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훈 Jun 11. 2020

떡볶이는 추억으로 먹는다

 지금은 허물어져 버린 잠실 시영아파트엔 커다란 놀이터가 몇 개씩이나 있었다. 난 그곳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면 그곳에 모여 노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우린 그냥 놀이터로 갔다. 스마트폰은커녕 삐삐라도 들고 다니는 아이가 있으면 신기했을 시절이었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 같은 거 없어도 그땐 그냥 놀이터에 가면 친구들이 있었다. 야구 배트에 글러브를 끼워 어깨에 척 걸치고 가면 그때부터 야구경기가 시작되었고, 테니스공 하나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가서 와리가리를 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없으면 야도나 탈출 같은 술래잡기 게임을 하면 그만 이었다. 그렇게 저녁나절까지 놀다 보면 놀이터 바로 앞 아파트에서 엄마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었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엄마가 부르는 각자의 이름을 듣고 아쉬운 마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나 역시 그 아이들 중 하나였다. 온몸에 묻은 흙을 대충 털고 들어가면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준 저녁 밥상이 차려져 있다. 평소에는 와구와구 잘만 먹던 아들 녀석이 이상하게 음식을 깨작거리자 어머니는 등짝을 때리며 말한다. “너 또 떡볶이 사 먹었지!” 

    

 온 동네 아이들이 다 모이던 커다란 놀이터 옆엔 2층짜리 작은 상가가 있었다. 그곳엔 세 개의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는데 시영 분식과 새로나 문방구, 그리고 새마을 구판장이었다. 분식집과 문방구, 구멍가게와 놀이터의 조합이라니 우리들은 당연히 그곳에서 놀 수밖에 없었다. 신나게 공놀이를 하다가 목이 마르면 새마을 구판장에 가서 350원짜리 병 콜라를 샀다. 그러면 어느새 아이들은 나를 둘러싸고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크게 입을 벌렸다. 350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한 콜라를 한 입씩 나눠주다 보면 내 몫은 채 세 모금도 되지 않았다.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음엔 저 새끼 새 무리에서 누군가 어미 새가 될 테니까. 공놀이가 지겨워지면 새로나 문방구 앞에 있는 미니카 트랙으로 달려갔다. 한두 살 많은 형들의 미니카엔 그 비싸다는 골드블랙모터가 달려있었다. 우리들은 부러움의 눈빛을 보내며 동시에 미친 듯이 트랙을 도는 미니카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곳엔 우리가 필요로 하던 모든 게 다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 최고는 역시 시영 분식이었다. 하지만 이 곳에 간다는 건 앞선 두 가게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 문제는 어머니가 베란다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내 이름을 부를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지금 떡볶이를 한 접시나 먹어버린다면 배가 부를 테고, 그럼 저녁밥을 깨작거릴 테고, 곧바로 엄마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올 것이다. 오늘 숙제는 하고 나가 놀았냐는 불호령이 곧바로 이어지겠지. 어쩌면 퇴근하는 아빠의 귀에 숙제도 안 하고 나가 놀다가 떡볶이를 사 먹고 들어왔다는 사실이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등골이 오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의 걸림돌은 초등학생에겐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당시 떡볶이 일 인분의 가격은 천 원. 동전이 아닌 지폐를 내서 계산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떡볶이는 비싼 음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종일 뛰어놀아 배고픈 우리들은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을 감수하고, 없는 돈을 십시일반 모아 그 금단의 떡볶이를 먹고야 말았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시영 분식에는 그야말로 혁명이라고 불릴만한 신메뉴가 등장했다. 초록색 바탕에 하얀 무늬가 얼룩얼룩 들어가 있던 떡볶이 접시가 아닌 말 그대로 종이컵에 담아서 주는 컵 떡볶이였다. 대체 떡볶이를 컵에 담아서 주는 게 어쨌단 말인가 싶겠지만 그 별것 아닌 발상의 전환은 우리가 떡볶이를 먹기 힘들었던 두 가지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주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컵떡볶이의 솔루션은 적당한 양이었다. 매일 같이 오고 가며 눈도장을 찍었던 분식집의 인심 좋은 아주머니는 우리가 늘 배고프다는 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코 묻은 동전 모아 수줍게 내미는 우리들에게 아주머니는 늘 넉넉한 떡볶이 양으로 화답해 주었다. 일 인분 값을 내고도 우리는 3~4인분의 양을 먹었다. 당연히 떡볶이를 먹은 날의 저녁 밥상에선 깨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종이컵에 담아서 준다는 컵떡볶이의 특성상 넉넉한 아주머니의 인심도 종이컵 끝자락에 걸칠 수밖에 없었다. 더 주고 싶어도 더 이상 쌓을 수 없으니 그야말로 간식으로 적당한 양이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문제의 해결 방안은 절반으로 떨어진 가격이었다. 큰 맘먹고 집에 있는 동전 통에서 꺼내오는 오백 원짜리 동전이 전 재산이었던 코찔찔이들에게 평소의 반값으로 즐길 수 있는 떡볶이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가끔은 천 원짜리 지폐를 주머니에 넣고 나왔던 운수 좋은 날도 있었다. 그땐 컵떡볶이와 함께 삼백 원이었던 슬러시를 먹고서도 백 원을 남길 수 있었다. 그 백 원은 새로나 문방구 앞에 있던 뽑기 기계로 들어갔다. 새마을 구판장 아저씨에겐 죄송하지만 역시 콜라보다 슬러시였다.

     

 떡볶이는 맛없는 음식이라고 해서 큰 곤혹을 치렀던 칼럼니스트 한 분이 계시다. 분명 그분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음식의 가치를 매기는 수단은 오로지 ‘맛’뿐인 걸까? 설탕과 갖은양념 때문에 폄하당하기엔 떡볶이는 너무 많은 이들의 소울 푸드다. 누군가는 죽고 싶을 때도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분의 저서도 몇 권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떡볶이는 맛없는 음식이라는 주장에 담긴 속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문장은 내게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대중들은 떡볶이 맛에 대한 폄하에 왜 그다지도 분노했을까. 정말 떡볶이가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기 때문일까? 그 답은 컵떡볶이를 들고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던 그때의 나와 떡볶이를 먹을 때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웃게 되는 지금의 나 사이에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밥 먹으면 안 되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