다. 그 선생님이 이과가 아닌, 문과 국어 선생님으로 간다는 것이다. 나는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이과를 지망한 반 친구가 문과로 오고 싶어 한다는 소식에, 그 친구와 손을 잡고 교무실로 가서 서로 전과를 하고야 만다. 너무나 순식간에 이과생이 되었다. 그를 피할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것이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2학년이 되었다. 언제 그 선생님께 불려 갈까 노심초사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과 친구들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그가 더 이상 매를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화도 내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그 반이 학년 꼴찌를 했는데도 공부 좀 하라고만 하고 말았다고 했다. 다들 의아해했지만, 그의 변화를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과 공부는 어려웠다. 특히, 화학과 물리 시간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난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내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내 편지의 영향이 아닐 수도 있지만, 더 이상의 체벌을 막는데 내가 일조한 것이라 생각했다. 누가 알아주건 말건 난 정의를 행했고, 그 걸도 된 것이었다. 그렇게 그 일은 나 혼자만의 비밀로 묻혀갔고, 더 이상 나에게 작가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몰랐어? 선생님 돌아가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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