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팡도르
새해 첫 번째 책.
제1장, 허무의 물결 속에서, 봄날은 간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생이 이토록 빨리 지나가다니. 이럴 때 두려운 것은, 화산의 폭발이나 혜성의 충돌이나 뇌우의 기습이나 돌연한 정전이 아니다. 실로 두려운 것은, 그냥 하루가 가는 것이다." p19
봄이 가는 게 아쉽고, 세월이 가는 게 아쉬운 것은 저 아름다운 것이 지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성당에서 성경 말씀을 가르치던 수녀님이 다음 강좌 '코헬렛'을 이렇게 안내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무엇이 나를 '허무'라는 단어에 천착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강좌를 기필코 들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공교롭게 강좌는 연중 드물게 하는 레지오의 주방 봉사와 겹쳐 있어서 그 시간 나는 성당 지하에 있게 되었다. 당연히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고.
여태 이 일을 기억하는 건 막상 강좌를 들었으면 잊어어 버렸을 일인데, 놓쳐버린 게 아쉬워인지 모른다.
삶의 끝에 우리가 가지는 미련도 이와 흡사하지 않을까?
이렇게 허무할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계가 있고 누구나 은은하게 미쳐있고, 그럭저럭 바보 같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p202
진리를, 신을, 미래를 안다고 강변하는 이들. 그런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촛불로 수권 정당이 된 민주화 세력의 몰락, 남녀 간 파이 다툼으로 보이는 갈등.
세상에는 다원적 가치가 존재한다. 그 다양한 가치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성을 가져야 한다. 희망, 자신감. 정의 같은 비물질적 가치는 양이 무한하다. 그러니, 우리!
좋아하되 파묻히지 않으려면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그 마음의 중심은 경직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기꺼이 상대를 받아들이되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디저트 이야기가 아니다.
책에서 소개한 동화 '할머니의 팡도르'는 내가 가지고 있던 동화책이다. 붉고 검은 삽화. 할머니에게 찾아온 죽음의 사자.
인생이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한다. 유한한 삶은 무한한 삶을 사는 천사가 가장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인간의 특질 아닌가.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지만 동화 속의 할머니처럼 각자의 레시피를 남긴다. 그 레시피는 계피 넣은 빵처럼 향기롭고 달콤한 것이면 좋겠다.
"청년들에게는 넘치는 에너지가 있지만, 그 에너지를 소진하며 살아야 할 고된 삶이 남아있다. 노인은 바로 그 노고로부터 면제된 것이다."p118
새해에는 많이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